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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0.24 10:52 수정 2019.10.24 10:52
중국 역사학자이며 작가인 이중톈은 그의 저서 <품인록(인물 품평 기록)>에서 자신의 기준으로 중국 역사를 뒤흔들었다고 생각하는 다섯 명의 독불장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다섯 명은 항우, 조조, 무측천, 해서, 옹정제다. 그중 항우와 해서는 자신을 뜻을 펴는 데 실패한 인물이기에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조조와 무측천, 옹정제는 국가를 자신의 뜻대로 운영했기에 뭇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이 세 군주를 비난한 걸까.
 
중국 한자는 배우기가 어렵다. 그래서 1950년대까지 중국의 문맹률은 80%를 넘었다. 당연히 위의 세 군주를 욕하는 기록을 남긴 사람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관료들이다.

사실 중국 군주 전제시대 정치는 일반 백성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사서오경> 중 하나인 '예기'에 "대부(양반) 이상의 귀족 계급은 예로 다스리고 백성은 형벌로 다스린다"는 기록이 있다. '주권재민'이란 단어가 없었던 시대, 일반 백성은 그저 다스림을 받는 대상에 불과하기에 정치에 관심을 가질 기회도, 필요도 없었다. 세 군주는 왜 관료들의 미움을 샀을까?
 
조조
 
삼국시대 위나라를 운영한 조조는 '능력만 있으면 다 받아들인다'는 원칙으로 관료를 등용했다. 출신도 학력도 가문도 보지 않고 실력과 효율만 중시할 뿐이었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관습만 따르려고 하는 관료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능력 지상주의 조조의 관점에서는 능력만 있다면 그자가 불효를 저질렀든 도적질을 했든 상관없이 등용한다는 입장이었다. 그 당시 중국 문화의 전통적인 관념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인의와 충효이지 실력이나 공적 따위가 아니었다.
 
또 한나라 시대부터 황제의 통치 행정 조직으로 자리잡은 관료 집단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 시대 관료들은 자신들 나름의 독특한 행위규범, 관계와 호칭, 심지어 그들 계층만의 독특한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 집단의 공동 이익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황제의 이익과 그들 집단의 이익이 서로 일치할 때면, 그들은 황제를 지탱하는 튼튼한 기둥이 된다. 그러나 이익이 충돌하면 황제와 싸우거나 태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관료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집단적 이익을 지속 불가능하게 하는 조조의 능력 위주 인재 등용 정책에 협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역사서에 조조를 독재 군주라고 기록했다.
 
무측천
 
당나라를 폐하고 주나라를 건국하여 15년간 운영한 무측천 역시 출신, 문벌, 학력 등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중용했다. 주나라 초기 무측천이 중용하는 관료들은 대부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소인)들이었다. 무측천은 이런 관료들을 요긴하게 이용했다.
 
무측천 입장에서 이런 소인은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좋은 도구였다. 무측천은 권력 투쟁 시기 이들을 이용해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밀고하게 하는 통치를 하고, 권력 안정 시기에는 이들을 이용해 분쟁을 일으켜서 관료들이 서로 싸우느라 세력을 만들 여유를 주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소인은 다루기도 쉬웠다. 이들은 도덕에 대한 개념이 없으므로 매수하기도 쉬웠고, 자기만의 소신이나 의견이 없기 때문에 마음대로 지휘하기도 편했다. 또한 이들은 사회적 기반이 없으므로 자기들만의 세력을 만들 염려도 없고, 나중에 쓸모가 없어졌을 때 버려도 아깝지 않았다.
 
한마디로 관료들을 일회용 통치 도구로 이용한 것이다. 당나라 태종 시대까지 관료 집단을 형성하여 나름대로 세력을 가졌던 관료들은 주나라 무측천 시대에는 완전한 통치 도구로 전락했다. 그래서 역사서에 무측천을 독재 군주라고 기록했다.
 
옹정제
  

옹정제 초상화 ⓒ 바이두

 
청나라 시대 옹정제는 13년간 통치했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가 오래 사는 바람에 45세가 되어서야 황제가 되었다. 다른 황제들이 어린 나이에 세상 물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황제가 되었다면, 옹정제는 황제가 되기 전에 오랜 기간 청나라 관료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요즘 말로 하면 '준비된 황제'인 것이다.
 
