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를 보고 마음 편치 않았던 이유

[백두산, 고구려 유적 답사기③] 집안에서 본 고구려의 발자국

등록 2013.08.05 15:01수정 2013.08.05 15:03
1
원고료로 응원
a

'나홀로 테마여행'에서 5박 6일 일정으로 백두산, 고구려 유적 답사에 나선 일행들이 장수왕릉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 오문수


백두산, 고구려 유적 답사 3일째다. 호텔에서 자고 일어나 하늘을 보니 맑은 하늘이다. '이런 걸 보고 하늘도 무심하시지!'라고 해야 한다. 여행 둘째 날, 한국 사람이면 거의 모두가 갈망할 백두산 천지 구경을 세찬 비바람과 안개 때문에 망쳤다. 일행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어제도 오늘처럼 하늘이 맑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기가 중국인지 깜빡 잊게되는 곳

드디어 중요한 고구려유적을 볼 수 있는 '집안'으로 떠나는 날이다. 숙소인 '통화'를 떠난 일행은 높고 푸른 산 사이에 펼쳐진 비옥한 농토와 동네를 보며 집안(중국명 지안)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보이는 사람과 산, 가옥의 모습이 한국 시골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휴게소에 내려 화장실을 가지 않으면 이곳이 중국 땅이라는 걸 잊어버릴 정도다.

a

광개토대왕릉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중국측 산이 보인다. 한국의 산처럼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 오문수


a

광개토왕릉에서 바라본 북한의 만포시. 사진에 보이는 풀숲 뒤에는 압록강이 흐른다. 그러나 배고픈 북한 사람들이 8부능선까지 개간을 해 나무가 얼마 없다. 뒷편은 완전히 민둥산이라고 한다. 국경도시라 북한에서는 잘 사는 도시라고 한다. ⓒ 오문수


중국 지린성 남부에 있는 '집안'은 동서길이 80㎞, 남북너비 75㎞로 총면적 3217㎢이며 인구는 20만 명 정도인 소규모 도시다. 다민족 거주지로 한족이 86.4%를 차지하며 조선족·만족·회족·몽고족·시버족 등의 소수민족이 13.6%를 차지한다. 소수민족 중에서는 조선족이 가장 많다. 동남쪽으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하고, 북쪽으로는 바이산시·통화시·통화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집안은 신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했으며 고구려 문화의 발상지이자 고구려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고구려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광개토대왕비. 고구려 고분 약 1만2000기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약 6000기다.

고구려 천도, 국방·경제적 이유 때문


<삼국사기>에는 "유리왕 22년(서기 3년) 겨울 10월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국내성은 압록강 인근에 있는 통구분지의 서쪽에 있다. 북쪽에는 장백산맥의 한 갈래인 노령산맥의 줄기가 동북-서남 쪽으로 길게 뻗어 가파른 봉우리들이 높이 솟아있어 마치 북에서 오는 적을 막는 기다란 성곽같이 생겼다.

a

광개토왕릉을 답사하는 일행들. 기단의 한 변이 60m, 높이가 30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 오문수


a

광개토대왕릉 기단의 각변에는 5개의 입석이 기대어 서있다. 너비 1.75m, 높이 6m에 달한다. 거석숭배문화의 일종으로 추정된다. ⓒ 오문수


성 동쪽 6㎞ 지점에는 용산, 북쪽 1㎞ 지점에는 우산, 그리고 서쪽 1.5㎞ 지점에는 칠성산이 있어 뒷면과 좌우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쪽에는 압록강이 흘러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천연요새다. 또한 양지바른 기후조건이 생업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국내성은 관동 3보라 불리는 인삼·돈피·녹용의 산지이며 과일·야채·약초가 풍부하다.

한국에서 가장 큰 광개토대왕릉비

말로만 듣고 책으로만 보았던 광개토대왕릉비가 보인다. 관광객들은 한국인들이 대부분이지만 중국인들도 섞여있다. 1982년 훼손을 우려한 중국 당국이 세운 2층 비각은 커다란 유리로 된 전시실을 두어 관리하며 사진 촬영은 밖에서만 허용되고 있다. 

비석은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414년)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각력응회암으로 된 비석은 높이 6.39m로 윗면과 아랫면이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시호를 줄여 '호태왕'이라고 부르는 비석에는 1802자가 수록돼 있지만 탁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질러 비면의 일부가 탈락됐고,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키는 바람에 144자가 탈락됐다.

a

2층으로 지어진 비각 안에 광개토대왕비가 서있다. 훼손을 우려해 중국 당국이 비각을 설치했다 ⓒ 오문수


비문의 내용은 대체로 3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내용은 크게 ▲ 고구려의 건국 내력 ▲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기록 ▲ 광개토대왕 생시에 이뤄졌던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 연호의 수와 차출 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의 3부분으로 나뉜다.

