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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1.27 09:29 수정 2019.11.27 11:03
저널리스트로 평생을 살아온 정연주 전 KBS 사장이 격주 수요일 '정연주의 한국언론 묵시록'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 연재는 한국 언론에 대한 고발이자, 몸으로 경험한 '한국 언론 50년의 역사'입니다. [편집자말]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바라본 대법원 청사. ⓒ 권우성

 
2008년 10월 2일 오전 10시에 열리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대한 법률위반(배임)' 형사재판 1심 첫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서초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나는 불구속 상태에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서초역 8번 출구를 나와 법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 길을 3년여 동안 걷고 또 걸었다. 1심, 2심 때는 2~4주에 한 번 재판이 있을  때마다 이 길로 다녔고, 상고심 때는 최종 판결이 내려지던 날, 맞은편 대법원 법정으로 갔다.

그 길은 고통, 분노, 억울함이 한 데 엉켜 있는 사법 고문의 길이었다. 더구나 '왜 이런 엄청난 사회적 낭비가 있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3년여 재판을 받는 동안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피고인 나는 6천여 쪽에 이르는 검찰의 수사 관련 기록을 모두 읽고, 이해해야 했고, 그 밖에도 챙겨 봐야 할 자료들이 참 많았다.

재판 때 사건 관련 증인 신문 준비를 위해 변호인단과 매번 회의를 해야 했다. 나뿐 아니라 재판부, 변호인들, 검찰, 증인 등 모두 재판 준비를 위해 참으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다. 그 사회적 비용은 참으로 컸다.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자 그들이 원하는대로 내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죽음의 북소리는 언론에서부터
 

2008년 1월 24일 자 <경향신문> ⓒ 경향신문

 
2007년 말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나에 대한 퇴진 압박의 큰 파도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늘 그러하듯 죽음의 북소리는 언론에서 먼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국일보>는 그해 12월 24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방송계에서는 KBS 정연주 사장의 거취가 가장 주목된다. 정 사장의 임기는 2009년 11월까지다. 그러나 한나라당 관계자는 "지금까지 대통령이 바뀌었을 때 KBS 사장이 바뀌지 않은 적이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교체설에 비중을 둔다.

해가 바뀌자 이곳저곳에서 나의 퇴진 얘기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그때 유독 한 인사의 발언이 눈에 띄었다. 언론학자 출신이자 한나라당 추천 몫으로 방송위원회 위원이 된 김우룡 위원이 1월 23일 <경향신문>과 가진 인터뷰 내용이었다.
 
"KBS 정연주 사장이 사퇴하지 않으면 변화를 가늠할 수 없는, 판을 뒤엎는 초강수가 나올 수도 있다."

김우룡 방송위원의 예언대로 과연 '판을 뒤엎는 초강수'는 이후 본격적으로 나왔다. 검찰, 감사원, 국세청, 방송통신위원회 등 국가기관이 총동원되어 잇따라 초강수를 두었다.

이에 앞서 조중동, 한나라당, KBS의 수구노조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나의 퇴진에 기름을 부어 넣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기도 전부터 그랬다. 2008년 2월 13일, KBS 11대 노조(새 노조 탄생하기 전의 구 노조. 당시 위원장 박승규)는 노보에서 내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을 실었다.
 
"소모적인 논쟁의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더 이상 KBS가 무너지는 상황을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무능을 고백하십시오. 미련과 아집을 버리십시오. 그동안 몸담았던 조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십시오."

2월 14일, 조중동이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로 응답했다. 그들에게는 참 좋은 먹잇감이었다. <중앙일보>는 '낙제점 정연주 사장 사퇴하라', <동아일보>는 'KBS 노조, 정연주 사장 퇴진 공개 요구'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다뤘다. <조선일보>는 그 다음 날 'KBS 노조까지 사퇴 요구, 코너에 몰린 정 사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2월 20일, 조중동의 맞장구에 힘을 얻은 듯 KBS 노조는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체제로 전환하고 "이제 KBS의 미래를 위해 정 사장은 사퇴하는 것이 옳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을 불과 닷새 앞두고 KBS 노조가 총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MB 정권과 수구노조의 노선이 비슷함을 보여준 셈이다.

