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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4.18 09:57 수정 2019.04.18 09:59

고희동 가옥 ⓒ 황정수

 
봄빛 완연한 날 창덕궁 왼쪽 담을 따라 원서동 길을 걷는다. 담 벽 위로 궁궐 건물의 지붕이 이어져 있고, 새 잎 돋는 나무의 가지들이 보인다. 천천히 10여 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길의 끄트머리쯤 햇빛 잘 드는 곳에 보기 좋게 자리 잡은 한옥 한 채가 있다. 빨간 벽돌로 단정하게 두른 담은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고, 뜰에는 오래 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이 집이 내력 있는 곳임을 느끼게 한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정원 바닥에 작은 자갈들이 깔려 있고, 한쪽으로 꽃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집의 외양은 전통 한옥 형태이나 내부는 실용적인 일본 가옥 형식을 절충한 개량 한옥이다. 집 정면에 '춘곡(春谷)의 집'이라는 나무 현판이 걸려 있어, 이 집이 '춘곡'이라는 사람이 살던 곳임을 알게 한다. 이 집에 살던 '춘곡'이라는 이는 바로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다.

이 집은 고희동이 직접 설계하여 지었으며, 1918년부터 1958년까지 40년간 생활한 곳이다. 그의 나이 32세 때부터 72세 때까지 지냈으니, 가장 중요한 시기를 모두 이곳에서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집은 한국 서양화 도입의 초기를 증언하는 매우 중요한 곳이라 할 만하다.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 유학생
      

도쿄미술학교 졸업 사진(마지막 중 오른쪽에서 세 번째). ⓒ 유족 제공

 
조선시대가 쓸쓸히 막을 내리고 해외 열강에 의해 근대화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미술계에도 새로운 변화가 찾아온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국, 독일, 일본 등을 통해 들어온 서구 미술사조이다. 비록 외래의 손길에 따라 소개된 서양미술이지만, 드디어 한국에도 서양미술의 존재가 나타나기 시작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일찍이 중국을 통해 서양미술의 존재를 조금씩 인지하긴 했지만, 한국에서의 실질적인 서양미술 활동은 이때쯤에서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서양화가들이 고종의 어진을 그린 것을 시작으로 일본인 화가들이 들어와 한국 화단을 장악하자 점차 한국인 중에서도 서양화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런 세태 속에서 처음으로 서양화가가 되고자 노력한 사람이 바로 고희동이다.

그가 서양미술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역관 집안 출신의 중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당시 역관들은 외국과의 외교와 통상에 직접 관계하여 새로운 문물에 적응이 빨랐다.

고희동은 14세 때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배운다. 그의 집안은 본래 중국어나 일본어를 전문으로 하였으나, 고희동은 새로운 시대에 맞춰 프랑스어를 배운다. 졸업 후 1904년 궁내부에 주사로 취직하여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에 종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고희동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관리 생활을 버리고 미술을 배우기로 마음먹는다.

당시 한국에는 미술을 배울 수 있는 기관이 따로 없었다. 그는 부친 고영철(高永喆, 1953-?)과 가까운 안중식(安中植, 1861-1919)과 조석진(趙錫晉, 1853-1920)의 집에 드나들며 한국의 전통적인 그림을 배운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던 고희동은 습득이 매우 빨랐다. 그러나 이미 서구 문화를 접하여 개화된 고희동의 눈에는 중국의 화보나 베끼는 동양화 공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궁내부에서 통역하며 보았던 서양화를 기억하고 이를 배우기 위해 유학하기로 결심한다.

마침 조선총독부에서는 식민지 경영을 위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일본에 유학 가기를 권장하였다. 특히 정치나 경제 등에 비해 감성적 성향이 강한 미술과 음악 등 예술 쪽을 권유하여 독립에의 의지를 줄이자는 의도도 있었다.

그래서 만든 제도가 '선과(選科)'였다. 선과는 외국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정규 시험을 면제시켜 입학시키는 제도였다. 선과로 유학을 가는 학생은 총독부에서 등록금을 지원해 주었다. 고희동은 1909년 일본 최고의 미술학교인 도쿄미술학교 양화과에 선과 자격으로 입학한다.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일이었다.

