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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4.05 09:09 수정 2019.04.06 11:00
 

증언자 이봉열씨의 국민학교 졸업식 모습. 둘째 줄 맨 왼쪽이 이봉열 ⓒ 박만순


"전부 옷 벗어!" 방 안에 있던 이들은 기겁해 눈만 껌벅였다. "이 빨갱이 새끼들, 전부 벗으라니까!" 하며 가까이 있던 노인네를 몽둥이로 내리쳤다. 노인은 '어이쿠'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대한청년단원은 발로 노인의 가슴을 짓밟으며 "빨리 일어나지 못해" 하며 몽둥이를 노인의 머리로 향했다. 노인은 신음소리를 내며 주춤주춤 일어났다. "옷 벗어" 대한청년단원은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노인에게 반말을 하며 옷을 벗게 했다.

노인은 할 수 없이 겉옷을 벗었다. 하지만 차마 속옷을 벗을 수는 없었다. 그곳에는 젊은 여성과 아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인을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며 "빤스도 벗어! 벗기 싫으면 여기서 죽을 줄 알아" 호령을 내리는 대한청년단원의 눈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눈동자에 핏줄이 서고 생사람도 잡아먹을 표정을 하고 있는 이는 이웃 마을 청년이었다.

전부 발가벗겨진 노인은 너무나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이 발개지고,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노인에게는 그 정도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았다. 청년단원들은 노인의 손을 뒷결박 지었다.

"이 빨갱이 노인네처럼 전부 벗는다. 벗는 시간은 3분이다. 벗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뒈질 줄 알아!" 청년단원의 살기등등한 목소리는 천장까지 닿으며 방안에 윙윙 퍼졌다.

젊은 여성들은 흑흑 울음소리를 내며 할 수 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예외는 없었다. 어린아이도 예외 없이 옷을 벗어야 했다. 방 안에 있던 20명의 노인, 여성, 청년, 아기 모두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전부 옷을 벗었다. 청년단원들은 킥킥거리며 준비한 새끼로 손을 묶었다.

"전부 걸어."
 
1950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양방마을에서 벌어진 일
 
11월 말. 칼바람이 불었다. 옷이 모두 벗겨진 이들의 몸은 움츠러들었고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발가벗겨진 채 마을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손이 묶인 상태에서 걷기에 눈을 감을 수도 없고, 중요 부위를 가릴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머리를 숙이고 울음을 터뜨리는 일이었다.

마을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던 이봉열(당시 15세)은 갑자기 나타난 해괴한 행렬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소년 일행은 볏집단 뒤로 숨어서 행렬을 구경했다. 처음에는 대낮에 어른들이 전부 옷을 벗고 걸어가는 것이 너무 우습기도 하고 호기심에 차서 봤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발가벗겨 가는 이들의 손이 묶여 있고, 울면서 걷는 것이 아닌가. 이봉열이 더욱 놀란 것은 그 대열에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외삼촌과 외숙모, 막내 외숙모와 딸, 이모의 시아버지가 있었던 것이다. 막내 외숙모 딸은 불과 3살이었고 발가벗겨진 채 외숙모의 등에 업혀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이봉열 역시 얼굴이 붉어지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수치(羞恥)의 대열에는 형수와 시동생이 있었다. 이들은 피울음만을 낼 수밖에 없었다. 형수와 시동생, 부부, 사돈 되는 이들 20명이 대낮에 발가벗겨 걷고 있으니...

이 대열은 1950년 9월 말 가평 용문산 자락에서 인민군에게 학살된 이의 상가(喪家)에 멈췄다. 두 달 전에 죽은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상가에 있던 이들 중 일부는 놀라 얼굴을 돌리기도 하고, 일부는 킥킥 거리고, 어떤 이들의 얼굴에는 적개심과 고소함이 묻어났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상가 집의 망인(亡人)은 인민군에게 죽은 것이고, 발가벗겨진 이들은 소위 부역자의 가족이었다. 즉, 이념대립의 양편에 속한 가족이라 할 수 있다.

"전부 무릎 꿇고 곡(哭)해!"

끌려온 20명의 주민들은 그 자리에서 울음이 터졌다. 망인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이자 서러움의 표현이었다. "아이고" "흑흑" "엉엉"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누가 일부러 시키지 않아도 터질 수밖에 없는 울음이었다. 1950년 11월 말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양방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숯가마에 묻혀 죽고

"부른 사람들은 얼른 나오기요." 북한군은 마을에 나타나 4명의 청년들을 호명했다. 총을 들고 있는 북한군의 명령을 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호명을 당한 청년들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동무들, 이 짐을 지게에 싣고 함께 갑시다."

