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조주빈 검거 1년, 그 '시작'이 된 두 사람의 이야기

N번방 최초 고발자 ‘추적단 불꽃’의 기록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등록 2021.03.19 17:48수정 2021.03.19 18:02
1
원고료로 응원
2019년 <한겨레> 신문의 'N번방' 특별취재 기사를 읽을 때였다. 극심한 충격과 함께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거 뭐야. 끔찍한 '웰컴투비디오'의 후예들이잖아." 한숨을 토했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사건은 이 사건의 극악함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언론의 주목을 받지 않았다. 이 사이트의 이용자인 영국인과 미국인들이 중형을 받고, 미국에서 '웰컴투비디오' 사이트 운영자인 손정우를 송환하겠다고 나서고야 조금씩 기사화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심각한 아동(아기인 영아가 피해자의 상당이었다) 성 착취 사건을 언론에서 심도 있게 다루지 않는지 분통이 터졌다.


성착취를 잡범으로 다루는 한국 사회의 성폭력 불감증은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 씨가 받은 낮은 형량, 1년 6개월로 여실히 증명되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 그리고 '가장'이라는 점이 낮은 형량의 이유가 됐다. 한국 가부장 사회가 그를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수많은 피해자들은 고통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옛 사건이 된 '웰컴투비디오' 사건을 새삼 끄집어 낸 이유는, 지난 16일이 'N번방' 조주빈 검거 1년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조주빈 검거 후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인식과 처벌엔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피해자들의 고통 앞에서는 숨을 멈추게 된다.

'N번방'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 싶을 때마다 불안하다"는 '불꽃'의 '불'과 '단'의 심정이 되어, 잊어서는 안 되는 이 사건을 다시 새겨보고 싶어 이 책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집어 들었다.

'N번방'에 앞서 '웰컴투비디오'가 있었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 출판사 이봄

 
'N번방'을 추적 취재하며 '불꽃'은 이 사악한 범죄의 기원이 '웰컴투비디오'였음을 깨닫는다. 손정우가 검거되자 손정우의 신봉자인 성착취범들은 잠시 흩어진다. 하지만 손정우와 웰컴투비디오' 한국 이용자들에게 내려진 솜방망이 처벌은 성착취범들에게 매우 위험한 신호를 주고 만다.

'웰컴투비디오' 사건 때 일찍이 그 심각성을 공론화하고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었더라면, 'N번방'은 없거나, 있더라도, 그 피해가 이토록 심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타자는 그저 '피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피해 당사자는 그렇지 않다. 성폭력에 삶을 침탈당한 이들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일상은 산산이 박살나 버렸다.


'N번방'의 심각성은 2020년을 뜨겁게 달군 화두였다. 여성 단체나 개인들의 연합은 'N번방'을 심대한 여성 인권 침해로 여기고 전면 투쟁에 나섰고, 2020년 5월 이른바 'N번방 방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국회의원을 필두로 마초 남성들과 중고등학생 아들을 둔 내 지인들이 토해내던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경시와 무지의 '아무 말 대잔치'는 한국이 '성착취 넘버 원' 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줬다. 

성인지 감수성의 담지는 고사하고,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혐오 가득 찬 막말이 난무할 때엔, 이게 대체 교육해서 될 일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피해자가 단초를 제공해서 성폭력이 일어난다는 '흠결 없는 피해자다움'에 대한 동어 반복을 마주할 땐, '추적단 불꽃'의 발언처럼,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이유를 그냥 "외우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불'과 '단'은 피해자의 고통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2019년 'N번방' 문제를 처음으로 다룬 한겨레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던 이유는, 'N번방' 최초 보도자이자 신고자가 기존 미디어의 기자가 아니라, 당시 취업준비생이었던 젊은 두 여성들이라는 것을 알고서였다. '와, 굉장한데'.

나는 이들이 어떤 여성들일까 무척 궁금했다. 그리고는 이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 괜찮을까?' 내 걱정은 '추적단 불꽃'이 얼굴을 숨기고 인터뷰한 기사를 보고 더 증폭되었다. 그리고 이 책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읽고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불꽃'의 불과 단은 어떤 여성들이고 어떤 경험을 했을까.

책은 'N번방' 추적기를 초반에 다루고, 이후는 'N번방' 취재를 기점으로 불과 단의 경험과 고통 그리고 성장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미디어에 기사화된 'N번방' 추적기와 달리, 이들의 최초 추적기는 '추적'이라기 보다는 '목격'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때문에 목격자인 불과 단은 목격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상처받는다.

참혹한 범죄의 현장을 지켜보다 자신도 모르게 피해자에게 이입하게 된 건 생각보다 크게 불과 단을 괴롭혔다. 그들도 이렇게 힘들 줄 몰랐을 것이다. 취업 스펙을 쌓기 위해 시작한 한 공모전의 주제를 '불법 촬영'으로 잡고, 그 악마들의 소굴인 N번방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전에 의기투합한 불과 단은 평소 큰 문제라고 생각했던 '불법 촬영' 취재에 몰두하다, 한 블로그를 발견한다. '와치맨'이 운영하는 성착취 블로그였다. 불과 단은 블로그에서 텔레그램 링크를 받고 성인 인증 절차도 없이 다섯 시간 만에 성착취 'N번방'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들이 대화방에 입장했을 당시엔, 이미 비틀어진 성착취의 욕망으로 달구어진 수천 명의 공범자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마치 축구 경기를 관전하듯 범죄 현장을 공유하면서 웃고 떠들며 성착취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불과 단은 경악했다.

