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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0.17 09:02 수정 2019.10.17 09:11

김정희 '묵란' ⓒ 황정수


오래 전부터 수묵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 소유하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인 명품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난초 그림의 3대 작가로 꼽히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 운미(雲楣)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난초 그림이다.

이 세 사람의 난초 그림은 다른 이들의 작품과 크게 차별되는 특징을 가지며 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조선후기 예원에 바람을 불러 일으켰던 김정희의 '추사란(秋史蘭)'을 가장 선호한다. 그러나 추사의 난초 그림은 좋기는 하나 그 수가 너무 적어 특별한 위치에 있는 극히 일부 사람만이 가질 수 있었다.

추사 난초의 맥을 이어 애호가들의 마음을 얻은 이가 대원군 이하응이다. 추사의 제자이기도 한 그의 난초 그림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함께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사람들은 이를 '석파란(石坡蘭)'이라 불렀다.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석파란을 찾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석파의 난초 그림도 좋아했지만 석파의 굳은 결기에 매력을 느껴 작품을 구하기도 하였다.

추사와 석파의 난초는 칼날같이 날이 선 듯한 강한 필력을 보인다. 이런 면은 매력적인 면도 있으나 사람에 따라서는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애호가들은 훨씬 부드러운 필치의 민영익 난초 그림을 좋아하였다. 이들은 민영익의 난초를 '운미란(雲楣蘭)'이라 부르며 '석파란'보다 높은 품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좋아하였다.

죽동궁 주인, 민영익의 파란만장한 삶
 

뉴욕에서 찍은 민영익 사진. 1883년 ⓒ 뉴욕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소장


민영익은 민태호(閔台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閔升鎬)의 양자로 입양된다. 그때부터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 이른바 '죽동궁(竹洞宮) 주인'이라 불리며 근대의 격동에 휘말려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죽동궁은 지금의 종로 관훈동에 있던 종친 가옥이다.

민영익은 187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 참의가 되며 벼슬살이를 시작하는데, 일찍부터 그의 집 사랑에는 개화당 인사들이 자주 출입하였다. 임오군란 때에는 민씨 척족으로 몰려 가옥이 파괴당하였으나, 군란 후에는 오히려 사죄 사절로 일본에 가서 개화 진행 상황을 살펴보기도 한다. 이때의 경험을 살려 통상 사무를 위해 중국 천진(天津)에 파견되기도 한다.

1883년 6월에는 주한 미국공사 부임에 답하는 친선 사절로 임명되어 미국을 방문한다. 이곳에서 수많은 선진 시설을 시찰하며 많은 것을 느낀다. 이러한 경험은 후에 한국에 우정국 설치, 경복궁의 전기설비, 육영공원 등을 설립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1884년에는 유럽을 경유하여 귀국하는 등 많은 해외 경험을 쌓는다.

1884년 민영익은 우영사(右營使)로 있으며 정치적으로 개화파를 압박한다. 그런데 그 해 김옥균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으로 전신에 큰 부상을 입는다. 그러나 묄렌도르프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미국인 의사 알렌(Allen, H. N.)의 치료를 받아 목숨을 구한다. 이후 복직한 민영익은 분을 못 참고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 등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파견한다.

1885년에는 임오군란 후 청나라에 유폐된 흥선대원군의 귀국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천진에 가서 대원군의 회국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듬해 1886년에는 정부의 친로(親露) 정책을 반대하다가 정치적 위협을 느껴 홍콩과 상해로 떠돌아다니다 귀국한다. 얼마 후 고종의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홍콩, 상해 등지로 또 다시 망명한다. 그 후 일시 귀국하였으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친일 정권이 수립되자 또 다시 상해로 망명하여 생의 마지막까지 그곳에서 지낸다.

