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뚫고 모범택시 타고 달려갔더니...

[공모- 건망증 때문에 겪은 일] 건망증에 관한 짧은 필름

등록 2014.05.03 10:54수정 2014.05.03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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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전반에 걸친 안전 불감증과 재난에 대한 집단 망각증이 가져온 '세월호' 참사를 보면 내 건망증은 애교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집단 망각증이건 가벼운 건망증이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은 서글프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나의 건망증에 관한 일화와 요즘도 가끔씩 저지르는 실수를 소개한다.


[1화] 폭우 속에 모범택시 타고 달려가보니

1998년, 엘리뇨 현상으로 그해 장마는 유난스러웠다. 서울 덕릉고개 가로수가 넘어져 차량이 통제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당시 난 상계 백병원 근처에 과외를 하고 있었다. 내가 과외를 하던 상계 주공 1단지 근처 미도 아파트는 당고개에서 멀진 않았지만 교통이 불편했다. 2단지 앞에서 버스를 내려 걷는 거리가 꽤 되는데 차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웬 장맛비가 그칠 줄을 모르네."

그렇게 투덜거리며 집을 나서 비에 흠뻑 젖은 채 학생 집에 도착했다. 빗물을 털어내고 학생과 마주앉았는데 장맛비에 젖은 내가 서늘해 보였던지 그날따라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왔다. 그 차를 보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다.

'아, 나도 찻물을 올려 놨는데...'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가스 불을 끈 기억이 없었다. 찻물을 올려놓고 다른 일을 보다 그냥 나온 것 같은 생각이 들자 등골이 서늘해지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이일을 어찌할꼬. 다시 당시 상황을 아무리 차분하게 기억하려 해도 찻물을 올려놓은 이후 상황은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사골 국물을 낸답시고, 혹은 감자를 삼는다며 가스 불에 올려두곤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냄비를 새까맣게 태워 먹은 이력이 있어서 더욱 조바심이 났다.

"저....  죄송한데요,  급히 집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아니, 금세 오셨는데... 집에 무슨 일이 있으세요?"
"그게... 제가 찻물을 올려놓고... 아무래도 가스 불을 끄지 않은 것 같아요."
"아유,  그럼 큰일이지요. 집에 아무도 안 계신가요?  얼른 가보세요.  오늘 수업은 다음에 보충해 주시고요."

난 장대비 속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애간장이 다 녹는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다. 장마철이라 택시는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다급해진 나는 닥치는 대로 손짓을 해대다가 겨우 모범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기사가 틀어 놓은 뉴스에서는 어디에 산사태가 났느니, 어디는 가로수가 쓰러졌다느니 홍수 피해에 대한 뉴스가 속보로 나오고 있었다. 덕릉고개 쪽에 가로수가 쓰러져 잠시 교통을 통제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렸다. 덕릉고개는 우리 동네 근처다. 차가 가지 못할까봐 나는 더 조바심이 났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불길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갖 장면들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택시가 굼벵이처럼 느껴졌다. 기사 분께 최대한 빨리 달려 주시라고 부탁을 했지만 장대비 라 기사는 그저 건성으로 대답하고 느긋하게 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조바심을 쳐봤자 차 안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애간장만 탔다.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과 더 많은 요금을 물고 내려서 급하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행히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후다닥 가스 레인지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언제 가스 불을 껐는지 가스 불은 얌전히 꺼져 있었다. 웬일인지 그날따라 중간 밸브까지 얌전하게 잠겨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2화] "사장님, 착신전환 안 해놨는데요"

장애인복지신문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지 이제 일 년이 넘었다. 사장님은 꼼꼼하고 매사에 완벽을 기하는 분인 반면, 실수가 잦은 나는 가끔 곤란한 상황을 연출한다. 모든 일이 낯설었지만 제일 익숙하지 않은 일이 퇴근 시 착신전환을 해 놓는 일이다. 이상하게 착신 전환을 잘 잊어 버려서 지하철역을 향해 가다가 다시 되돌아가 착신전환을 한 적이 몇 번 있을 정도다.

지하철을 타고 한참 오다가 갑자기 사무실 전화의 착신전환을 안 해 놓고 퇴근했다는 게 떠오를 때가 있다. 되돌아갈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나는 야단 맞는 아이가 된 기분으로 사장님께 문자를 넣는다.

"사장님, 착신전환 안 해놨는데요. 죄송합니다. ㅠ. ㅠ"

사장님에게서 문자로 답이 온다.

"내가 있을 때는 괜찮지만 아무도 없을 때는 어쩌렵니까? 어려운 일도 아닌데 ......"

'사장님, 그게 어려운 일이어서가 아니고요. 그 착신 전환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자꾸 잊어버린다니까요' 목까지 올라오는 말을 꾹 눌러 삼킨다. 어쨌거나 내 실수가 아닌가.

내가 착신 전환을 잊고 나올 때마다 나의 건망증을 탓하며 페이스북에 실수담을 올렸더니 사람들이 위로와 함께 이런저런 해법을 알려준다. 그 중 한 가지는 전화기에 잘 보이게  '착신전환'이라고 붙여 놓으라는 것이다. 그럼 눈앞에 보이니 잊어 버릴 수 없을 거라면서.

하지만 나는 아직은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아무렴 '내 나이가 그렇게까지 할 나이는 아니잖은가' 싶어서다. 난 착신전환을 곧잘 잊어 버리는 것이 '건망증'이라기보다 착신전환 자체가 생소하기 때문이라고 애써 자위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건망증 때문에 겪은 일 응모글
#건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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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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