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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 단련하며 군벌시대에 대처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 5회] 무술 수련의 고된 과정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운산 한 명이었다

등록 2021.01.11 17:40수정 2021.01.1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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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최운산 장군 (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연변박물관에 전시된 최운산 장군 초상화.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최운산의 인생 행로는 기구하고 험난한 생애였다.

태어난 시대도 그랬지만 출생의 장소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간도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나 간도협약으로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청국(중국)인의 신분으로 바뀌었다. 한반도에 거주하는 당시의 한국인(조선인)들이 비록 일제의 침략으로 식민지 백성이 되었으나 신분은 여전히 한국인이었지만, 최운산과 그의 가족은 청국인으로 국적이 바뀐 것이다. 망국과 함께 국적까지 잃게 된 '이중상실'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와 같은 험난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던지 아버지는 일찍부터 자식들에게 스스로를 지키도록 체력을 단련시키고, '도태의 난' 당시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무술인 친구를 집으로 초빙하여 아들들의 사부로 삼았다. 그래서 이들 형제들은 강건한 체력으로 무장독립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처음 무술 수련을 시작할 때 50여 명이 같이 시작했으나 무술 연마 과정에서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인원이 줄어들었다. 무술 수련의 고된 과정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명길(운산) 한 명이었다. 사부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무술의 전수자로 명길을 인정하였다. 명길은 몸 움직임이 하도 빨라 가족들조차 그가 집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 수 없을 때가 태반이었다고 한다.
 
평생 전쟁터를 누빈 최운산 장군의 무술 실력은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50대였던 어느 날, 청년 10명이 커다란 원을 그려놓고 봉으로 최운산 장군을 공격하며 원 밖으로 밀어내려고 했지만 아무도 그를 치거나 원밖으로 밀어낼 수 없었다고 한다. (주석 4)

 

최운산·최진동 형제 ⓒ 최성주

 
최운산과 그 형제들의 고난에 찬 무장투쟁의 사력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청소년기 중국의 정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1910~20년대는 신해혁명기이면서 군벌의 시대였다.

춘추전국시대 이래 최대의 무인시대라는 군벌의 뿌리는 양무운동시기 이홍장의 군사력 강화과정에서 시작되었다. 민국의 초대 총통 원세개(袁世凱)가 죽은 뒤 단기서(段祺瑞)와 풍국장(馮國璋)) 등이 중국정부를 이끌었다. 

당시 동북삼성 지역의 지배자는 장작림(張作霖, 1875~1928)이다. 청대 말 민국 초기의 정치가로서 민국 당시 봉천파(奉天派)의 영수다. 봉천(奉天) 해성(海城:요녕성) 출생으로 1911년 27사단장이 되고, 1914년 원세개(袁世凱)의 아들 원극정(袁克定)과 형제관계를 맺었다. 이듬해 원세개가 칭제(稱帝)하면서 자작(子爵)에 봉해졌다. 1916년 위무장군(威武將軍)에 임명되어 봉천장군 은지귀(殷芝貴)를 몰아내고 봉천군벌 내 봉천파의 영수가 되었다. 
 
1922년 직봉(直奉) 전투에서 직예파(直隸派)에게 패하고 동삼성자치보안사령(東三省自治保安司令)으로 물러난 뒤 동삼성의 독립을 선포하고 단기서(段祺瑞)ㆍ손문(孫文)과 삼각동맹을 맺었다. 1924년 2차 직봉전쟁 때 대승하여 진위상장군(鎭威上將軍), 봉천성장(奉天省長)이 되고, 3년 후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에 올랐다. 이듬해 그가 탄 기차가 일본군에 의해 폭파되면서 사망했다. (주석 5)


군벌 중에 최운산과 관련이 있는 사람 중에 오패부(吳佩孚:1874~1939)는 청대 말 민국 초기의 정치가이다. 민국 당시 직예파(直隸派)의 영수. 산동성 봉래(蓬萊) 출신으로 1906년 북양군벌(北洋軍閥)에 들어가 조곤(曹錕) 밑에서 북양군을 통솔했다.

조곤이 총통에 취임한 후 직노예순열사(直鲁豫巡閱使)가 되었다. 1924년 2차 직봉(直奉) 전쟁 때 직군(直軍)의 총사령이 되어 봉군(奉軍)과 싸우다 패주했다. 1932년 장개석의 영입으로 낙양에서 국난회의(國難會議) 위원이 되었다. (주석 6)
 

주석
4> 앞의 책, 93쪽.
5> 이병갑 엮음, 『중국역사사전』, 413쪽, 학민사, 1995.
6> 앞의 책, 309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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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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