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를 노래하는 고독하고 거친 방랑자

[서평] 리 차일드 <추적자>

등록 2008.07.01 09:43수정 2008.07.0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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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 겉표지 ⓒ 랜덤하우스

▲ <추적자> 겉표지 ⓒ 랜덤하우스

<추적자>를 쓴 영국작가 리 차일드(Lee Child)는 미국의 블루스 음악을 꽤나 선호하는 것이 틀림없다. 작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추적자>의 주인공 잭 리처 역시 블루스를 좋아한다.

 

작품 속에서 잭은 무언가를 기다릴 때, 자동차에 앉아 있을 때 그리고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야만 할 때 항상 블루스 곡을 떠올린다.

 

그것도 그냥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분위기에 맞게 곡조를 적당히 바꿔가면서 곡을 머릿속에서 반복한다. 한번은 자신을 위해, 또 한번은 다른 사람을 위해, 다른 한번은 지나간 세월을 위해.

 

잭 리처는 은퇴한 군인이다. 헌병으로 근무할 당시에 여러차례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아마 블루스 곡을 읊조렸을 것이다.

 

살인과 블루스. 왠지 안 어울리는 조합 같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닐테고, 살인을 하고 나면 죄책감과 허무감도 밀려올 것이다. 그런 감정을 추스리기 위해서는 블루스가 적당하지 않을까.

 

잭 리처는 13년간 군수사관 생활을 해왔다. 그 이전에 그는 태생부터가 군대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역시 군인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잭은 케네디 시대가 시작될 무렵에 유럽의 한 기지에서 태어났다. 그 이후로는 닥치는대로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살았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대략 스무 군데가 넘는 학교로 전학을 다녀야 했다.

 

장소도 다양하다. 베트남, 한국, 필리핀, 독일, 아이슬란드, 일본 등. 예컨대 미군이 주둔하는 나라라면 어느 곳이든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이렇게 자주 옮겨다니느라 당연히 그에게는 별다른 친구가 없고, 어느 한곳에 뿌리박고 사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군수사관 출신의 방랑자 잭 리처

 

대신에 배운 것도 있다. 그것은 낯선 장소에 적응하며 어떻게 지위를 얻는가 하는 점이다. 새롭게 전학을 간 곳에는 당연히 텃세가 있고, 그 텃세는 종종 신입에게 시비를 거는 것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때마다 잭은 두살 터울인 형과 함께 끝까지 힘을 합쳐 싸웠다. 어린 시절부터 생존에 필요한 거친 태도를 몸에 익힌 셈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군에 입대해서 조금씩 세련되게 다듬어 졌다. 군대라는 곳은 살인 전문가를 키우는 곳이니 만큼, 대책없이 거친 것보다 정제된 기술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배웠을 것이다. 여기에는 블루스도 한몫을 했을지 모른다. 격렬한 감정을 절제된 음악으로 표현하는 블루스가 잭에게 평소에 침착하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도록 이끌어 주지 않았을까.

 

이리하여 잭 리처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탄생한다. 오랜 군수사관 경험으로 만들어진 직관과 추리력, 어린 시절부터 군대생활까지 이어져온 방랑의 생활방식, 군대에서 다듬어진 강인한 육체와 전투기술, 여기에 더해서 각종 총기를 다루는 능력까지. 이 정도면 현대판 하드보일드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는 인물인 셈이다.

 

잭 리처가 데뷔하는 작품 <추적자>에서 잭은 36세 노총각으로 등장한다.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미국은 굳이 대군을 유지해야할 필요가 없어졌고, 덩달아서 생긴 군 예산 감축으로 인해 잭은 6개월 전에 은퇴하게 되었다. 헌병에서 퇴직수당을 주었고, 그동안 모아둔 돈도 조금은 있다.

 

잭에게 없는 것은 주소와 가족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군대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군대 막사가 집이나 마찬가지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하나뿐인 형은 워싱턴에서 근무중이다. 어린 시절에는 형과 등을 맞대고 힘을 합쳐 다른 아이들에 맞서 싸웠지만, 성인이 되면서 부터는 거의 연락도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형을 본 것은 7년 전이다.

 

말하자면 잭은 군대를 전역하면서 그동안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자유를 만끽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자신에게 명령하는 상사도 없고 군인으로서의 의무도 없다. 자신에게 간섭할 가족도 없다. 그러니 잭은 약간의 돈과 무한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생긴 자유가 조금은 부담스럽고 실업자가 된 것이 불안하기도 하지만, 잭은 우선 이 자유를 즐겨보기로 한다.

 

작은 마을을 둘러싼 음모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래서 미국의 전역을 돌아다니는 여행을 시작한다. 특별한 목적지도 없고 여행의 목표도 없다. 펜타곤을 떠나면서부터 발길 닿는대로 여행을 하는 것이다. 워싱턴, 필라델피아, 보스턴, 뉴욕, 피츠버그, 시카고, 볼티모어 등. 대부분은 잭이 처음으로 보는 풍경들이다.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학교에서 배우고 들어왔던 것들을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자신의 눈으로 직접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던 도중 문제가 발생한다. 잭은 조지아 주의 작은 마을인 마그레이브에 도착한 직후 경찰에게 체포된다. 잭이 마그레이브에 들르게 된 것도 우연이다. 탬파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애틀랜타로 향하던 도중,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블루스 기타연주자 블라인드 블레이크(Blind Blake)가 마그레이브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버스를 세운 그는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20km가 넘는 길을 걸어오다가 난데없이 경찰을 만나서 경찰서로 끌려오게 된다. 잭은 살인사건의 누명을 쓴 상태이지만 그다지 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오랜 군수사관 생활로 인해서 이런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유의 관찰력으로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작은 마을을 장식하고 있는 새롭고 깨끗한 물건들, 온통 돈으로 도배한 듯한 마을의 분위기, 능력있는 부하들과 멍청하고 무식해보이는 경찰서장. 작은 마을 마그레이브를 둘러싼 이상한 공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잭 리처는 살인의 누명과는 관계없이 혼자서 이 마을의 비밀을 파헤치기로 결심하고 하나둘씩 단서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매력적인 캐릭터가 활약하는 <잭 리처 시리즈>

 

<추적자>는 독특한 소재와 함께 구성이 탄탄한 스릴러지만,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 잭 리처의 모습이다. 그는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정이 많고, 냉정하면서도 감상에 젖을 때가 있다.

 

혼자있는 시간에는 블루스 음악가 하울링 울프(Howling Wolf), 보비 블랜드(Bobby Bland)의 노래들을 머릿속으로 반복한다. 거친 사람들을 상대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틈나는대로 마을에 남아있는 블라인드 블레이크의 흔적을 찾아다닌다.

 

점잖은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려고 하지만, 누군가가 먼저 자기에게 시비를 걸면 참지 않는다. 36년의 인생동안 고작 6개월의 자유를 누렸기 때문에, 그 6개월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디에서건 얽매이고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추적자>는 1997년 작품이다. 이후로도 계속된 잭 리처 시리즈는 현재까지 12편이 발표된 상태다. 그 긴 시간 동안 작가는 백만장자가 되었고, 잭 리처도 덩달아서 유명해졌다. 세월이 흘러서 잭 리처의 나이도 40대 중반으로 접어들었겠지만, 그 강인함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적자>는 잭 리처라는 매력적인 인물의 탄생을 알리는 요란한 신호탄이다.

덧붙이는 글 <추적자> 리 차일드 지음 / 안재권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추적자

리 차일드 지음, 안재권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추리소설 #추적자 #잭 리처 #리 차일드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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