인민군 대열과 4명의 청년들은 추석을 하루 앞둔 1950년 9월 25일 달그림자와 함께 용문산을 향했다. 짐은 그리 무겁지 않았지만, 청년들은 '짐을 모두 옮긴 후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 걱정을 입 밖으로 내어 북한군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목적지인 용문산에 도착했다. 북한군들은 "동무들, 집으로 돌아가서 여기 위치를 이야기하면 안 되오. 모두 가시오" 하면서, 자기네 일행 2명을 산 아래까지 바래다 주라고 시켰다. 양방마을 청년 4명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들이 가슴을 쓸어내린 것은 성급한 일이었다. 산 아래까지 바래다 줄 것으로 알았던 군인들은 인민의 편에 선 군인(인민군)이 아니라 저승사자였던 것이다.

산 정상에서 내려와 8부 능선에 있는 숯가마에서 북한군은 양방마을 청년들에게 정지할 것을 명령했다.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청년들에게 총알이 날아들었다. "탕탕탕!" 순식간에 청년들이 고꾸라졌다. 북한군들은 주변의 흙과 낙엽으로 시신을 덮었다.

수장당한 남편을 살려낸 아내

비슷한 시각 청평호 끝자락에서는 후퇴하는 북한군들이 우익가족들을 배에 태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빨리빨리 타라우." 북한군들은 총구를 우익가족들을 향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낮에는 미군의 공습 때문에 꼼짝 못하는 북한군들이 야심한 시각에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에 의해 배에 실리는 우익가족들은 한결같이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고 몸은 옴짝달싹 못하게 새끼로 묶었다. 동작이 더딘 이들은 여지없이 총 개머리판으로 맞았다.

드디어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가 강 중간으로 이동했을 때 장교의 "쏴!" 하는 소리에 총구에서 불이 붙었다. "군관 동무 어떻게 할까요?" "물고기들 포식하게 해주시오." 장교의 명령에 북한군은 2인 1조로 나누어 시신을 강에 던졌다. '풍덩' 소리와 함께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우익가족들이 청평호에 수장되는 순간이었다. 시신들이 모두 가라앉자 북한군들은 북쪽을 향해 노를 저었다.

잠시 후 한 중년 여인이 시신들이 가라앉은 곳을 향해 헤엄쳐 왔다. 강 속으로 잠수한 이 여인은 남편을 찾아 한 팔로 남편의 목을 감고, 다른 팔을 부지런히 움직여 헤엄쳤다. 이 여인이 강 밖으로 나왔을 때는 몸을 까딱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여인은 죽기 살기로 남편의 입을 벌려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인공호흡을 시도한 지 한참만에 남편의 목에서 '쿨럭' 소리가 나며 물이 쏟아졌다. 남편은 다리 여러 군데에 총상을 입었지만 천만다행으로 급소에는 맞지 않았다.

남편이 살아난 상황을 확인하고 이 여인은 혼절했다. 새벽에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발견된 이 부부는 주민들의 간호로 목숨을 건졌다. 아내의 사투(死鬪)로 목숨을 건진 이는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심종한이다.

이렇듯 후퇴하는 북한군이 우익인사 및 그 가족들을 집단학살하면서 이념대립은 극에 달했다.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양방마을은 '설악면의 모스크바'로 불리웠으며 경찰과 우익단체의 눈엣가시로 인식되었다.
 
생매장
 

이봉열의 모친인 유씨 ⓒ 박만순

 
1950년 9월 27일, 그해 추석 다음날 지서 경찰들과 대한청년단원들이 양방마을에 들이닥쳤다. 둘째 외삼촌 유제을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봉열은 "빵" 하는 소리에 기겁을 했다. 이윽고 "나와" 하는 소리에 방 안에 있던 가족들이 전부 마당으로 나갔다. 총을 든 경찰들과 몽둥이를 든 대한청년단원들이 눈을 부라리며 유제을 가족과 이봉열을 쳐다보았다.

"이 빨갱이새끼들 전부 묶어!" 마당으로 나온 가족들은 해명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은 채 묶여 길가로 나왔다. 마을 한길로 나오니 동네 사람 수십 명이 있었다. 부역자 집안으로 찍힌 이들은 몸이 꽁꽁 묶인 채 설악면 면소재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때 가족들과 같이 이 대열에 끼이게 되었던 이봉열(84세, 서울시 중랑구 신내동)은 "당시는 경찰이나 군인보다 한청(대한청년단) 놈들이 더 무서웠어요, 머리에 흰 띠를 두른 한청 놈들은 부역자 가족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며 쥐 잡듯 했어요"라고 당시 상황을 회고한다.

20리(8km)를 걸어 도착한 곳은 금융조합(농협의 전신) 창고였다. 지서 옆에 있던 금융조합창고에 갇힌 이들은 뭇매와 고문을 당했다. 한 사람씩 취조 당했는데, 어른들이 먼저 불려 나갔다. 삐삐선(군용전화선)으로 맞은 이들은 이내 피칠갑이 되었다. 창고에 감금된 지 일주일 만에 이봉열이 불려 나갔다.

이봉열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오줌을 지렸다. 이봉열에 이어 나이 어린 소년들이 불려 나왔다. "너희들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풀어 준다. 이제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살아! 다시 한 번 빨갱이 짓 하다간 죽을 줄 알아!"