광개토대왕비문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한국과 일본 사학계에 커다란 쟁점을 일으킨 것은 소위 '임나일본부설'이다. "신묘년 '왜(倭)'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문맥을 인용해 일본 사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화 하려 했다. 그러나 정인보는 '고구려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전혀 상반된 견해를 제시했다.

광개토대왕릉은 적석총으로 무너져 내려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다. 지금은 거대한 돌무지와 유사한 상태지만 기단의 한 변이 60m, 높이가 30m쯤 되는 큰 규모를 자랑한다. 기단의 각변에는 5개의 입석을 세웠는데 입석의 너비는 약 1.75m, 높이는 약 6m에 달한다.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린 장수왕릉

고구려 제20대 왕인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맏아들로 한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광개토대왕 비석에서 500m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고구려 장수왕의 무덤이 있다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지만, 아직 분명한 것은 아니다. 427년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기 때문이다.

장군총은 잘 다음어진 화강암석재로 7단의 방단을 계단형으로 쌓았고 높이는 12.4m, 제1방단의 한 변은 약 31.58m, 제일 위의 제7방단의 한 변은 약 15m이다. 제1방단의 각 변에는 각기 3개의 긴 자연석이 있고 그중 가장 큰 것은 너비 2.7m, 길이 4.5m로 기대어 세워져 있다. 커다란 자연석이 장군총에 기대어 세워진 것은 거석숭배 문화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금방이라도 살아 숨쉴 것 같은 고구려고분 벽화 

a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조각가이기도 한 엄길수씨가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가르치기도 하는 엄씨는 습도와 습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이 망가지는 것을 바라볼 수가 없다며 우리정부와 중국 정부에 각별한 관심을 촉구했다 ⓒ 오문수


집안역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비슷한 크기의 고분 다섯 기가 밀집해 있다. '오회분'이란 이름은 5기의 거대한 봉분이 마치 투구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6세기 중반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에는 청룡·주작·백호·현무의 <사신도>와 함께 풍부한 설화적 내용이 담겨있는 <신선도>가 있다. 천장에는 황제를 상징하며, 용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황룡이 금방이라도 살아 숨쉴 것 같다.  그러나 천장에서 계속 물이 떨어지고 습기가 차 머지않아 훼손될 것으로 보여 시급한 보호 대책이 필요하다.

심각한 동북공정... 올바른 역사교육 절실해

'집안'에서 압록강 건너편을 바라보면 북한의 '만포'가 지척에 있다. 한 마디로 한강을 기점으로 양쪽을 구분하는 서울의 강남과 같다. 안타까운 건 북한쪽 산은 8부 능선까지 개간을 해 헐벗은 모습이다. 여름철이라 그나마 좀 괜찮지만 겨울철이면 황량할 것 같다. 반면, 중국쪽 산은 한국산처럼 울창하게 우거져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다. 해주까지 방문한 적이 있다는 가이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만포쪽 뒷산은 민둥산이란다.

중국은 1980년대 초반부터 고구려를 중국의 한 변방부족국가로 여기고 있다. 국책기관인 중국사회과학원 산하의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는 '고구려는 중국 변방의 민족정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은 한나라·당나라·송나라·명나라의 한(漢)족 국가가 1000년 남짓 중원을 지배했을 뿐, 나머지 기간 동안 몽골족인 원나라, 만주족인 청나라·요나라·금나라의 다양한 이민족이 지배한 나라인데 오랑캐가 중원을 지배할 수 없다는 '화이사상(華夷思想)'을 주장하고 있다.

a

문화해설사로 왕릉을 해설하는 진정임씨의 진지한 연구 모습. 누구보다 더 열심히 뛰며 고구려 문화재 사진을 찍고 연구하는 모습이 감명깊었다. 이런 분들이 있어 우리의 문화재가 다시 탄생한다. 장수왕릉의 배총이다. 자세히 보면 처마부분에 홈을 파서 빗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한 우리 조상의 슬기를 엿볼 수 있다. ⓒ 오문수


얼마 전 논란이 됐던 한국전쟁 '북침, 남침' 논란 소식을 듣고 다음날 중학교 2학년 교실에 들어가 "한국전쟁이 북침인가, 남침인가"를 물었다. 놀라운 것은 전교 1등을 한 학생이 '북침'이란다. 이유인즉슨, "북한이 침략했기 때문"이란다. "남한이 북한을 침략했을 것"이라고 주장한 학생은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데 북한이 어떻게 미군한테 맞짱을 뜰 수 있느냐?"고 대답했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학생들은 현대사를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누구의 잘못인 것일까.

"경남 산청이 고향이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는 일행 중 한 명은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 어땠을까"라며 하늘을 본다. 고구려 유적을 돌아보고 다음 숙소로 가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덧붙이는 글 다음 블로그와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동북공정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4. 4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5. 5 [단독] 강미정 조국혁신당 대변인 오늘 공수처 조사... '이정섭 수사' 주목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