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통일은 남은 생애 이뤄야 할 영광된 소명"

[인터뷰] 철원 국경선 평화학교 운영하는 정지석 박사

등록 2013.12.03 17:18수정 2013.12.03 19:57
0
원고료로 응원
a

소이산에서 바라보는 비무장 지대. 멀리 거뭇한 DMZ를 지나 산너머에 북한의 평강시가 있다. ⓒ 최삼경


평화와 통일. 소중하고 귀한 말이지만 최근에는 현실감도, 가능성도 희박해진 개념들이 됐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평화는 인류와 생명붙이들의 기본전제이자 최상위 목표인 것이고, 통일은 지리적 단절의 연결과 상상력의 자유를 획득하는 절대 절명의 물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결하고도 막중한 순기능의 말들이 어찌하여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걸까. 몇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평화와 통일은 필요하지도 않고 현실에서 가능하지도 않다는 시각이 일반화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종종 현재 보이는 것들이나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하게 된다. 사실 지금의 이 분단 상황은 긴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잠깐의 일탈상황인데도 이미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둘러싼 열강들의 이해와 힘의 논리를 걷어내고 오롯한 민족과 국민의 눈으로 통일에 대한 성찰을 해야 할 때가 오지 않았을까? 분단으로 야기된 폭력과 반목을 다독여 줄 평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야 될 때가 오지 않았을까?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소명을 느끼고 나이 오십을 넘긴 인생 후반부에 집도 절도 없는 고립무원의 철원으로 온 사람이 있다.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준비하고 앞당기는 전문가들을 양성하자는 생각으로 '국경선 평화 학교'를 설립한 정지석 박사이다.

a

국경선 평화학교의 로고로 피스메이커들의 양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 최삼경


광야에서 울려 퍼지는 선지자 목소리는 얼마나 고고한 것인가. 정 박사를 만나기 위한 12월의 철원행은 희끗희끗한 눈발로 위험스러웠지만, 평화와 통일, 성찰과 수행을 얘기하고 실천하려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은 행복하였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정 박사는 사무실 식구들과 함께 노동당사 옆에 위치한 소이산 산책을 건의한다. 해발 362미터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철원이 왜 평야인지를 보여 줄만큼 전망이 좋다. 넓게 펼쳐진 들판 위로 횡으로 지나는 도랑 같은 DMZ를 지나 산을 넘으면 바로 평강시라고 한다. 채 20km가 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양쪽에는 흰 눈이 쌓여있는데 비무장지대인 만큼은 눈이 다 녹은 채 검은 빛을 띤다. '아무래도 DMZ가 양쪽의 젊은이들이 부딪치는 곳이라 에너지가 쎄서 그런 것이 아니겠냐'는 농으로 대담이 시작됐다.

'왜 하필 철원이냐?'는 질문에 '응답을 받았다'는 답이 바로 돌아온다. 3년 전 미국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고민에 다가온 내적인 목소리였다고 한다. 서울의 새길 교회에서 편안한 목회 생활을 하다가 오십이 되던 해 인생 후반부를 어떻게 경영해 가야할지 스스로에게 물어봤다고 한다.

의지대로 살기보다는 조건에 따랐던 삶이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금까지의 삶이 그다지 잘못 되지는 않았으나,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이 있을 법했다. 그래서 만류하는 지인과 교인들을 물리치고 미국 펜들 힐이라는 곳에서 1년여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펜들 힐이라는 곳은 퀘이커교도들의 영성학교가 있는 곳으로 수도원 기능과 재충전 센타, 학교 기능이 복합적으로 운영되는 곳으로 아침, 저녁으로 묵언수행과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역대 이곳을 거친 성직자들 사진이 복도에 걸려있는데 동양인으로는 두루마기 차림의 함석헌 선생 사진이 걸려있어 뿌듯했다고 한다.


a

국경선 평화학교 설립자인 정지석 박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최삼경


아무튼, 이곳에서 한반도의 분단과 갈등을 치유하고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위해 '올인' 하는 삶을 살라는 결심이 게시처럼 왔다고 한다. 몇 번의 두려움과 망설임도 있었지만 2011년 9월 3일, 귀국하자마자 무작정 철원에 짐을 풀었다고 한다.

그는 미국에서 떠나기 전에 AFSC(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퀘이커 교도 평화운동 조직)과 지미 카터 센타와도 평화 디렉터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와 관련하여 어떤 큰 그림을 그렸는지도 알게 됐다고 한다.


