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로드무비의 새 장을 연 김삿갓

[소설 속 강원도 -16] 고은의 <김삿갓>

등록 2007.04.24 12:10수정 2007.04.2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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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마을 입구 ⓒ 최삼경

우리에겐 넉살과 변죽 좋은 수완꾼에다 여염집 아낙에게 희롱을 일삼는 난봉꾼이자 술과 시를 좋아하는 희대의 풍운아로 기억되는 난고 김병연!

金笠, 김삿갓은 여러 가지로 쇠락해가는 1800년대 초에 돌연변이적 상상력과 저항정신으로 새로운 감수성의 물꼬를 열었을 뿐더러 진서(한문)를 가차기법이나 파자기법으로 종횡하여 한글에도 생동감을 준 우리네 에로문학의 창안자이자 로드무비의 효시라 할 만하다.

지난 15일, 꽃이 먼저 낸 길을 따라 찾은 영월 하동면 마대산 기슭의 옛 집터는 지난 여름의 수해로 수리중이었다. 정감록에 ‘죽음 없는 땅’, ‘종적을 감출 만한 곳’이라 하여 예전에는 미사리(未死里)라고도 불렀다. 격암 남사고도 천하에 둘도 없는 피난처라 하였던 곳도 이렇게 폭우와 산사태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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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생가 - 지난 해 수해로 현재는 복구공사가 진행중임 ⓒ 최삼경

가문의 쇠락을 재촉하는 박정하고 고약한 인심에 비하면 차라리 나은 것일지 모르겠으나, 금이 가고 무너진 바람벽의 폐가를 보는 감회는 그리 유쾌할 일이 없었다.

그 시절, 멸문지화의 위험을 피해 떠돌았을 평창, 영월 길도 지금처럼 이렇게 고적하였을까. 그는 여기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과거시험에서 의욕적으로 자신의 조부를 호되게 비판(嘆! 金益淳罪通於天에 답하여 한 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 번 죽어 마땅하리오 운운하며 장원을 따냈던 일)하였던 소년 김삿갓에게 지워진 모멸과 절망!

게다가 당대의 권문인 안동김씨의 일족으로 가문을 복권시켜주길 바라는 노모가 지워준 의무감!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김병연은 너무 어리고, 예민한 시재(詩才)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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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묘역 ⓒ 최삼경

‘시선(詩仙) 김삿갓 난고선생 유적비’라 써있는 묘역은 살아생전의 고된 유행(流行)을 위로라도 하는 듯 평화로운 정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1863년 3월 29일을 일기로 전라도에서 생을 마감하고 그의 차남 익균이 지금의 노루목으로 묘를 이장하였다.

그렇게 잊혀 지내다가 불과 25년 전(1982년 10월)에 한 향토사학자에 의해 지금까지 보전되기에 이르렀다. 사회가 진보한다는 지표 중의 하나가 연좌제의 폐지가 아닐까. 나 자신의 어떤 잘못에 기인하지 않는 구속에서 누구라고 의연할 수 있을까. 그의 신랄한 기벽에는 이러한 비분강개의 한이 더하여 졌을 것이리라.

그의 일대사를 살펴보면 한창 혈기방장한 20대에는 금강산 지역과 함경도 일원을, 30대에는 황해도, 평안도 지방을, 40대에는 경기, 충청지역을, 말년인 50대 때에는 호남, 영남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가히 누구도 견줄 수 없는 호방한 여정에다 가는 곳마다 멋진 시를 읊어 놓았으니, 세상과는 불화하였으나 재주는 타고난 것이어서 조선의 두보라 하는 이름이 전혀 빛바래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의 모순에 대한 의분과 정의감이 반항과 풍자 정신을 낳았고, 그것이 잘 반죽되어 반상을 초월한 휴머니즘이 되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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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에 놓였는 삿갓과 지팡이 ⓒ 최삼경

누구랄 것도 없이 사는 게 개똥밭 같이 어렵던 생활에도 삿갓의 허랑방탕을 받아 밀기울이라도 한 그릇 따로이 내어주는 민중의 너그러움은 또 무엇이었을까. 또한, 그 비루한 방랑중의 통음과 허기를 받쳐주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보다 조금 이른 영정조 시절의 문체반정을 있게 한 화백, 가객, 악사 게다가 강담사(講談師)라는 이야기꾼의 출현 등 사회전체가 기존의 사장(司章)을 뛰어넘는 파격과 새로운 미학의 열풍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민감한 삿갓의 실핏줄에도 어찌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투영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설에는 고산자 김정호와 관북 칠보산을 배경으로 하여 다산 정약용, 허균까지 언급되거나 혹은 카메오로 직접 출현한다. 작가 고은은 그간 김삿갓에 대한 몇 권의 책이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참고하지 않고 자신의 결대로 써나갈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방랑이란 그것의 실질은 낭만적이기보다 아주 힘든 노동으로서의 행위이다. 방랑정신이야말로 사람들의 심성에 잠겨 있는 현실 탈출의 오랜 향수인지 모른다’라고 방랑에 대해 헌사 하였다. 많은 반항아들 역시 이 방법을 취했으나 대부분의 재주 가진 이가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는 게 관습화된 사회였다.

그렇지만 군 시절 짧은 행군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은 안다. 많은 훈련 중의 마무리는 대부분 행군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행군이 자신의 신체로 ‘걸음’하는 것 외에는 다른 요령이 끼일 게재가 없는 정직(?)하고 힘든 과정으로서 공인됐음을 뜻한다. 그만큼 행군은 지루하고, 힘들고, 외로운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니 일생이 행군이었을 이들의 팍팍함과 헛헛함이야 어찌 짐작이나 해 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영월, 정선, 태백은 내륙의 오지로 많은 접근로의 개통에도 여전히 멀리 있는 것으로 느낀다. 다분히 심리적이다. 이젠 서울에서도 두 시간 반이면 충분한 거리로 당겨져 있고 교통 배후도 좋아졌다.

유독 처녀지의 비경을 많이 간직한 영월에서 동강, 서강을 따라 걷다보면 저절로 탄성이 쏟아진다. 강의 풍광에 취할 즈음 어라연 계곡이 나온다. 어라연(魚羅淵)은 물고기의 비늘이 비단처럼 반짝이는 계곡이라는 뜻으로 단종고사와도 관련이 있다.

열길 물 속을 알기 위해서는 그 물이 깨끗해야 함이 선결조건이다.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자연환경들을 이제 좀 더 체계적으로 철저히 보전되고 개발해야 할 것이다.

김삿갓은 산천을 떠돌다가 절이나 주막, 서당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테면 그 나름의 베이스캠프 같은 것이겠는데 마땅히 비빌 데 없는 입장에서야 얼마나 반갑고 요긴할 터인가.

그가 걸은 길이며, 그가 느낀 오만갈래의 감회며, 또 그가 지은 많은 시들이 온당하게 평가받는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라도 평생을 길 위에서 산 도사(道師)를 이렇게 대접해서야 하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그가 강원도 양구 어디쯤에서 지었다는 ‘주막에서’를 인용하며 봄철 나물을 안주로 하여 작은 잔이나마 한 상 그득히 올리고 싶은 마음이다.


주막에서 艱飮野店

천릿길을 지팡이 하나에 맡겼으니 千里行裝付一柯
남은 엽전 일곱 푼도 오히려 많아라. 餘錢七葉尙云多
주머니 속 깊이 있으라고 다짐했건만 囊中戒爾深深在
석양 주막에서 술을 보았으니 내 어찌하랴. 野店斜陽見酒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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