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같은 게 뭘 알겠어요" 이랬던 여자가

[한국 소설이 건네는 이야기 16]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

등록 2016.03.15 16:20수정 2016.03.15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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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니까 책 속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답이 나와 있다는 것이죠.

맞는 말 같습니다. 저도 어떤 책을 읽으면 '아,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간의 제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마음을 다잡기도 합니다. 마음을 다잡았다 해서 금세 나아지진 않지만요. 그래서 자꾸 책을 읽는 걸 거에요. 계속 다잡기라도 하려고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저는 책 속에서 삶에 대한 답을 찾는다기 보단, 나를 찾는 것 같단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습니다. 삶에 대해 예민해지는 만큼, 나에 대해 예민해지고, 삶을 알아가는 만큼, 나를 알아가고.

전 독서의 가장 큰 매력이 바로 이거라고 생각해요. 수십 년을 함께 했던 '나'이지만 우리는 '나'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책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는 거죠. 그간 오해했던 '나'라는 인물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면 당신은 책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겁니다.

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방법을 통해서든 어찌 됐건 나를 알아가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의 나의 위치를 이해할 수 있고, 이래야 객관적으로 나를 볼 수 있는 힘이 생기니까요.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홀로 설 수 있게 될 겁니다.

마음을 치유하는 독서치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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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 문학동네

김경욱 소설집 <위험한 독서>에서 표제작 '위험한 독서'의 독서치료사가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홀로 설 수 없는 사람을 홀로 설 수 있게 하는 것. 책을 통해서 말이지요.


'독서를 통해 당신이 발견해야 하는 것은 교묘하게 감추어진 저자의 개인사나 메시지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니까.' - <위험한 독서> 중에서

책에서 화자인 '나'는 독서치료사입니다. 독서치료사란 "책으로 마음의 병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듯 독서치료사는 피상담자를 진단합니다. 환자를 진단한 의사는 처방을 하고, 피상담자를 진단한 독서치료사는 책을 추천하는 것이죠.

그런데 책은 정말 마음의 병을 치유해줄까요. 고대 그리스 테베의 도서관 입구에는 '영혼을 치유하는 곳'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해요. 그 옛날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책의 보장된 효능이 '치유'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책은 우리의 마음을, 영혼을 치유해 줄까요. 책을 통해 우리 자신을 마주 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치유는 가능합니다.

독서치료사 '나'는 그간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왔습니다. 그중 한 명은 열다섯 살 연쇄방화범이었어요. 고급 외제차 일곱 대를 불태워 그 죗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던 소년은 세상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소년의 마음을 열게 한 건 한 권의 책,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였습니다.

'고색창연한 절에 불을 지른 방화범의 내면을 탐미적 언어로 그려낸 소설을 읽고 소년은 봇물 터진 듯 자신의 감정을 쏟아냈다. 기괴한 형식의 죽음을 선택했던 이방의 작가가 쓴 소설에서 소년이 발견한 것은 단 한 번도 타인에게 드러내 보인 적 없는, 스스로도 부정하기에 바빴던 자기 자신이었다.' - <위험한 독서> 중에서

'나'는 피상담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에 맞춰 책을 권해줍니다. 임신중절 수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원조 교제를 시작한 소녀에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짝사랑에 빠져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이에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라 여기는 염세적이고 조숙한 소녀에겐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추천하는 식이죠.

가엾은 여인, 독서로 변하다

독서치료사의 이번 피상담자는 한 여자입니다. 첫 만남 때 여자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어요. "선생님 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밥벌레에요." 여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할 줄도 몰랐구요. 책에 대한 감상을 물으면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같은 게 뭘 알겠어요."

독서치료사의 치료가 시작됐습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여자에겐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있었더라구요. 가엾고, 측은한 여자였습니다. '나'는 그런 여자에게 책을 추천합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그의 또 다른 책 <사양>을. 책을 읽으며 여자는 서서히 변해가죠. 그런데 여자의 변화는 남자에겐 위험한 일이 되고 맙니다. 그 이유는, 직접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사실 책을 읽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앞서 말했듯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 읽을 수도 있고, 나를 찾기 위해 읽을 수도 있죠. 재미로 읽을 수도 있고, 정보와 지식을 얻기 위해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인격 수양을 위해 읽을 수도 있구요. 요즘에는 성공하고 싶어 책을 읽기도 하더라구요.

저는 재미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걸 재미있어했어요. 그렇다고 책벌레처럼 다른 건 다 작파하고 책만 읽는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재미있는 걸 하고 싶다, 할 때 책을 읽었을 뿐입니다. 재미있으니 계속 읽었고, 그러다 보니 습관이 됐습니다. 기억하는 한 제 가방에는 언제나 책이 있었습니다. 외출할 때 가방에 책이 없으면 전 불안하더라구요. 읽고 싶을 때 읽지 못하는 것만큼 실망스러운 건 없을 거에요.

요즘 사람들은 책을 많이 안 읽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문제의식을 느껴 책에 관심을 가지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책과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독서에도 의지가 필요하지만, 의지만으론 또 되지 않는 게 독서잖아요.

독서에 요구되는 집중력은 인터넷 등으로 인해 저하된 상태고, 혼자 있는 시간은 어색하기만 하고, 무엇보다 짧은 글에만 익숙해진 두뇌 패턴을 바꾸기가 쉽지 않겠죠. 이럴 때 가장 좋은 독서법은, 재미있는 책을 읽는 게 아닐까 합니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쑥 빨려 들어가는 그런 책 말이에요.

이런 책이 뭔지 잘 모르겠다구요? 그럴 땐 괜히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있는 책을 읽으려 하지 말고, 주위에 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 '정말 재미있는 책' 한 권 추천해달라고요. 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책 한 권쯤은 알고 있을 겁니다.
덧붙이는 글 <위험한 독서>(김경욱/문학동네/2008년 09월 25일/1만2천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문학동네, 2008


#김경욱 #소설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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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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