한국에 가게 되면 민족간 이념 간 갈등 해결에 필요한 노하우 제공과 함께 세계적인 석학들로 이루어진 전문가 교육도 연계 할 것도 합의를 보았고, 국제 평화회의 같은 것을 개최하여 한반도 평화에 관한 세계인들의 인식전환에 공동 노력한다는 몇 가지 기준도 관철했다고 한다.

그것은 한반도의 분단 종식과 평화체제 구축이 그만큼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미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마라톤에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는 선수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우승보다는 유력한 우승후보자의 초반 페이스를 조절하여 좋은 기록을 내게 한다. 프로골퍼들에게 캐디가 중요하듯 마라토너에게 이들 페이스 메이커는 무척 소중한 존재이다.

정 박사는 남과 북의 평화와 통일은 우리에게 경험도 없고, 갈등과 분쟁을 조정하는 노하우가 필요한 일이니 만큼 누군가 준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경선 평화학교(Border Peace School)'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양성된 '피스 메이커' 전문가들은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하게 된다고 한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독립군 학교가 만들어졌고, 분단 상황에서 사관학교가 생겼다면, 이제는 당연히 남북한 평화학교가 있어야 한다는 당위가 있다는 것이다.

a

국경선 평화학교 전경 아직 건물이 없지만 강원도 평화광장을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 최삼경


정 박사는 자신을 찾아오는 언론이나 손님이 있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일단 소이산을 함께 오르는 것으로 관계를 시작한다고 했다. 소이산 정상은 고려시대 때부터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수대가 있을 만큼 조망이 좋다. 6·25 전쟁 때는 미군에서 지하 벙커를 파서 지휘 본부로 활용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망대 밑으로는 동굴로 이어진 방카와 막사가 오랜 상처를 보듬은 채 고요하였다.

정 박사는 이곳을 한국의 여러 교단들이 공동 수행처로 만들어 평화와 성찰의 요람으로 가꾸어가자는 꿈도 키우고 있다고 한다. 국경을 둘러싼 갈등도 문제이지만, 지나치게 배타적인 각 종교간 평화를 이루어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60년 넘는 오랜 세월동안 쌍방에서 총칼을 겨눈 곳에서 이러한 쇠붙이를 녹여 각자의 가슴 속에 내적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일은 또한 철원이기에 더욱 뜻 깊은 일일 것이다.

a

소이산을 오르는 정지석 박사 매일 오후 3시면 정 박사는 사무실 식구들과 묵언으로 소이산을 올라 평화와 통일에 대한 기도와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 최삼경


지난 3월 1일 개강하여 이제 곧 종강을 앞둔 국경선 평화학교의 학생은 8명이다. 철원지역에서 2명을 비롯해 경향 각지에서 평화를 공부하기 위해 모인 학생들이다. 과정을 이수했다고 해서 학위도 없거니와 취업 등 생계를 위한 장치도 없는 데도 잘 버텨주어 고맙기도 하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기는 요즘이라고 한다.

퀘이커 교도와 함석헌 선생의 평화에 대한 천착으로 평화학 박사를 얻었지만, 정작 요사이 정국을 보면서 더욱 조바심이 인다고 한다. 이제 곧 느닷없이 통일이 닥칠 수도 있는데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사회 전체가 제로섬 게임에 빠진 것처럼 불통과 극한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한다. 지금 철원에는 그의 교과 커리큐럼에 동참하기 위하여 세계적인 평화 단체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이 드나들고 있다.

강원도가 주최하는 'DMZ국제평화생명포럼 2013'에 북아일랜드 평화대학원 학장인 맥매스터 박사 등도 그가 참가를 주선하였다.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철원에서 그는 말하자면, 비트나 게릴라 진지 같은 주변부 논리가 아닌 정정당당한 정규전을 선포한 것이다. "결국 통일은 이 모든 비평화를 타개할 기초인 것이고, 평화는 통일을 이루는 유일한 길이 돼야 할 것"이라는 말로 대화를 맺는 그의 얼굴은 소명을 받드는 이들만의 맑고 부드러운 미소가 서리고 있었다.
#국경선 평화학교 #정지석 #평화통일 #성찰 #수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100개 눈 은둔자' 표범장지뱀, 사는 곳에서 쫓겨난다
  2. 2 [단독] '김 여사 성형' 왜 삭제? 카자흐 언론사로부터 답이 왔다
  3. 3 카자흐스탄 언론 "김 여사 동안 외모 비결은 성형"
  4. 4 최재영 목사 "난 외국인 맞다, 하지만 권익위 답변은 궤변"
  5. 5 한국의 당뇨병 입원율이 높은 이유...다른 나라와 이게 달랐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