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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1.17 15:24 수정 2020.01.17 15:24
아내와 처음 만나 해외 신혼여행까지 대략 2년 걸렸는데 와인과 처음 만나 해외직구까지는 고작 두 달 걸렸다. 금사빠 아니 금와빠, 홀려도 단단히 홀렸지. 관세에다 한-EU FTA까지 살펴보며 해외에서 와인 모셔오는 일에 익숙해진 2016년 봄의 어느 날. 네덜란드의 유서 깊은(1907년 설립) 모 와인 전문매장에서 보낸 와인 네 병이 UPS를 통해 서울 변두리 모처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중 한 병이 바로 문제의 이 와인이었다.
 
엠 샤푸티에 코트 로티 라 모도레(M. Chapoutier Côte-Rôtie La Mordorée) 2006
 
쉬라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다. 엠 샤푸티에M. Chapoutier는 회사명, 코트 로티Côte-Rôtie는 포도 재배지역명, 라 모도레La Mordorée는 와인 이름. 굳이 이 와인을 네덜란드에서 공수한 이유는 2006년 빈티지가 로버트 파커 96-98점, 와인 스펙테이터 95점으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면 심사숙고했을 텐데. 쉬라는 여타 품종에 비하면 타닌이 강하고 드세어 내 취향과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는 포도 품종의 특성과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점수만 좋다면 물불 안 가리고 마셔보던, 걷잡을 수 없는 시기였다.
 

엠 샤푸티에 코트 로티 라 모도레(M. Chapoutier Cote-Rotie La Mordoree) 2006 ⓒ 고정미

 

엠 샤푸티에 코트 로티 라 모도레 2006 병 입구를 밀랍으로 봉인한 것이 특징이다. ⓒ 임승수

 
하여간 네덜란드에서 비행기 타고 일부러 나를 만나러 온 놈들이니 얼마나 반가웠겠나. 얼른 포장을 뜯고 하나씩 눈인사를 하는데, 사진에서 보이듯 이놈의 주둥이가 심상치 않다.

와인은 대부분 코르크 마개가 꽂힌 주둥이를 알루미늄 포일로 감싼 형태인데, '라 모도레'는 누군가 포일을 실수로 벗겼다가 임시방편으로 막은 듯한 외관이었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병 주둥이를 어설프게 감싼 누리끼리한 물체가 뭔가 싶어 조심스럽게 만져 보니 질감이 딱 밀랍이다.
 
'어떻게 유서 깊은 와인 전문매장에서 이런 물건을 팔 수 있는 거야?'
 
당장 사진 찍어서 항의 메일 보낼까 하다가 일단 심호흡 후 관련 정보를 검색했다. 그제야 밀랍으로 봉인하는 와인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산소 유입 등으로 인한 와인의 변질(산화)을 확실하게 차단하기 위해 코르크 마개 위에 밀랍 봉인을 한 것이다. 이미 코르크 마개의 밀봉 효과는 검증되었지만, 일종의 확인사살인 셈이다.
 
밀랍이니 불로 녹이는 게 나을지 아니면 그냥 긁어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 그냥 칼로 긁어냈다. 코르크를 제거한 후 와인에 밀랍 부스러기가 섞일까 봐 병 입구 주위를 깨끗이 닦고 잔에 따르니 큰 문제는 없었다.

일부러 비행기 태워 공수한 녀석치고는 맛이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지금이야 와인 탓이 아니라 쉬라 품종을 선호하지 않는 내 취향 탓이라는 것을 안다. 이런 시행착오 없이는 내 취향을 알 수 없을 테니 수업료가 비싸다는 점을 제외하면 후회는 없다. 어쨌든 '라 모도레'는 맛이 아닌 의외의 곳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 뒤로 밀랍 봉인 와인은 만나지 못했다.
 
물론 밀랍 봉인이더라도 기본적으로 코르크 마개를 사용한다. 와인 마개는 산소나 수분 등의 유입을 차단해 와인의 변질을 막는다. 코르크는 가볍고 탄성이 뛰어나며 불에 잘 타지 않고 썩지도 않아 와인 마개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하지만 단점도 있는데, 코르크에 번식하는 곰팡이 때문에 간혹 와인이 변질되기도 한다. 이렇게 변질된 와인을 코르크화(Corked)되었다고 하는데, 와인이 코르크화되면 과실 향이 약해지고 젖은 신문지 같은 눅눅한 냄새가 난다. 코르크화 와인은 전체 와인의 3~5%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적지 않은 비율이다. 특히 질이 낮은 코르크를 사용했을 때 상대적으로 코르크화 현상이 더욱 빈번하다.
 
