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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으로 끝난 수석 입학생의 짧은 삶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김용갑 의문사 사건

등록 2020.07.06 10:42수정 2020.07.0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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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갑의 묘 ⓒ 고상만

 
김용갑은 1989년 3월 강원도 속초 동우전문대학(아래 동우대)에 입학해 대학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도서관 문제 등 학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취재활동을 했고 편집자율권을 요구했다. 또한 그는 '동우학원 민주실천위원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동우대의 '전대협' 가입을 추진했고, 1980년 광주학살 당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박종철, 이한열 추모식 자리에서 노태우 정권을 비판했다.

그러자 임아무개 등 동우대 재단 측의 지원을 받던 폭력 학생들은 1989년 11월 총학생회 선거를 준비하던 김용갑 등 학생들을 폭행했다. 특히 총학생회 선거를 준비하고 있던 '탈춤' 동아리방에 15명 정도의 폭력 학생들이 들어와 동아리 소속 학생들을 무릎 꿇게 한 후 "데모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라"라고 하면서 주먹과 발로 폭행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이와 같은 폭력 사건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런 협박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김용갑은 학생들의 압도적 지지로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학생회장으로 김용갑은 장학금 지급과 부동산 투기 등과 관련한 동우대학 재단 비리를 밝히기 위해 학내 집회를 여는 등 재단비리 문제 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어서 동우대 학생들은 1989년과 1990년 기숙사, 학생회관을 비롯한 학생 복지시설 확충, 실험실습 여건 개선, 장학금 인상, 등록금 문제 시정을 요구하는 학내 집회를 여러 차례 개최했다.

폭력배에게 돈 주고 술 사준 대학 직원

그러자 1990년 3월 6일 신입생 환영회에서 동우대 재단 측이 고용한 폭력배들은 김용갑 등 총학생회 간부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필자의 지인이자 당시 김용갑의 동문인 고상만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학교는 지역 폭력배를 사주하여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십 수 명의 폭력배들은 떼를 지어 쇠파이프, 각목 등으로 학생들을 폭행하고 협박했다. 그 공포감과 두려움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참 많이 맞았다. 정말 딱 한 대만 더 맞으면 죽을 것 같은 공포감으로 수없이 몸을 떨어야 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사건은 1990년 3월 6일 신입생 환영회에서였다. 또다시 술에 취한 폭력배 10여 명이 김용갑과 나를 유스호스텔에 감금한 채 폭행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학생들을 선동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어진 무차별 폭행은 처참했다. 술 취한 그들의 각목은 약간의 인정도 없이 아무렇게나 마구 휘둘러졌다.

얼마나 맞았을까. 무차별 폭행이 그쳤을 때, 내 몸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벽을 타고 스르륵 무너졌다. 머리와 입, 코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바닥으로 번졌다. 거울에 비친 내 처참한 몰골은 여전히 쉽게 지워지지 않는 악몽처럼 남아 있다. 그 후, 그날의 폭력사태 역시 학생처 직원의 사주에 의한 것이란 걸 한 폭력배의 양심선언을 통해 알았다."
- "7차례 때리고 협박... 그리고 그는 죽었다"(오마이뉴스 2012.1.27)

김용갑이 총학생회장으로 재임한 기간은 불과 20여 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 기간 중 김용갑은 동우대 측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에게 무려 일곱 차례 폭행을 당했다. 폭력배들은 폭력과 함께 김용갑에게 "학생회장직을 사퇴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특별히 학생처 직원 김아무개는 1990년 3월 21일 김용갑에게 "학내민주화운동을 하지 말라. 나는 나를 배신한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차로 갈아 버리겠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하겠다. 사람을 차로 갈아버려도 과실치사로 6개월이면 풀려나온다"라고 협박했다.

그래서 이런 학생처 직원과 폭력 학생들에게 위협을 느낀 김용갑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몸에 칼을 지니고 다녔다.

하지만 학생처 직원 김아무개로부터 "차로 갈아 버리겠다"는 협박을 듣고 1주일이 지난 1990년 3월 28일 새벽 2시 김용갑은 한적한 도로변에서 차에 치여 숨진 채 발견되었다.

