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바느질에 찌든 엄마, 명절 앞두곤 무서웠어

[내 엄마를 말하다 ①] 바느질로 아홉식구 뒤치다꺼리...언젠가 시골로 돌아가자

등록 2011.02.03 15:47수정 2011.02.0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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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대목이 되면 온 동네 집집이 떡방아 찧는 소리와 음식 장만하는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 사진은 #5505 엄지뉴스로 전송된 사진입니다.) ⓒ 엄지뉴스


70년대 어릴 적 명절 대목이 되면 온 동네 집집이 떡방아 찧는 소리와 음식 장만하는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런데 우리 집은 떡방아 찧는 소리 대신 틀틀, 드드드들들, 오래된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부산하게 돌아가며 작은 흙집을 뒤흔들어 놨다.


엄마는 명절을 맞아 주문받은 동네 사람들 한복을 기한에 맞춰 납품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옷을 맡긴 사람들은 모두 새로 지은 한복을 입고 명절을 쇠고 싶어 했기 때문에 엄마는 대목이 다가올수록 더욱 시일이 촉박하고 마음이 바빴다.

옷감들은 시렁 위에 심란하게 밀려 있는데 날짜는 점점 좁혀지고 한 사람이라도 약속을 어겨 신용을 저버릴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받아 써버린 바느질삯도 때론 적잖은 부담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섣달그믐 날까지는 남자 공단 바지저고리 몇 벌을 더 지어내야 하고, 까다로운 여자 비로드 옷감도 한 감 마름질해야 했고, 두루마기까지 일습을 장만하는 여자 옷까지 한 벌 엄마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명절 대목 우리 집 풍경은 늘 납품기한에 쫓긴 엄마의 바쁜 손놀림으로 기억된다. '드레스 미싱', '미쓰비시', '태광사' 로고가 순서대로 재봉틀 발판을 바꿔가며 장식했고, 뾰족한 인두가 금성을 지나 필립스 다리미로 바뀌는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이 변함없는 풍경이었다. 엄마 혼자 조바심치며 일에 쫓겨도 식구 중 누구도 거들 수 없는 성질의 일이었다.

동네서 엄마는 '바느질 댁'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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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명절에 많이 입는 예쁜 한복들 ⓒ 이승철


저고리 깃을 완만한 곡선으로 붙이고 앞섶의 끝을 버선코 모양으로 앙증맞게 삐칠 수 있는 기술은 엄마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고작 옆에서 거들 수 있는 일이라야 엄마가 박아 놓은 옷고름, 대님 등을 앞면으로 뒤집어 주는 일이나 바늘귀를 꿰어 주고 인두를 달궈 주는 일 정도가 고작이었다. 혀를 끌끌 차면서 마른기침을 거푸 토하면서 모두 엄마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엄마를 진정으로 돕고자 한다면 우린 거치적거리지 않게 밖으로 나가 놀아야 했다. 괜히 산만한 바느질감 옆에서 얼쩡대다가 인두를 묻어 놓은 화롯불이라도 잘못 건드려 재라도 한 줌 날리는 날이면 비싼 남의 뉴똥(빛깔이 곱고 보드라우며 잘 구겨지지 아니하는 명주실로 짠 옷감) 천에다 불구멍을 내는 위험천만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동네 멋쟁이 앵남댁처럼 값비싼 천을 끊어 오는 이의 옷감을 만지는 날이면 엄마는 극도로 예민해져서 우리를 작은 방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다른 아이들은 갖가지 주전부리와 설빔으로 설레는 대목을 맞이하건만, 우리 집 굴뚝은 몽실거리는 연기를 실컷 피워 올리지 못하고 늦도록 적막하기만 했다. 하얀 쌀 튀김 가루를 범벅으로 묻힌 산자를 튀기거나 고소한 깨강정을 누르거나 노란 약과를 빚는 모습은 다른 집들 아이들이나 누리는 훈훈한 정경이었다. 우리 집 명절 음식은 대부분 엄마가 옷감을 만지는 사이사이 잠깐씩 짬을 내어 대충 해내느라 간소하고 부실했다. 연로하신 할머니까지 일손을 보태지만 명절을 앞둔 부엌치고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집 쑥떡이 유독 거친 쑥 가시가 그대로 박혀 자꾸 이 사이에 켕기는 것도, 까만 뉘 천지인 가래떡으로 떡국을 쒀서 이가 섬뜩거리는 것도, 튀김옷이 훌러덩 벗겨진 식은 명태 전이 번번이 차례 상에 올라오는 것도 다 그런 차분하지 못한 부엌 사정 때문이었다. 엄마는 손으로는 꾹꾹 저고리 동정에 풀을 묻혀 지지는 한편, 가끔 부엌 쪽을 드나들며 떡쌀을 담그고 식혜를 끓이다가도 이내 삼회장저고리 옆트임을 마무리하는데 더 집중하여 부엌일을 잊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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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 한 옷감 ⓒ 김정혜