조중동-KBS 수구노조-한나라당의 합주곡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한나라당과 정부 쪽에서 나의 퇴진 요구와 압박을 본격화했다. 3월 11일,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주요 당직자 회의에서 나를 포함하여 참여정부 때 임명된 인사들의 퇴진을 요구했다.
 
"지난 10년간 국정을 파탄시킨 세력들이 야당과 정부 조직, 권력 기관, 방송사, 문화계 학계, 시민단체 등 각계의 요직에 남아 새 정부 출범의 발목을 잡고 개혁을 방해하고 있다. 하루 빨리 사퇴하는 것이 옳다."

같은 날, <동아일보> 배인준 논설주간은 '노무현 식객들의 농성'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나를 비난했다.
 
그(정연주)는 언필칭 '국민의 방송'이라는 KBS를 좌파권력의 나팔수로 전락시켰다... '정연주식 버티기'가 국민 사이에 통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식객들은 한 정권이 끝나면 곧장 자리를 털고 사라질 줄 알아야 식객 자격이나마 있다.

3월 12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거들었다.
 
"산하 기관장들 중 분명한 철학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성향이 다른 새 정권에서도 계속 자리를 지키겠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뒤집는 것이다. 참여정부에서 임명된 문화 관련 기관장들은 이제 그만 물러가라."

같은 날, KBS 노조는 '정연주가 죽어야 KBS가 산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3월 13일, <조선일보>는 '밥자리에 매달리는 좌파 문화 기관장들의 얼굴'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문화체육관광부에는 11개 소속기관과 34개 산하기관이 있다. 노무현 정권은 이 자리를 정권과 좌파적 이념을 공유한 사람들로 메웠다... 이념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 선선히 자리에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

다음 날,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다시 나섰다.
 
"노무현 정권에서 그 정권의 이념과 철학에 맞춰 임명된 사람들은 정권 교체가 됐으므로 (새 정부가) 자신의 이념과 맞는 사람과 같이 일 할 수 있도록 사의를 표하고 재신임을 묻는 게 옳은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 하락은 정연주와 KBS 때문"
 

2008년 6월 17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장관회의 개막식에 참석하며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 청와대

 
3월 17일, 한나라당 심재철 원내 수석부대표가 주요 당직자 회의에서 "정연주 사장의 사퇴가 0순위"라고 밝혔다.
 
"정연주 사장으로 인해서 KBS가 국민의 방송이 아니라 정권의 방송으로 전락했다. 국민의 자산인 전파를 좌파이념의 선전도구로 전락시켰던 사퇴 0순위의 정연주씨는 임기제를 구실로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고 마땅히 자신의 거취를 정리해야 옳을 것이다".

3월 26일,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를 합쳐 거대 조직으로 탄생한 방송통신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취임한 MB 멘토 최시중 위원장은 취임하자 바로 김금수 KBS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들은 다음날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최시중 위원장은 "KBS 이사회가 정연주 사장을 권고 사퇴시키라"고 요구했다.

5월 3일,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김금수 KBS 이사장을 한 결혼식장에서 만나 나의 퇴진을 거듭 요구했다.

5월 12일,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김금수 KBS 이사장을 다시 만나 나의 퇴진을 다시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최시중 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은 정연주 사장과 KBS 때문"이라고 발언했다.

이런 발언 내용은 이날 저녁 김금수 KBS 이사장이 양승동 KBS 피디협회장, 김현석 KBS 기자협회장, 이도영 KBS 경영협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밝혔다. 이 자리에서 김금수 이사장은 류우익 청와대 비서실장이 자신과 인척 관계인 전 한나라당 의원을 특사로 보내 나의 퇴진을 요구했으며, 내가 퇴진할 경우 김금수 이사장에게 어떤 자리도 약속했다고 밝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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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