필자가 몸담았던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 조사 결과 김용갑은 총학생회장 선거운동 시기부터 동우대가 고용한 폭력 학생들에게 수시로 폭행과 협박을 받았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난 2002년 의문사위 조사에서 1990년 당시 폭력 학생들이었던 임아무개, 강아무개, 조아무개 등은 그때 김용갑 등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대가로 동우대 학생과에서 장학금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당시 동우대 학생과에서는 근로장학금 대상자 2백 명 중 20여 명분을 빼내어 폭력학생들에게 지급한 것으로 의문사위 조사 결과 밝혀졌다. 학생과 직원 진아무개는 임아무개 폭력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고, 그 외에도 자주 술을 사 준 사실이 있다는 것도 밝혀졌다.

당시 폭력 학생들과 지역 선후배 사이인 진아무개와 김아무개를 동우대는 학생과 직원으로 채용했다. 그리고 폭력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지급이 매년 관례적으로 있었다. 또한 속초 시내 폭력 조직의 두목 박아무개가 1991년에 동우대에 불분명한 사유로 입학했던 것도 밝혀졌다. 그래서 의문사위는 당시 동우대 재단과 학장의 적극적인 지시와 비호 아래 학생과가 직접 폭력 학생들을 사주해 김용갑 등 학생들에 대한 폭력과 협박을 행사하도록 했다고 판단했다.

김용갑은 의문사 전날인 1990년 3월 27일 밤 11시 20분경 친구와 헤어진 후 대학 동기 송아무개 집에 들러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밤 12시경 누군가를 만난다며 송아무개 집에서 나왔다. 그 후 김용갑은 학교 근처에서 친구 두 명과 술을 마시고 있던 동아리 연합회 부회장을 만나 학생회 일을 도와달라는 얘기를 하고 나서, 이름을 알 수 없는 남자 두 명과 함께 사고 현장 쪽으로 걸어갔다. 김용갑은 3월 28일 새벽 2시경 속초시 노학동 소재 도로공사연수원 앞길에서 문아무개가 운전하는 승용차에 치어 즉사했다.

김용갑이 사망한 후 동우대 학생주임 강아무개는 당시 학내 폭력사건이 많이 발생해 속초경찰서 정보과 학원반장 이아무개에게 수사를 의뢰했지만 어떠한 조치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의문사위 조사결과 당시 정보과 학원반장 이아무개는, 동우대 학생주임 강아무개의 주장과는 반대로, 그때 동우대로부터 학내 폭력에 대한 수사 의뢰를 받은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당시 동우대생 김아무개는 1990년 3월 28일 새벽 0시 20분경 이름을 모르는 학생과 직원들이 김용갑의 자취집 근처에서 김용갑을 찾아다녔다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그러나 당시 동우대 학생과 직원들은 김용갑을 찾아간 일이 없다고 의문사위에서 주장했다. 또 동우대 측은 의문사위 조사에서 당시 김용갑의 교통사고와 관련없다고 주장했다.

 

김용갑 ⓒ 의문사위 자료

 

가해자는 왜 지름길로 안 갔을까

한편, 김용갑을 차에 치여 죽인 문아무개는 감옥에서 2심 집행유예로 나온 후 1990년대 중반 건설현장에서 추락사했다. 그래서 지난 2002년 의문사위는 문아무개와 관련 정확한 사고경위를 조사할 수 없었다.

고상만은 1990년 3월 28일 김용갑 사고 당일이 총학생회 발대식 예정일이었으며, 당시 김용갑이 동우대 직원과 폭력 학생들에게 일상적으로 협박당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들어 김용갑의 사망에 동우대 직원이 개입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문사위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김용갑의 의문사 다음 해인 1991년 고상만은 속초경찰서 대용 감방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때 고상만은 "깡패들이 '김용갑의 죽음은 학생과 직원이 사주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감방에서 들었다"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의문사위는 이러한 고상만의 진술에 대해서 확인하지 못했다.

1993년 8월과 9월 고상만은 또한 동우대 직원 김아무개가 자신에게 "내 말만 들었으면 김용갑은 죽지 않았다. 너희들도 내가 아니었으면 다 죽었을 것이다"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김아무개는 자신이 김용갑과 사망 전날인 1990년 3월 27일 만나기로 했는데 김용갑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던 일이 있었고, 나중에 이와 관련해 그 때 김용갑이 자신과 만났더라면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는 취지로 이야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너희들도 내가 아니었다면 다 죽었을 것이다"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김용갑의 유족은 당시 사고 정황과 김용갑의 사망에 동우대 측이 개입되었다며 경찰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경찰은 유족의 의문점을 해명하지 못했고, 동우대 측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도 하지 않았다.

