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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묘역도 친일파-독립운동가 나란히... 씁쓸하네요

[동작민주올레-시즌2] 서울현충원의 장군 제1묘역과 부부위패판의 독립운동가들

등록 2021.05.03 11:21수정 2021.05.0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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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에서 독립유공자를 만나는 일은 독립유공자 묘역과 무후선열제단, 임시정부요인 묘역, 국가유공자 묘역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충혼당과 부부위패판, 현충탑 위패봉안관, 심지어 장군 제1묘역에서도 독립유공자를 만날 수 있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충혼당과 부부위패판, 현충탑 위패봉안관, 장군 제1묘역 등에 안장되어 있는 독립유공자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 기자말[기자말]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1묘역과 부부위패판에 안치되어 있는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장군 제1묘역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 바로 위편에 자리하고 있고, 부부위패판은 현충문과 현충탑의 왼편 바깥에 위치해 있다. 

장군 제1묘역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최용덕과 고시복
  

독립운동가 최용덕의 묘(장군 제1묘역) 해방 이후 대한민국 공군의 제2대 참모총장을 지낸 최용덕은 중국 국민혁명군의 전투 비행사 출신으로 의열단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등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 ⓒ 김학규

 
독립유공자 묘역에는 한국광복군 출신으로 해방 이후 국군의 장군을 지낸 박기성, 박시창, 박영준, 안춘생, 이준식, 유해준 등이 안장되어 있다. 그런데 독립유공자 중에 독립유공자 묘역이 아닌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장군 제1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한국광복군 출신의 최용덕 장군(1898-1969)과 고시복 장군(1911-1953)이 그들이다.

그동안 장군 제1묘역은 간도특설대 출신의 김백일과 일본육사를 나와 일본군 포병장교로 있던 신응균 등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안장되어 있는 곳으로 자주 소개된 관계로 한국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도 안장되어 있는 곳이라는 사실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용덕은 해방이후 공군 창설의 주역으로 2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후 1955년에 공군 중장으로 제대한 인물이며, 고시복은 육군사관학교 2기 졸업생으로 서울지구병사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한국광복군에서 총무처장과 참모처장을 지낸 최용덕은 한국인 최초의 전투비행사 서왈보의 추천으로 1920년 중국 허베이성 보정항공학교에 입학하여 비행기 조종사의 길을 걸었는데, 1927년에는 중국 국민혁명군에서 한국인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 등과 함께 비행사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 이전인 1922년에는 김원봉의 의열단에도 참여하여 김상옥 의사의 의열투쟁을 지원하는 일도 맡았다. 1940년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군무부 항공건설위원회 주임을 맡아 항공부대 창설을 위해 노력했던 최용덕은 해방 이후 귀국하여 한국항공건설협회 회장에 추대되면서 공군창설의 주역으로 활약했고, 제2대 공군참모총장도 지냈다. 

최용덕이 독립유공자 묘역이 아닌 장군묘역에 안장된 것은 공군창설의 주역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내가 죽거든 군복을 입혀 묻어달라"고 했던 공군을 사랑한 그의 유언이 반영되었던 결과였다.
  

독립운동가 고시복의 묘(장군 제1묘역) 6.25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고시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등에서 중견 간부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 김학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전령 장교와 참모처 제2과장 등을 역임한 고시복은 김구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국내외를 연결하면서 군자금 모집, 일제밀정 처단, 기밀문서 수발 등의 활동을 하였고, 1936년에는 중국군 제9사단에 편입되어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쉬저우(徐州)·난커우(南口) 등지의 전투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고시복은 사망한 후 24년이 지난 1977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고시복이나 그의 유족은 최용덕의 경우와 달리 독립유공자 묘역과 장군묘역 중에서 묻힐 곳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었다.

독립운동가 출신 최용덕과 고시복이 정부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김백일과 신응균을 비롯한 10여 명의 친일인명사전 등재자와 함께 장군 제1묘역에 나란히 안장되어 있는 모습은 일본군과 만주국군 출신이 해방이후 한국군 건설의 주역으로 활동한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씁쓸한 현실이기도 하다.  

