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분단사가 빚은 또 하나의 망부가

[소설 속 강원도 17] 최윤의 <벙어리 창(唱)>

등록 2007.06.28 14:00수정 2007.06.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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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령 고개. 거진으로 가는 최북단 고개. ⓒ 최삼경

작금의 대명천지에도 때때로 상식으로 진단을 하거나 이해가 안 가는 일들이 많이 있다. 과학과 문명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지금, 여전한 불가사의와 '알 수 없음'의 결론은 학문의 표면에서도, 실제 현장에서도 끊임없이 나타나고는 한다. 이는 이제 따로 놀랠 거리도 아니어서 상식과 비상식의 혼재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취급되고 있다. 사태가 이러하니 거기에는 위의 소설 제목처럼 벙어리가 노래하는 경우도 없으란 법은 없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음대를 나와 뚜렷한 직업 없이 입대를 기다리고 있는 청년을 화자로 풀어나간다. 그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심지어 용변 보는 소리까지도) 녹음하며 시간을 보낸다. 어떤 소리는 방송국에 다니는 선배에게 팔아 짭짤한 용돈벌이도 되고, 또 어떤 소리는 녹음과정에서 들켜 혼쭐이 나기도 한다.

이렇게 그에겐 세상이란 온통 소리로 이루어진 소리 공화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맞닥뜨린 벙어리 처녀가 공중전화 부스에서 수화기를 들고 내지르던 소리(唱)를 듣게 되고 내내 잊지를 못한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진짜 주인공은 그의 이모인 '이정분'이다. 조카들과 술 한두 잔으로 거나해지면 '그대는 모를 거외다'란 노래를 불러 젖히며 근거도 없는 낙관론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여자. 중년을 넘어 늙은이의 대열에 가담하게 될 나이에도 툭하면 이모부에게 맞아 잔뜩 부은 얼굴로 조카네 집으로 피신 오는 여자. 그래도 속없는 여자처럼 아침이면 맛 갈 나는 반찬을 만들어 놓고, 거리낌 없이 조카들에게 용돈을 달라는 여자 이정분 여사!

극도의 슬픔은 뜬금없는 낙관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쯤에서 이 여사의 천연덕스러운 웃음 뒤에 도사리고 있을 상처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인생의 마무리를 생각해야 할 나이에도 가수를 해 볼 작정이라며 갑자기 동해안의 거진행을 결행한 이모의 걸음엔 어떤 배후가 있었던 것일까.

거기에는 20살의 이정분과 25살의 월북 작곡가 강우진이 아직 핏덩이 같은 아이를 안고 북송을 기다리며 지내던 바닷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가 3년같이 초조하고 조마한 시간들이었지만 또 그때만큼 쿵쾅거리는 행복한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동네 선후배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그러나 좌·우익의 어느 한쪽을 택해야 했던 시대의 강요로 온전한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된다. 이 여사는 그렇게 첫사랑과 아이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자포자기식의 결혼과 이후의 생활들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6·25 전쟁 중에 헝클어진 것이 어디 엄한 젊은이들의 사랑뿐이랴. 무언지도 모를 이유로 서로 상처를 파헤치던 미친 시간들…. 얼마 전 어느 일간지에 서울시내 초등생의 38%가 6·25를 조선시대 때의 전쟁으로 알고 있다는 타이틀을 내세우며 반공교육 혹은 전쟁교육을 강화하자는 시대착오적 기사를 올리기도 했다.

국가보안법 등이 건재한 우리로서는 어찌 보면 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이 아닐까. 우리네 평화에는 '북한'은 포함되지 않는 셈이고, 그 반대도 성립하고 있으니 아직 먼 길을 가야 할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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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진항 전경. 비수기라 그런지 썰렁하다. ⓒ 최삼경

소설에서 이정분 여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을 설명할 때 '동해안 등허리께'란 표현을 썼다. 남한만의 동해안이 아닌 우리나라 전체의 동해안으로 바라볼 때에야 가능한 지리적 인식이다. 보통은 '동해안 위쪽께'라 표현하는 것이 이미 습관이 되어 버렸을 터이니까.

작가는 연어들 스스로 낚시꾼들의 바늘을 피해 사다리를 만들어 절벽을 기어오르는 결말로 소설을 마무리 짓는다. 연어의 회귀는 얼마나 모진 여정이면서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인가. 꿈속에서나마 이루어지는 그들의 집요한 회귀는 우리에게 위안일까, 부끄러움일까.

여하튼 벙어리 창은 시대와 가족이 강요하는 "탈을 쓰고 살다가 끝내는 탈의 얼굴이 되어버린 무모한 배우"였으며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고자 했던 우리의 여배우 이정분 여사"를 위한 헌사이자 우리네 분단사가 빚고 있는 망부가가 아닐까 한다.

전흔의 상처가 생생한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나라는 대선정국 얘기만이 무성한 채 또 하나의 유월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동해바다의 철조망이 걷히고, 시베리아, 유럽까지 이어지는 철도가 얘기되고 있음이니 이것이 또한 부조리하고 엉터리 같은 우리네 삶의 한 면이 아니겠느냐고 저 바다는 말없이 뒤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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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바다. 강우진과 아들은 이 바다를 통해 월북하였다. ⓒ 최삼경

#벙어리 창 #최윤 #강원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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