민영익의 망명과 예술 활동
 

포화의 화제가 있는 민영익의 '묵란' ⓒ 황정수

 
민영익은 생부 민태호의 가르침으로 어려서는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실제 그의 예술 세계는 중국에서 망명하는 동안 그곳 서화가들과 어울리며 완성된다. 그는 상해에서 중국 부인과 살며 매우 좋은 집에서 살았는데, 그의 집에는 많은 중국 서화가들이 몰려들었다. 이때 그의 집 이름이 유명한 '천심죽재(千尋竹齋)'였다.

중국 서화가들 중 특히 오창석(吳昌碩, 1844-1927)과의 만남은 민영익의 예술을 진일보하게 하였다. 청나라의 대표적인 서화가인 오창석은 민영익에게 서화를 가르치기도 하였지만, 미술에 대한 식견을 넓히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민영익이 사용할 인장을 많이 새겨 주기도 하였다. 이는 한편으로 민영익의 삶이 그만큼 호사스러웠다는 의미도 된다.

난초와 대나무 그림에 능했던 서화가 포화(蒲華1830-1911)도 민영익의 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두 사람은 늘 가까이 하며 서화를 함께 하였다. 특히 두 사람은 난초와 화제를 나누어 함께 하기를 즐겼는데, 주로 민영익이 난초를 그리고 포화가 화제를 썼다. 그래서 현전하는 민영익의 그림에 포화의 글씨가 얹혀 있는 것이 많다. 이밖에 서신주(徐新周) 등 상해의 여러 서화가들과도 교유하며 많은 공부를 하였다.

민영익은 상해 서화가들과 교유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서화세계를 완성한다. 그는 난초 그림과 대나무 그림에 전념하여 청나라 화가들 못지않은 미술 세계를 이루었다. 특히 그의 난초 그림은 일세를 풍미하였는데, 너나 할 것 없어 '운미란(芸楣蘭)'이라 불렀다. 그의 난초 그림은 난 잎이 살찌고 마른 변화가 적고, 세 번 꺾어 그린다는 삼전법(三轉法)도 없이 난 잎이 곧으면서 힘 있게 곡선을 그린다.

이러한 난초 치는 법은 날렵한 기교를 보여주지는 않아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자극적인 매력은 적지만, 난초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외유내강의 기품을 살려 높은 격조를 보인다. 더욱이 추사나 석파는 먹을 아껴 마른 난초를 그리는 것에 비해, 민영익은 먹을 듬뿍 써서 촉촉한 느낌으로 그려 넉넉한 품격을 느끼게 한다.

이밖에 민영익의 그림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의 난초 그림 중에는 뿌리가 밖으로 드러난 '노근란(露根蘭)'이란 것이 있고, 대나무 그림 중에는 잎이 아래로 처지는 독특한 형식의 그림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양식은 모두 망명 생활을 하는 자신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대변한 것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한국 미술계에 끼친 영향
          

추사와 운미의 영향을 받은 서병오의 '묵란' ⓒ 황정수

 
민영익의 화풍은 김정희, 이하응의 '추사란', '석파란'과 함께 근대 한국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많은 서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지만, 특히 대구 출신의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5)는 중국으로 직접 찾아가 배우며 많은 영향을 받는다. 석재는 1898년과 1909년 두 번이나 방문해 민영익이나 상해의 서화가들과 직접 교유한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민영익의 묵란, 묵죽 화풍을 수용한 작품 활동을 하며, 많은 제자들에게 민영익의 화법을 가르친다. 그래서 서병오의 제자들인 김진만(金鎭萬), 서상하(徐相夏), 배효원(裵孝源), 서동균(徐東均), 이경배(李慶培) 등이 운미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서병오 중심의 화파 외에도 중국 화풍을 따랐던 김규진(金圭鎭)이나 김용진(金容鎭)의 작품에서도 민영익의 흔적이 느껴지며, 1920년 경 중국을 방문하였던 심인섭(沈寅燮)의 작품에도 민영익의 풍취가 많이 있다. 또한 최린(崔麟)이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활동했던 여러 서화가들이 민영익의 화풍을 따랐던 이가 많았음을 볼 때 민영익의 영향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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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