옷감을 마름질하고 재봉틀을 돌리고 날렵하게 시침질을 하는 데 온 신경을 빼앗기느라 엄마는 어린 자식들이 명절이면 으레 갖는 설빔에 대한 기대와 주전부리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날마다 비단을 짜면서 비단옷 한 벌 입을 수 없네!' 하는 한탄은 그 당시 우리 사정을 묘사하는 정확한 표현이었다. 날마다 남들 입을 새 옷을 지어 바치면서 정작 어린 자식들 설빔 한 벌 변변하게 장만해 주지 못하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동네서 엄마는 바느질하는 '바느질댁'으로 불렸다. 바느질댁 엄마는 사람들 한복을 만들어 주고 돈을 벌었다. 그때는 각자 포목점에서 천을 끊어다가 수공은 별도로 맡겼는데 솜씨 좋은 엄마는 동네 사람들은 물론 인근 고을의 아낙네들이 탐내는 바느질 수공인이었다. 짐작만으로 치수에 맞게 옷을 척척 지어내는 눈썰미에다가 바느질삯이 면소재지에 비해 저렴한 것도 엄마를 찾는 이유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옷감을 들고 찾아오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여자들이었다. 치수를 재고 까다로운 개인 취향을 친절하게 반영해주는 엄마의 성실함은 사람들이 높이 사주는 평판이었다.

"용반리 아치실양반이라는 이가 우리 동네 누구만 허요? 체격이."
"용반리 아치실양반이라. 어디보자, 키는 옥천 성님이나 비슷 헐라나?"
"품도 옥천시숙만큼이나 허요?"
"품은 외려 쌍촌성님 만치 홀깡 헌 편이제. 옥천 성님 키에다 쌍촌성님 품이다, 짐작 허고  허믄 쓰겄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른 동네 남정네 옷을 마름질할 때면 아버지와 엄마는 동네 사람들을 모델로 치수를 짐작했다. 아버지가 부연하는 설명을 토대로 엄마는 가상의 남정네 치수를 어김없이 맞춰냈다. 나중에 입혀 보니 기장도 품도 딱 맞고 바느질도 잘되어 맘에 쏙 들더라는 칭찬은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었다.

깨끼 옷감 시접에 이마 찡그렸던 엄마, 열여섯에 시집와... 

누구네 자식 혼사 말이 오가거나 어느 댁 어른 회갑이 다가오거나 하면 엄마는 맡겨올 옷감의 가짓수와 끊어 올 천의 종류를 미리부터 가늠해보며 기대에 찼다. 다섯 명 자식들의 육성회비와 교복값 등이 때맞춰 기다리고 있었고 삯을 받는 족족 절실한 쓰임새가 늘 정해져 있었다. 본격적인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의 이른 봄 행락철도 엄마에게는 특수였다.

다른 아줌마들은 계 모임에서 불국사나 울진 석류 굴 등지로 구경 갈 희망으로 들떠 있는데 엄마는 그네들 나들이옷을 지어 주고 돈을 만질 기대로 들떠 있었다. 평상시엔 허름한 몸빼바지에 남자들 셔츠 닳은 것을 기워 입고 살던 아낙들도 봄나들이만큼은 나일론 천이라도 한복 한 벌 지어 입고 기분을 냈다. 생각해보면 그 거추장스러운 한복을 입고 태종대도 가고 설악산도 가곤 했던 것이다.

엄마는 다른 엄마들이 새로 장만한 한복을 차려입고 봄나들이를 가도 그 대열에 끼지 못하고 내내 바느질만 했다. 작은방 재봉틀에 올라앉아 치마 주름을 들들들 박고 있거나, 헝겊 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린 사이에서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깨끼 옷감의 아슬아슬한 시접을 잡느라 이마를 찡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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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과 흙담이 남아있는 산골마을 풍경. 작은 등산 안내판이 보인다. ⓒ 전용호


인근 고을에서 유명한 양반동네라는 브랜드 네임에 혹해, 중매로 열여섯 나이에 삼대독자 아버지한테 시집온 이후로 엄마의 삶은 늘 가난과 극심한 노동의 연속이었다. 우리 마을은 한창때는 거의 이백 가구에 육박할 정도로 큰 산골 동네였는데, 대부분 아낙들은 엄마처럼 양반동네라는 명분 하나에 의지해 시집을 왔다. 마을 가구 수는 많고 인구밀도는 높은데 궁벽한 산골마을은 경작할 토지가 턱없이 부족해서 모두들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양반고을이라더니 남자들은 하나같이 게으르거나, 노름을 좋아하거나, 술을 과하게 하거나, 함부로 여자에게 손찌검을 해대거나 하는 나쁜 가장의 특징들을 적어도 하나씩은 부리고 있었다. 그래도 당시 우리 마을 이혼율은 거의 0.1퍼센트 수준이었다. 시집온 이상 여자들은 참고 견디는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 0.1퍼센트로 짐작되는 이혼율이라는 것도 말이 그럴듯해 이혼이지 여자가 억울하게 쫓겨나는 식이었다.