'김용갑 학생회장 사인 진상규명 대책위원회'에서는 김용갑이 사망하기 전 마지막 2시간 35분의 행적이 분명하지 않고, 김용갑을 차로 사망하게 한 문아무개가 지름길로 가지 않고 운전하다가 사고가 난 경위가 의심스러우며, 경찰의 수사상황 보고서에 기재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문아무개가 지름길을 포기하고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발생한 것에 대해서는 당시 피의자 검거를 담당했던 최아무개도 의심되는 게 사실이라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그러나 문아무개가 어떤 이유로 지름길을 포기하고 운전했는지에 대해서는, 지난 1990년대 중반 문아무개가 이미 사망해 의문사위는 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당시 경찰의 수사상황 보고서에는 문아무개가 김용갑을 발견하고 브레이크를 밟았으며, 사고현장에 브레이크 자국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사고 당일 비가 왔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의문사가 속초기상대에 확인한 결과 사고 당시엔 비가 오지 않았으며, 브레이크 자국이 없는 것은 당시 김용갑을 차로 사망하게 한 문아무개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또한 당시 경찰 수사상황 보고서에는 사건 직후 동료 학생이 김용갑이 사망하기 전 만난 송아무개를 찾아간 것으로 기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의문사위 조사결과 송아무개를 찾아간 것은 동료학생이 아니라 동우대 직원인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김용갑을 차로 친 후 문아무개는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서인지 "(사고 후) 자동차 앞 유리를 혼자서 갈아 끼웠다"고 경찰 조사에서 주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동차정비사 박아무개는 "기술자라도 장비 없이 혼자서 자동차 앞 유리를 갈아 끼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결국 의문사위는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 누군가가 문아무개가 운전했던 사고 차량의 앞 유리 교체작업을 도와준 것으로 추정했다.

김용갑 사건의 조사 결과 의문사위는 동우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폭력 학생들로 하여금 김용갑 등 학생들에게 학내 비리와 부실한 교육여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폭력을 행사하고 협박을 가하도록 했으며, 그 대가로 폭력 학생들에게 장학금 등을 지급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또한 의문사위는 김용갑 의문사 당일이 동우대 측이 골치 아파하는 총학생회 발대식 예정일이었다는 점에서 김용갑 사망의 원인이 된 교통사고에 동우대 측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김용갑의 사망에 동우대 측이 개입했는지는 증거 부족으로 의문사위가 명백히 밝힐 수 없었다. 의문사위는 또 김용갑 사망 당일 김용갑이 이름을 알 수 없는 남자 두 명과 차량사고 현장쪽으로 향했다는 것까지 확인했다. 그러나 김용갑과 동행한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의문사위는 지난 2004년 김용갑 의문사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불능'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타살을 강력히 의심한다"

한편 1990년 3월 28일 김용갑의 충격적인 죽음 후 고상만은 "형의 죽음을 잊지 않겠다. 형이 이루고자 했던 희망의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살아가겠다. 앞으로 '정의와 인권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열심히 살 것"이라고 다짐하며 인권운동가로서의 첫 발을 떼어냈다.

고상만은 현재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4일 고상만 국장에게 "지금도 김용갑이 타살되었다고 믿는가?" 라고 물어봤다. 이에 대해 고상만은 이렇게 답변했다.

"김용갑이 사망했을 때 사고사라 여기기에는 믿을 수 없는 정황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수사기관은 이를 해결하지 않고 그냥 묻으려고만 했다. 사망 전 일곱 차례나 김용갑을 납치, 감금, 테러, 가혹행위, 정신적 고통을 준 동우대 재단 측의 행위가 있었고 그 끝에서 김용갑이 사망했다는 점에서 나는 타살이 아닌가 강력히 의심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사고 당시 새벽 2시에 김용갑이 왜 집이 아니라 고통 속에 칼을 품고 거리를 헤매다가 숨져갔느냐는 점에서 이는 김용갑을 죽음으로 내몬 타살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89학번인 김용갑은 1970년생인 동기생들보다 서너 살 많은 1966년생이었다. 그는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하지만 주경야독으로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그 후 김용갑은 이른바 명문대에 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서 학업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수석입학 장학금을 받아 동우대에 들어왔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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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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