이봉열이 풀려나고 다음 날 이봉열의 어머니 유(柳)씨(1908년생)도 풀려났다. 유씨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설악면 창의리 친척 집으로 갔다. 그런데 너무 심한 고문 탓에 당일 저녁 절명했다. 1950년 10월 초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이봉열은 창의리로 가려고 했는데, 대한청년단원 김필주(가명)가 못 가게 막았다. "빨갱이 새끼는 마을을 이탈해서는 안 돼"라는 소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결국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이웃 마을에 가지 못한 것이다. 당연히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금융조합 창고에 마지막까지 갇혀 있던 이들은 방일리 한 가옥으로 이동되어 구금되었다. 적산가옥으로 분류된 집이었다. 북한군 점령 시절 북한군을 도왔다는 혐의를 받은 이들은 부역자로 규정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압류되었다. 특히 가옥은 적산가옥으로 분류돼 첫 번째 압류조치 대상이 됐다. 적산가옥으로 분류된 집을 무단 점령한 경찰과 대한청년단원들은 소위 '부역자 가족'들을 짐승 취급했다.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부역자 가족'들을 발가벗겨 용문산에서 죽은 이의 장례식에 끌고 가 곡(哭)을 하게 하는 반인륜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그 사건이 있은 후 며칠 후에 경찰과 대한청년단원들은 '부역자 가족'들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된고뎅이 골짜기로 끌고 갔다.

'부역자 가족' 약 20명은 파놓은 구덩이에 들어갔다. 죽음의 골짜기에 들어온 것임을 눈치 챈 이들은 통곡을 시작했다. 이윽고 통곡하는 이들에게 흙이 뿌려졌다.

"악!"
"엉엉."
"아이고."

소리는 흙에 묻히고 약 한 시간 만에 20명이 생매장 당했다.

그런데 생매장 당한 이들은 북한군 점령시절 부역활동을 했던 이들이 아니다. 소위 '부역'한 이들은 군·경이 수복하면서 모두 달아난 뒤였고, 그들의 가족이 끌려온 것이다. 그렇기에 청·장년은 거의 없고 노인, 여성, 아이가 대다수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상처는 계속되고
 

현재 경기도 가평군농협(금융조합 창고 터) 설악지점 자리에 선 이봉열 ⓒ 박만순

 
그해 겨울 난리에는 미군 폭격으로 인해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다. 미군이 방일리 양방마을에 휘발유를 뿌리고 네이팜탄을 투하해 가옥 1/3이 불타버렸다. 양방마을 유용상의 동생은 하반신 장애인이었는데, 겨울 난리 피난 때 추위와 병마로 목숨을 잃었다. 겨울 난리에 참전한 중공군들 중 가평군 설악면까지 왔던 이들 상당수가 사망해 시체가 길거리에 즐비했다. 마을 노인들이 동원돼 중공군 시신을 수습해 매장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상처는 계속됐다. 양방마을 민○○(여)은 부역자의 아내로 규정되어 면 소재지 대한청년단원 모씨에게 강제로 개가(改嫁)당했다. 이봉열의 이모부는 북한군 점령시절 활동으로 강원도에 도피했다가 검거되었다. 그는 4년형을 선고 받고 춘천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되었던 이모부는 이봉열에게 편지를 써 면회 오라고 했지만 이봉열은 면회 한 번 가지 못했다. 부역자 가족들을 발가벗겨 상가(喪家)로 끌고 가고, 결국 된고뎅이에서 학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김필주(가명)가 이봉열이 면회 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김필주는 당시 마을 구장(이장)을 맡고 있었다.

이봉열은 한국전쟁 이후 냉가슴만 앓았다. 누구에게 억울하다 하소연 한 번 못했다. 억울하다고 하기는커녕 '빨갱이 집안'이 돼 반듯한 직장을 얻을 생각을 애초에 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69년의 세월이 흘러 2019년 2월 설 연휴였다. 아내의 산소에 가족들이 성묘하러 가는데 아들 이재영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옛날 이야기가 나왔다. 아들 이재영이 "어머니는 결혼 전에 어느 마을에 살았어요?"로 시작된 대화는 6.25 때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이봉열 외가 이야기로 접어들면서, 외삼촌이 '빨갱이'로 오해받아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했다. 아들 이재영은 더욱 자세하게 묻기도 머쓱했다. 이봉열도 마음속 이야기를 다 풀어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9년 3월 5일 아들과 함께 찾아온 기자 앞에서 69년 전 전쟁의 상처를 모두 드러냈다. 가족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처음 풀어 놓은 것이다.

이봉열의 가슴에 남은 상처가 이번 취재 과정에서 약간은 치유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대로 된 치유는 국가가 나서서 정확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유씨와 된고뎅이에서 죽은 20명, 숯가마에서 죽은 4명, 청평호에서 수장당한 이들(인원 미상)도 모두 진상규명되어, 망자의 안식(安息)을 기원하고, 유가족의 눈물을 씻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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