엄마는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순전히 혼자 터득한 바느질 기술을 밑천으로 자식들을 키워 냈다. 농사일에 바느질에 식구들 뒤치다꺼리로 항상 지쳐 있는 엄마는 늘 짜증과 한숨을 달고 살았다.

대가족 맏며느리가 늘 웃는 낯으로 식구들을 대하고 통 큰 아량으로 가족 간의 화목을 이끌어 내는 후덕한 모습은 요즘의 김수현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가난한 집 삼대독자 며느리인 당시 엄마에겐 도저히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아홉이나 되는 식구들 치다꺼리를 하고 분기별로 닥치는 제사를 지내고 늘 쫓기듯 바느질을 해서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삶에서 너그럽고 포근한 품을 자식들에게 내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엄마에게 명절이라고 여느 집 아이들처럼 참기름 냄새 고소한 잡채와 전을 부쳐 달라, 예쁜 설빔을 장만해 달라고 떼를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린 독특한 집안 분위기에 눌려 이미 알고 있었다.

칠십 중반 친정엄마, 도시의 한 귀퉁이서 살고 계신다

이제 칠십 중반에 접어드신 친정엄마는 고향이 아닌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결리고 아픈 곳이 많은 노인으로 살아가고 계신다. 젊은 날 자신에게 찌든 가난과 고통만 안겨 주었던 우리의 시골집을 노년에는 쳐다보고 싶어 하지도 않으셨다. 엄마가 외면한 시골집은 점점 황폐해지고 방치되다시피 하여 빠른 속도로 허물어져 갔다. 흉물스럽게 변해 가는 집이 보기 딱해서 우리는 급기야 굴착기 업자를 청해 집을 쓸어버리고 등기 자체를 말소해버렸다. 이제 우리가 돌아갈 옛집은 없어진 셈이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을 깔끔하게 밀어버리고 나면 마음이 한층 개운할 줄 알았는데 빈 집터 위에 선 우리는 예상치 못한 낯선 감정에 시달려야 했다. 쓰러져 가는 집이라도, 집이 있을 때와 그마저 사라지고 난 뒤의 심정은 뭐라 형언할 길 없는 스산한 것이었다. 형제들은 그날 이후로 디아스포라(Diaspora), 집 없이 떠도는 이방인 신세가 되었다. 먼 훗날 언젠가는 빈 집터 위에 새로이 아담한 집 한 채 짓고 형제들을 불러 모으리라는 꿈을 저마다 품게 되었다.

우리가 나고 자란 옛집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린 데서 오는 아쉬움이 그렇게 간절할 줄 몰랐다. 새로운 집을 짓는 것은 이제 형제들의 간절한 소망이다. 서울로 강원도로 광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돌아갈 집을 고향에 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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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봉틀1 50년도 더 된 재봉틀 ⓒ 조종안


우리 언제 다시 옛집에 모여 아무런 시름없이 그 옛날의 재봉틀 돌아가던 소리, 괄게(불기운이 센) 달은 인두에 피식 피식, 엄마가 침 튀기며 약 올리던 아련한 추억들을 되새겨 볼 수 있을까. 우리가 꿈꾸는 그 집에서라면 엄마도 비로소 고단한 노동과 가난에서 놓여나 편히 쉬고 계실 것이다. 또 거기에서는 한 번도 포근하고 넉넉한 명절을 지내 본 적 없는 우리 형제들도 다 함께 둘러앉아 조청을 고고 수정과를 만들고 설빔을 뽐내보기도 한다. 엄마는 비로소 자식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설빔을 손수 지어 주고 계시리라.

그러나 상상 속의 옛집은 너무 아련하고 현실의 엄마는 여전히 도시의 아파트에서 힘없고 걱정 많은 노인으로 늙어 간다. 노년에 찾아온 이만큼의 평화도 엄마는 온전히 누리는데 익숙하지가 않다. 끊임없는 불안과 걱정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으신데 그것은 지난날에 엄마가 감당해야 했던 가난의 기억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무턱대고 부러워하는 고질병도 그래서 생긴 증상의 하나인데 시골이라도 다녀온 날이면 그런 증세가 더욱 심해진다.