요즘에는 코르크 마개의 대용으로 스크류 캡을 사용하기도 한다. 코르크보다 열기도 쉽고 비용도 저렴하며, 곰팡이로 인해 와인이 변질될 일도 없기 때문이다. 스크류 캡 사용률은 아직 전체 병 와인의 10%에 미치지 못하지만, 뉴질랜드와 호주는 와인의 스크류캡 밀봉률이 각각 93%와 75%에 이를 정도다. 그렇지만 장기간 밀봉 효과에는 의문을 표하는 경우가 많아, 오랜 숙성 기간이 필요한 고급 와인에는 여전히 코르크 마개를 사용하는 실정이다.
 

뉴질랜드 피노 누아 와인 '발리' Valli Pinot noir 2006 ⓒ 고정미

 

뉴질랜드 피노 누아 와인 '발리' 뉴질랜드 와인은 마개로 스크류 캡을 주로 사용한다. ⓒ 임승수

 
맞다! 그러고 보니 스크류 캡 와인과도 사연이 있구나.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와인이 마침 스크류 캡이었다. 마시려고 마개를 잡고 돌리는데, 아무리 힘을 줘도 안 돌아가는 것 아닌가. 참이슬 소주병 딸 때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돌아가던 놈이 병 안의 내용물이 바뀌었다고 버티는 건지 꿈쩍도 없다.

억지로 힘을 주다가는 자칫 유리로 된 병목이 깨지겠다 싶어, 펜치와 니퍼를 동원해 스크류 캡을 강제로 뜯어내고 성질 팍팍 내며 마셨다. 심지어 와인도 맛없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참이슬 소주와는 여는 방식이 달랐던 것 아닌가. 그 와인은 스크류 캡 구조물 전체를 아랫부분까지 움켜쥐고 한꺼번에 돌려야 열리는 구조였다. 무식 탓에 공구까지 동원하며 생고생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허탈한 한숨만 나온다.
 
어느 날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와인 관련 문의 사항이 있을 때만 주로 연락이 오는 지인이다.
 
"형님! 제가 와인을 샀는데 스크류 캡으로 되어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아무리 돌려도 안 열리는 거예요. 펜치로 억지로 뜯어내고 마시는 중인데요. 이거 불량품 아닌가요?"
"그거 소주처럼 따면 안 되고 스크류 캡 구조물 전체를 손으로 감싸쥐고 돌려야 열리는 거예요."
"아이고! 그렇군요."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힐링의 순간이었다. 얼마 전 2020년 새해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셀러에 보관 중인 좋은 와인을 하나 꺼내 마셨다. 샤토 랭쉬 바쥬(Château Lynch-Bages) 2000년 빈티지. 프랑스 보르도의 포이악 지역 와인인데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유독 편애한 와인으로 유명하다.

무엇보다도 보르도의 2000년 포도 작황은 역대급이라 할 만큼 좋았다. 호주머니 사정이 빤한 소시민 와인 애호가에게 숙성 잠재력이 뛰어난 그레이트 빈티지 와인을 20년 묵혀서 마시는 일은, 배우자의 등짝 스매싱을 예감하며 특별한 날에나 감행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경건한 마음으로 알루미늄 포일을 제거하고 코르크 마개에 조심스럽게 스크류를 박으며 기원했다, '제발 부러지지 마라. 제발 부러지지 마라.' 오래 숙성된 와인은 코르크가 약해져서 부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코르크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아소(Ah-So)'라는 (집게 모양의) 코르크 오프너를 사용하기도 한다. 갓난아기를 달래듯 조심조심 코르크를 끌어올렸는데도 결국 중간에 부러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거의 다 올라와서 부러진 터라 병목에 남아있는 코르크에 재차 스크류를 박아넣고 무사히 꺼낼 수 있었다. 이날 샤토 랭쉬 바쥬 2000년 빈티지는 코르크 파손에 놀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휘모리장단으로 시시각각 변하며 무지개와도 같은 맛과 향의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제기랄! 맛있어도 너무 맛있다. 그렇지 않다면 비싼 와인에는 절대 손대지 않을 텐데. 나는 오늘도 이성의 끈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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