[관련 기사]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나란히... 참 불편한 현장 http://omn.kr/1saty 
만주 장교가 '광복투쟁'? 현충원 속 기막힌 신분세탁 http://omn.kr/1shzh

서울현충원 부부위패판 -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위패가 나란히
 

국립서울현충원의 부부위패판 부부위패판은 2009년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이곳에는 독립유공자와 6.25 한국전쟁 참전 군인, 경찰, 애국단원 등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 김학규

 
독립유공자 묘역을 잘 아는 사람들도 독립유공자의 위패가 봉안된 곳을 물으면 독립유공자 묘역 위쪽에 있는 무후선열제단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현충탑 안쪽에 있는 위패봉안관과 현충탑 왼편의 부부위패판에 독립유공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부부위패판이 2009년 4월 1일부터 위패를 봉안하기 시작하였음에도 독립유공자와 군인·경찰·애국단원 등의 위패가 뒤섞여 봉안되어 있다 보니 찾는 이들의 접근이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 전용 부부위패판을 독립유공자 묘역 쪽에 배치하여 방문객들이 접근성을 높이고 교육적 효과도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 국립서울현충원이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현재 이곳 부부위패판에는 이태준 등 순국선열 5위과 최재형 등 애국지사 82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데, 연해주에서 일본군에 의해 참살을 당한 최재형 등 여러 독립운동가의 위패가 있는 부부위패판(5)에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는 특수부대였던 간도특설대의 기박련(기관총-박격포 부대) 연장까지 해서 정부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인한 김홍량의 위패가 함께 안치되어 있다는 점도 현 부부위패판을 정비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이런 씁쓸한 현실을 일단 뒤로 하고 부부위패판에 안치되어 있는 87명의 독립유공자 중 이태준과 최재형을 소개하는 것으로 부부위패판의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부부위패판의 독립운동가 최재형과 정필조, 친일반민족행위자 김홍준 국립서울현충원 부부위패판(5)에는 일본군에 죽임을 당한 독립운동가 최재형과 간도특설대 기박련 연장 출신의 정부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김홍준의 위패가 가까이에 안치되어 있다. 김홍준의 위패는 또 다른 독립운동가 정필조와는 더 가까이에 위치해 있다. ⓒ 김학규

 
몽골의 한인 슈바이처, 이태준

몽골의 '한인 슈바이처'로 불리기도 하는 이태준(1883-1921)은 의사로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몽골 국왕의 어의 역할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이태준의 위패가 부부위패판(07-148)에 봉안한 것은 2017년의 일이다.

이태준이 몽골의 울란바토르로 간 것은 1914년 무렵이었다. 신민회 회원이자 의사였던 김필순의 '김형제 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중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하여 의사가 된 이태준은 1911년 105인 사건이 터지자 김필순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터였다. 당시 우사 김규식이 몽골 지방에서 비밀 군관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권유로 몽골에 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4년 가을 이태준은 울란바토르에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의 병원'이라는 의미를 지닌 동의의국을 개업하였다. 근대 의술을 지닌 이태준은 몽골인들의 신임을 얻으면서 몽골 왕궁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태준은 곧 국왕의 어의가 되었고, '귀중한 금강석'이라는 뜻을 가진 국가 훈장 '에르데나-인 오치르'를 받기도 한다. <독립신문>(1919. 11. 11)에 의하면 당시 몽골인들은 이태준을 '신인'이나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을 대하듯 하였다고 한다.
 

세브란스의학원 제2회 졸업생 사진(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이태준) 몽골의 한인 슈바이처로 불리기도 하는 이태준(1883-1921)은 의사로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몽골 국왕의 어의 역할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몽골 울란바토르에는 2000년에 이태준기념공원과 기념관이 세워졌다. 이태준의 위패가 부부위패판(07-148)에 봉안한 것은 2017년의 일이다. ⓒ 독립기념관 제공

   
이태준은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면서 항일 활동에서 큰 공적을 남겼다.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는 김규식에게 운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하고, 중국과 러시아 국경을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일도 이태준의 몫이었다.

이태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였던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이 주도하여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확보한 코민테른 자금 40만 루블 상당의 금괴 운송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이태준은 당시 한인사회당 연락을 담당한 비밀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자금 가운데 김립이 책임졌던 12만 루블 중 1차분 8만 루블의 운송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베이징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난 이태준은 우수한 폭탄 제조 기술자 헝가리인 마쟈르를 김원봉에 소개하는 일도 했다. 당시 질 낮은 폭탄의 불발로 아까운 생명을 잃게 되는 등 손실이 커 고통받던 의열단에게 마쟈르는 가뭄에 단비 같은 역할을 했다. 영화 <밀정>에 등장하는 서양인이 바로 마쟈르였던 것이다.