"서쪽 통 새암 거리 영천댁 있지야. 그 집 자식들은 모다 잘 됐단다. 자식들이 돈일랑 걱정 말고 그저 '쓰시고 싶은 대로 쓰고 사시라'고 성화란다."
"엄마 주변 분들은 하나같이 자식들이 다 잘 됐어요?"
"글쎄 말이다. 돈 애끼지 말고 '쓰시고 싶은 대로 쓰시고 살라'고 그런단다. 영천댁 자랑이 아조 미어지더라."
"참 나, 어머니. 시골 장에서 '쓰시고 싶은 대로 쓰면' 대체 얼마나 쓸 거라고 그런답니까.  노인들이 자랑도 웬만큼 해야지. 시골만 다녀오면 엄마는 그럽디다."

형제 중 누군가는 듣다못해 기어이 한마디 했다. 그래도 엄마는 매번 누구네 형편이 부쩍 펴게 되었다는 소식, 누구네 자식들이 출세했다는 소문을 곧잘 가지고 와서 한숨을 쉬신다. 아파트 앞에서 만난 같은 고향 출신 야채장사 아저씨한테도 부러움이 꽂히는 것은 예외가 아닌데.

"우리 시골에서 윗동네 살던 사람인데, 너는 그때 어려서 잘 모를 것이다. 그 집도 옛날 같지 않고 많이 살만해졌단다. 참말로 부럽더라이. 반가워서 이 호박잎사귀랑 고구마 줄기 좀 샀다. 아는 처지에 갈아줘야지."
"근데 왜 야채행상을 한대요? 살만하다면서."
"음, 심심해서 재미로. 시골에 전답이 아직도 많은 디, 거기다 푸성귀 조금씩 갈아 놓고 그거 아까워서 재미삼아 한단 말이다."
"취미로 장사를 해요? 이 땡볕에?"
"음, 이녁 말이 그러더라."
"장사는 취미로 하고, 그럼 부자라면서 왜 도시에서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한다던가요?"
"돈 많으믄 됐지 아무 데나 살믄 뭐 허겄냐. 그것까진 안 물어봤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시 찾은 친정집. 엄마는 이번에는 다슬기를 한 솥 끓여 놓고 먹으라고 권한다.

"음, 아는 이가 길에서 앉아 팔고 있글래 반가워서 한 바가지 샀다. 예전에 우리 윗동네 살던 인디 넌 그때 어려서 모를 것이다."
"혹시 그, 아저씨가 트럭 몰고 다니며 야채행상 하는 그 집 아닌가요?" "맞다 맞어. 그니 안사람이 저기서 노점을 해야. 다슬기도 팔고 두부랑 콩나물도 떼어다 팔고, 안팎이 아조 부지런하더라."
"아저씨는 취미로 야채행상을 하고 그 집 아주머니는 취미로 또 노점상을 하는 거예요? 엄청 부자라면서요."
"금매."

이젠 엄마도 뭔가 앞뒤가 안 맞다 싶으신지 이쑤시개로 다슬기 속살을 파내면서 눈만 깜박이신다. 어쨌든 엄마의 타인을 향한 부러움과 당신 처지에 대한 비관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해 간다. 그것이 자식들 입장에서는 속상하고 안타까운 일인데 엄마는 남들은 용케들 살만해졌다는데 우리는 어째 사는 게 여전히 이 모양인지 불안을 떨쳐내지 못하신다. 남들이 자랑삼아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계신 데 그럴수록 당신의 처지는 딱하고 괴롭게 느껴지시는 거다. 평생 재봉틀을 돌리며 꾸려가야 했던 가난한 살림에 대한 불안과 강박에서 여전히 놓여나지 못하고 계신 것이다.

명절이 되면 남들은 고향에 가는데 집이 사라지고 없는 우리 형제들은 돌아갈 집이 없다. 옛집을 복원하여 모여 앉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누가 먼저 나서서 삽질을 할 여력이 없어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터에 옛집을 반드시 복원하여 디아스포라 유민으로 뿔뿔이 흩어진 형제들을 불러 모아 함께 오순도순 이야기 나눌 것이다.

엄마와 우리 자식들의 질긴 트라우마는 그렇게 한번은 꼭 모여 앉아 편히 쉬어야 치유될 수 있는 고질적인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 옛집에 모여앉아 어린 시절 누리지 못했던 훈훈한 명절의 정과 꿈같은 평온을 비로소 누릴 것이다. 그날을 위하여 우리는 집을 잃고 뿔뿔이 흩어진 디아스포라 이산의 아픔을 능히 견디어 낼 것이다. 
#어머니 #명절 #고향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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