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 다니면 사람의 '격'도 다르다?

[서평]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읽고... 차별의 근거, 정말로 타당한 걸까?

등록 2013.12.30 15:20수정 2013.12.3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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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찬호 지음, 개마고원) ⓒ 개마고원

몇 달 전 만취한 상태로 지하철 안에서 소변을 보는 대학생의 사진이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진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응에서는 그 학생이 서울 소재 명문대 로고가 새겨진 점퍼를 입고 있었다는 점이 유난히 강조됐다. 누가 저질렀든지 간에 그 자체로 상식에 어긋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문대생'의 소행임을 특히 문제로 삼는 반응에서 나는 희미하게나마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을 보았다. 명문대생을 모범적인 품행과 연결 짓는 고정관념을.

명문대생을 모범적인 품행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이 물론 잘못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러한 생각이 오히려 상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고정관념이 '차별'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능점수 '차이'='차별'의 정당한 근거?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개마고원)는 '수능점수'의 차이를 개인의 '모든 역량'의 차이로 확대 시켜 자신보다 점수가 낮은 동년배를 차별하는 근거로 삼는 오늘날의 이십대에 주목한다.

책에 따르면, 이십대는 개인을 수능점수로 평가하는 획일적인 시각에 사로잡혀, 자신보다 서열이 낮은 대학의 학생은 (수능점수와 무관한) 도덕성, 인성 등의 자질마저도 자신보다 부족할 거라고 믿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 결과 이들은 수능점수라는 잣대로 점수가 낮은 동년배를 차별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점수가 높은 동년배에게 차별 받는 피해자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차별을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시스템에 참여함으로써 미래를 척박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십대는 왜 차별에 찬성하게 되었을까? 이 책은 청년 백수가 넘쳐나는 오늘날 이십대의 불안을 치유해 주겠다는 듯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힐링 담론'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 저, 쌤앤파커스)로 대표되는 자기계발서는 "젊을 때는 다 그런 거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다"라는 메시지를 전파한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실패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개인의 책임"이다. 이러한 자기계발의 논리는 수능점수로 사람을 평가하는 이십대의 좁은 시야를 옳은 것으로 확신 시켜 주고, 대학 서열에 따른 차별을 타당한 것으로 둔갑 시킨다. 그리고 정작 이십대를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는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는 논의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한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이 오늘날의 이십대에게만 해당되는 걸까? 수능점수로 타인을 재단하는 습관은 과거의 나 자신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 책에 묘사된 이십대의 모습은 바로 과거의 내 모습이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걸친 12년의 교육이 오로지 '대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던 교육 환경에서,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건 '인생의 성공'이었다. 당연히 동년배가 어느 대학에 다니는가에 따라 보는 시선을 달리했고, 그것이 아주 왜곡된 시선이라는 걸 인정하게 된 것은 사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편견이 깨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입시지옥에서 고착된 사고의 틀을 깨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진짜 공부는 학교에서 주입받은 지식을 '성적'이라는 결과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경험과 독서로 사고의 폭을 넓히는 능동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했다. 높은 수능점수를 받고 일류대를 졸업했지만 생각의 수준은 고등학생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을 숱하게 만나면서, 대학간판이나 전공지식과 거의 무관한 평생의 공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 책은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어린이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인종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사회변혁 운동이 기존 사회의 문제를 직시한 개인들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이에 비추어 현 문제 역시 지금의 상황이 옳다는 착각을 깨뜨려야 해결을 위한 노력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기회의 균등함, 과정의 공정성, 결과의 정의로움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저 주어진 결과를 받아들이고 부당한 차별은 문제 삼지 말라고 하는 '자기계발 권하는 사회'를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는 또 하나의 시선 

차별을 철폐하려면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시야를 넓혀 위의 논의를 확장해 보면, 인간이 비인간 동물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유사한 차별을 발견할 수 있다.

에리카 퍼지는 <'동물'에 반대한다>(노태복 옮김, 사이언스 북스)의 제3장 '지능과 본능: 능력에 관한 문제'에서 동물 지능 연구의 한계를 지적한다. 동물에 대한 연구가 동물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연구하기보다는 문명화된 인간을 동물과 분리시키려고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인간의 우월성을 입증하고 동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는 성향을 띤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비둘기의 귀소본능을 언급하면서, 동물에 대한 평가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에 갇혀 있음을 지적한다. 지도나 위성 항법 장치 등 외부 장치에 의존해야 하는 인간과 달리 비둘기는 먼 곳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비둘기의 귀소본능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인간에게 없는 놀라운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정한 '지능'의 범주를 적용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비둘기의 능력을 단순한 본능으로 치부해 버린다. 인간은 길을 잃을지의 여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지만, 비둘기는 "집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또한 마약 탐지에 개가 활용되는 경우를 들면서, 인간은 다른 동물의 능력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자연적인 능력으로 간주해 버린다고 말한다. 만약 냄새를 찾는 능력이나 귀소본능도 지능에 포함되도록 지능의 개념을 확장한다면 인간이 더 이상 지능이 가장 높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지능의 개념을 확장하지 않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헨리 베스턴은 <가장 멀리 있는 집(The Outermost House)>(Owl Books (NY))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동물에 대해 지금과는 다른, 보다 현명하고 신비로운 개념을 세워야 한다. 보편적인 자연법칙에서 멀어진 채 복잡한 술수를 부리며 살아가는 문명인은 '한정된 지식'이라는 안경으로 다른 생명체를 지나치게 왜곡시켜 바라본다. 인간은 동물이 불완전하고 열등하다고 믿지만, 이것은 실수, 그것도 아주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동물은 인간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 우리보다 훨씬 오래되고 완벽한 세상에서, 우리는 오래 전에 잃어버렸거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각을 느끼고, 우리에게는 결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완벽하게 움직인다. 동물은 인간의 형제도, 종도 아니다. 우리와 함께 생명과 시간의 그물에 갇힌 또 하나의 종족이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지구의 장려함과 고통을 나누는 수감자이다.

수능점수를 근거로 한 동년배에 대한 차별과 인간의 잣대를 근거로 한 동물에 대한 차별은 서로 닮았다. 대상만 달리할 뿐,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는 왜곡된 시선은 다르지 않다. 인간이 무수한 동물들을 획일적인 기준에 따라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현 상황을 당장 바꿀 수야 없겠지만, 그런 시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해결의 노력도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오찬호 지음,
개마고원, 2013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인간차별 #동물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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