1920년 이태준의 죽음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북경에서 몽골을 거친 베를린 행을 위해 이태준과 함께 여행했던 이극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태준 씨와 동행이 되어 북경을 떠난 때는 1920년 10월이다. 장가구에 가서는 백당의 난리로 울란바토르로 가는 도로가 막혀서 여러 날 기다렸으나 안정될 희망이 없으므로 부득이 북경으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것은, 수주일 후에 이태준 씨는 혼자 울란바토르로 들어갔는데 즉시 백당군에게 잡혀서 참살당하여 뼈도 찾지 못하게 된 것이다.(이극로, 『고투 40년』)

현재 '이태준 기념공원'이 몽골의 울란바토르에 조성되어 있다. 이태준은 한-몽 친선의 상징적 인물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이태준의 고향인 경남 함안에도 2021년 개관을 목표로 '이태준 기념관' 건립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애국지사' 최재형(1860-1920)의 위패는 부부위패판(5-149)에 봉안되어 있다. 최재형은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지만, 그의 위패가 부부위패판에 봉안된 것은 2015년의 일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던 최재형은 러시아 정부가 지방정부 시장으로 추천할 만큼 한인사회의 대표적 지도자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오른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던 최재형은 러시아 정부가 지방정부 시장으로 추천할 만큼 한인사회의 대표적 지도자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다. ⓒ 독립기념관

 
최재형의 러시아 이름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였다. 러시아인들은 그를 친근하게 페츠카라고 불렀다. 러시아어 발음에 익숙하지 않았던 한인 동포들은 최재형을 '최 비지깨'라고 불렀고, 이것이 그의 별명이 되었다. '비지깨'는 함경도 농민들이 '성냥'이라는 뜻의 스피치카에서 차용해 만든 함경도 사투리였다.

9세 때 극심한 흉년으로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할아버지와 부모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한 최재형은 온갖 고생 끝에 러시아에서 성공한 부호가 되었다.

최재형은 일찍이 항일의병 활동자금으로 거금을 내놓았고, 1908년부터 두만강을 건너 함북 일대의 일본수비대와 소규모 전투를 벌이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연해주와 만주지역의 의병들이 1908년 7월 대대적인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다 회령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면서 최재형의 의병세력은 위축되었다.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지원한 이도 최재형이었다.

최재형은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그 해 1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여 일제에 맞설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시베리아 내전에서 백군이 적군에 패배하자 한인들은 더욱 고무되고 있었다. 최재형으로선 1908년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재형의 국내진공작전의 꿈은 그렇게 또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일제가 볼세비키와 강화조약을 체결하기로 약속한 1920년 4월 5일 기습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1920년 3월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일본군이 전멸하고 일본거류민들이 몰살된 사건인 니항 사건을 빌미로 "일본인민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시베리아 간섭전쟁을 강화했고, 이때의 4월 참변으로 최재형은 일제에 체포되어 우수리스크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유족들의 강력한 요구에도 일제는 최재형의 시체조차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인섭은 4월 참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아침 9시 30분에 왜병들은 대포·기관포로 도시를 향하여 사격을 시작하여 전 시가는 불에 타기 시작하였고, 노인이나 여자나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집에서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왜군들 총창에 맞아 쓰러졌다. …… 해삼 신한촌 한민학교는 불에 타서 재무지로 변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수십 명 조선 빨치산들이 있었다. 체포되었던 조선인 애국지사들이나 놈들이 빨치산이라고, 공산주의자라고, 반일 운동자라고 의심하는 인사들은 모두 비밀리에서 잔인무도하게 학살을 당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한 평생을 직업적으로 조선을 해방하기 위하여 분투 공작하던 직업적 혁명 열사들인 최재형·엄주필·김이직 선진들이 계신 것이다.

(이인섭, <저명한 애국자들인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동지들을 추억하면서>, 1960)
덧붙이는 글 곧 현충탑 위패봉안관에 안치되어 있는 독립운동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부부위패판 #최재형 #이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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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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