충격적인 상황에 압도당할 때 사람은 보통 그 상황에서 도망치기 마련이다. 자아를 보호하려는 무의식의 발동일 것이다. 하지만 불과 단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 같은 현장을 목격해도, 잊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 현장과 상황이 이미 쐐기처럼 박혀버린 사람들은 그 현장을 도려낼 수가 없다. 이들에게 'N번방' 피해자가 그랬다.

'N번방' 공모자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간은 자정부터 동틀 때까지다. 그러니 불과 단도 이 사이클에 맞추어야했고 일상이 엉망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잠을 아껴가며 'N번방'에 몰두하며 모은 증거로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경찰서를 찾아간 것이었다. 취재 공모고 뭐고, 취업 스펙이고 뭐고, 둘째 문제였다. 이들에게 가장 시급했던 건, 이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잡는 것이었다.

어렵게 수집한 증거를 들고 불과 단은 경찰 사이버 수사팀을 찾아간다. 다행히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한 경찰의 협조로 수사가 시작된다. 이렇게 수면 부족으로 버석한 얼굴을 한 두 젊은 여성이 떨리는 손에 증거를 쥐고 경찰서로 걸어 들어가 신고하며 시작된 사건이 'N번방' 사건이다. 이들이 외면했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더 많은 참혹한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나는 이 두 젊은 여성이 해낸 일이 믿어지지 않는다. 어디서 그런 결기가 나왔을까.
 
a

검찰로 송치되는 '박사방' 조주빈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 등 수십 명의 여성을 협박, 촬영을 강요해 만든 성착취 영상을 유포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씨가 지난 2020년 3월 25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나오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읽으면, 'N번방' 사건이 이들에게 그저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N번방' 추적으로 그들은 달라진다. 'N번방' 취재를 통해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과 주변의 성폭력 흔적을 복기하게 되고, 여자로 사는 자신의 삶을 재해석하기에 이른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는 불과 단의 'N번방' 추적기인 동시에 페미니즘 관통기이기도 하다.

잘 모르는 사이였던 '불꽃'이 'N번방' 추적을 통해 '우리'로 결속되었고, 이들이 서로를 지지하며 벌이는 활약에 독자 역시 '우리'라는 연대감을 환기하게 된다. '불꽃'이 '우리'라는 낱말을 세 차례나 반복해 책 이름을 정한 데에는, '나는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은 궁색한 회피보다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당사자성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불과 단이 20대 초반에 겪은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불꽃'처럼 강렬하다. 강렬한 만큼 노고와 고통도 수반되기 마련이다. 불과 단이 'N번방'을 추적하기 이전과 이후 어떤 경험을 했는가를 듣고 알게 되는 것은, 이들이 왜 고통스런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는가를 이해하는 일과 같다.

책은 불과 단이, 어릴 때부터 요구받았던 여자다움과 어떻게 충돌하며 타협 혹은 싸워왔는지를, 분명 당했는데 명명하지 못한 채 은폐됐던 중 고등학교 때의 성폭력의 기억을 어떻게 재해석해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지를, 대학 생활과 아르바이트 중 겪었던 만연한 강간 문화가 결코 개인의 피해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으로 주조된 결과라는 것을 어떻게 자각하는가를, '탈코'로 겪은 페미니즘과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하고 나아가는가를, 날카롭게 사유하고 명확히 규명해내고 있었다. 혹독한 담금질을 한 불과 단은 분명 예전보다 훨씬 단단해져 있다.

'N번방' 피해자를 대하는 불과 단의 망설임과 회의는, 독자로 하여금 타인의 피해에 얼마나 '입장의 동일함'으로 다가갔는가를 성찰하게 한다. 강연, 인터뷰 등 사람들 앞에서 피해를 말해도 될까, N번방 범죄를 밝히는 일이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목격자로서의 윤리와 피해자에 대한 미안함이 불과 단의 마음에서 길항한다. 취재 대상과 엄격한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객관을 유지하려는 저널리즘보다, 피해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우선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아웃리처'로 정체화하게 되는 이유다. 

조주빈 검거 1년, 디지털 성 착취 피해는 멈추거나 회복되고 있을까?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는 2018년부터 월평균 9000여 건의 불법 촬영물을 삭제하고 있고 지금껏 센터에 도움을 요청한 피해자는 7440여 명이라고 한다. 이 사실이 함의하는 바는, 'N번방' 사건이 피해자에게 아직, 아니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악몽이라는 것이다. 또한 디지털 불법 촬영물을 받아 보고 유포하는 'N번방'의 후예들이 여전히 활약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N번방'을 여전히 추적하고 있는 '불꽃'의 활동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우리'가 되는 것이 이 끝나지 않는 '싸움'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는 연대가 되지 않을까 싶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 N번방 추적기와 우리의 이야기

추적단 불꽃 (지은이),
이봄, 2020


#조주빈 검거 1년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추적단 불꽃 #디지털 성범죄 #불법 촬영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4. 4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5. 5 "윤 대통령, 류희림 해촉하고 영수회담 때 언론탄압 사과해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