옹정제의 관료 등용 원칙은 네 가지였다. 무사(無私), 충성, 청렴, 능력이다. 옹정제는 황제에 대한 충성보다 무사(사심을 가지지 말 것)를 중요시했다. 즉, 개인적인 사심(사회적인 명예와 부의 쟁취 목적으로 관료가 되려는 의도)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은 절대로 관료로 등용하지 않았다.
 
옹정제는 부패한 관료도 싫어했지만 평범한 관료도 싫어했다. 무엇보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제 일상만 보존하기 바쁜 관료를 가장 경멸했다. 국가가 관료를 임용하는 것은 단순히 그에게 밥을 퍼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제대로 일하지 않는 관료는 모두 파면시키고, 그 자리에 유능한 관료로 바꾸어야 한다고 옹정제는 생각했다. 그래서 관료는 옹정제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옹정제는 자신이 있었다. 그의 자신감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어리석은 군주가 아니었다. 게다가 황자(세자)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아버지 강희제보다 백성들의 삶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관료들이 무슨 속셈으로 무슨 짓들을 하고 다니는지, 그것이 어떤 폐단을 만드는지 그는 속속들이 꿰뚫었다.
 
옹정제 시대 관료들의 무덤 비문에는 청렴결백했다는 내용이 많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그렇게 내세울 만한 일이 아니다. 관료가 청렴결백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관료가 청렴결백하기는 쉽지 않다.
 
이 시대 관료들의 비문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은 옹정제가 관료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뇌물의 폐단을 근절시켰기 때문이다.

제도 개혁
 

중국에서 유행하는 옹정제가 모델인 현대 그림 ⓒ 김기동

  
옹정제가 아버지 강희제로부터 황위를 받은 1722년 청나라 국고에는 은자 800만 냥뿐이었다. 나라의 창고가 텅텅 빈 것이다. 이것도 장부상의 숫자일 뿐 실제로 조사하면 터무니없이 못 미칠 것이 분명했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가 죽고 황제가 된 지 한 달 만에 제도 개혁으로 국고를 채우기 시작해 5년 만에 5천만 냥으로 늘렸다. 옹정제가 즉위 한 달 만에 제도 개혁의 첫 조치로 중앙정부와 지방의 국고를 정확하게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먼저 중앙정부와 지방의 국고 세수 조사단을 임명했다. 후임자는 세수 조사단의 일원이므로 전임자의 과오를 책임지거나 전임자를 비호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 결과, 전임자의 전임자는 물론 그 전임자까지도 세수 적자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동안의 세수 전용과 세수 착복의 실상이 모두 드러났다. 전임자들에게 착복, 전용한 세수를 변상하도록 했고, 그렇지 않으면 가산 몰수 조치를 취했다. 이 가산 몰수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자식과 친척까지 포함했다.
 
그러자 세수 착복 협의가 발각된 후 변상이 두려워 자살하는 관료들이 생겨났다. 죄인이 죽었으니 모든 걸 덮어두는 게 인지상정이었지만, 옹정제는 이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자살한 관료의 자식들이 대를 이어 아버지의 착복 금액을 변상해야 했다. 그래서 관료들은 역사서에 옹정제를 독재 군주라고 기록했다.
 
<품인록>에서 이중톈은 "옹정제가 시행한 이 제도 개혁으로 부패 정치인은 자취를 감추고 정치 풍토가 깨끗해졌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며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사회의 기풍 자체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옹정제 연간에는 청렴하지 않은 관료가 없었다'는 말은 약간 과장됐더라도 옹정제의 치적에 대한 공정한 평가"라고 말한다.
   
옹정제가 재위 13년 58세에 갑자기 죽자 이제 한숨 돌렸다는 것이 관료들의 솔직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옹정제가 여성 검객에게 암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것은 관료 사이의 희망이 형상화된 것이라 보아도 된다.
 
1981년 옹정제의 묘가 발굴됐는데, 관에 안치된 그의 시신에는 놀랍게도 머리가 없었다는 말이 퍼졌다. 그러나 옹정제의 시신에 정말 머리가 없었는지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옹정제의 능묘 발굴은 이내 중단되었고 관은 아예 열어 보지도 않았다.
덧붙이는 글 [참고서적] <이중톈 국가를 말하다>, <이중톈 중국사 02 국가>, <품인록>, <제국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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