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왕국>겉표지문학과지성사
380여 년 전, 그 왕국은 짐승도 목에 금줄을 걸치고 다닌다고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그곳은 어디일까? 먼 곳이 아니다. 이 땅에 있었던 '조선'이다. 이 소문은 우리가 알던 조선의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지만 김경욱 장편소설 <천년의 왕국> 속에서, 당시 조선을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생각은 그러했다. 벨테브레라는 이름을 지닌, 훗날 조선에서 박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남자도 하늘의 뜻으로 조선에 올 때까지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 남자는 곧 그렇게 알고 있던 것들이 소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선은 결코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하지만 유럽과 다른 것이 많았다. 그가 보는 이방인들은, 시적인 언어를 쓰면서도 속내가 깊었다.
또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솔직했다. 무모한 행동을 하면서도 하늘을 공경할 줄 알았고, 명분을 따르면서도 실리를 취하려고 했다. 그것이 그의 눈에 비친 이방인, 즉 조선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방인의 문화가 어찌됐든, 그 남자는 네덜란드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하기야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방인의 왕은 남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내와 이별한 것을 슬퍼하면서도 조선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남자뿐만 아니라 함께 온 데니슨과 에보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은 그들을 군인으로 만든다. 유럽인들이 조선의 왕을 위해 총을 든 것이다.
박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천년의 왕국>은 여러 모로 관심을 끄는 소설이다. 이방인의 눈으로 조선을 바라봤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다. 박연은 누구나 알다시피 조선인이다. 하지만 그의 신분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폭풍 때문에 조선에 떠밀려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불운한 외국인이었다. 김경욱이 주목한 부분은 그곳이다. 갑작스럽게 조선에 왔던 유럽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일까? <천년의 왕국>에서 만날 수 있는 조선의 모습은 낯익으면서도 낯설다. 김경욱이 철저하게 이방인의 심정으로 소설을 쓰려고 했기 때문일 터이고, 그것이 상당히 성공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천년의 왕국>의 이야기는 우리 것이지만, 새로운 모습이 많다.
두 번째로 관심을 끄는 것은 '박연'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박연은 역사책에서도 짤막하게 언급되는 인물이다. 분명 매력적인 인물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김경욱은 박연을 택했다. 왜 그런 것인가?
박연이라는 인물은 동시대의 조선인들과 고뇌가 다르다. 그렇기에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이 '신분' 문제를 계기로 이야기를 꾸민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박연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더 험난한 고뇌를 짊어져야만 했다. 절망이라는 것도 박연의 것만큼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박연이 운명을 사랑하게 된다면 어떠하겠는가. 그것만으로도 <천년의 왕국>은 주목할 수밖에 없는 소설이 된다.
세 번째로 관심을 끄는 것은 김경욱의 도전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작품들 중에서 최근에 발표됐던 <장국영이 죽었다고?>와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에서 김경욱은 시니컬하면서도 재치 넘치는, 도시적이면서도 세련되고 깔끔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런데 <천년의 왕국>에서는 그것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이름을 떼 놓고 본다면 동일 작가의 작품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젊은 작가의 도전이 엿보이는 대목인 것이다.
이렇듯 관심거리가 많은 한국소설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새로움으로 무장해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박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김경욱의 <천년의 왕국>, 한국소설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준다.
천년의 왕국
김경욱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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