귀국 후의 활동
 

고희동 '산수' ⓒ 고은솔

 
고희동은 5년간의 서양화 수업을 마치고 1915년 귀국한다. 그는 일본에서 배운 공부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술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본인이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것처럼, 아직 한국의 현실은 서양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이 성숙해 있지 않았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고희동은 자신의 앞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 선구자들이 겪는 현실의 외로움 같은 것이었다. 실제 그는 훗날 당시 서양화가로서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여러 번 토로한다.

고희동이 그림을 그리려고 화구 박스를 메고 들로 나가면, 사람들은 화구 박스를 엿판으로 알고 엿장수가 왔다고 따라다녔다고 한다. 나중에 엿장수가 아니고 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또 왜 이런 점잖지 못한 것을 배워왔냐고 묻기도 하였다.

또한 튜브에서 짜는 유화물감이 마치 '고약'이나 '닭똥' 같다는 말도 하며 우습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겪는 데다 또한 서양화를 전공한 어울릴 만한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자 결국 고희동은 서양화 작업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고희동은 다시 동양화를 그리게 되며 미술계 활동을 활발히 한다. 그는 1918년 당시 서화계의 대가들과 중진들을 종용하여 한국 최초의 서화가 모임이자 근대적 의미의 미술단체인 '서화협회(書畫協會)'를 결성한다. 스승인 안중식을 회장으로 앉히고 자신이 총무를 맡는다. 고문은 이완용이 맡았다. 그러나 실질적인 운영은 일본 유학으로 선진적인 미술 조직의 운영을 배운 고희동이 주로 맡아 하였다.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강당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을 열었다. 이것이 대중을 상대로 한 최초의 근대적인 전시회였다. 한국 최초의 미술 잡지인 <서화협회보>를 창간하기도 하였다.

고희동은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제1회 전람회에 '정원에서'라는 제목의 유화 작품을 출품한다. 그러나 3회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를 거부하고 줄곧 서화협회만을 이끈다.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서화협회가 해산되기까지 고희동은 안중식, 이도영의 뒤를 이어 회장을 맡으며 민족진영 미술가들의 단합에 온 힘을 기울였다.

광복이 되자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우익 미술가들의 집결체인 조선미술협회가 창립되었을 때에는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오랫동안 심사위원장을 지내는 등 미술계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말년에는 정치에 관여하기도 하였는데, 부산 피난 시절을 전후하여 한국 민주당에 가입하였다. 4·19 혁명 이후에 민주당이 집권하자 참의원 의원을 지내며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미술인들의 권익에 앞장서고자 하였으나 5.16 쿠데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고희동의 현전 서양화 작품

고희동은 도교미술학교에서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 1866-1924), 오카다 사부로스케(岡田三郎助, 1869-1939),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 1867-1943) 등 일본 당대 최고의 화가들에게 미술교육을 받는다. 모두 유럽에 유학하여 자연주의와 인상파 기법을 배운 이들이었다. 고희동은 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특히 구로다 세이키의 영향을 많이 받아 객관적 대상을 부드럽고 섬세한 기법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그렸다. 

현재 전하는 고희동의 유화 작품은 세 점뿐이다. 모두 자신의 얼굴을 그린 자화상으로 도쿄미술학교 선생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들이다. 한 점은 도쿄미술학교 졸업 작품으로 그린 '정자관을 쓴 자화상'이며, 다른 두 점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그린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과 '부채를 든 자화상'이다.

당시 도쿄미술학교는 졸업자격 시험으로 자화상을 제출하게 하였는데, 고희동은 '정자관을 쓴 자화상'을 그려 제출하였다. 이 작품은 현재 모교의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나머지 두 점은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고희동 '정자관을 쓴 자화상' ⓒ 도쿄예술대학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과 '부채를 든 자화상' ⓒ 국립현대미술관

 
고희동의 자화상 세 점은 모두 내용상 공통적인 특이점을 보인다. 그림의 형식은 사용 매체나 제작 기법 모두 서양화 제작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림 속의 주인공은 여전히 한국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정자관을 쓴 자화상' 속의 자신은 푸른 두루마기에 정자관을 쓰고 있고,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에서도 같은 푸른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제작된 시기가 비슷한 작품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부채를 든 자화상' 속의 인물은 조금 나이 든 모습을 그린 것으로 모시 적삼에 삼베 바지를 입고 있다. 이런 그림 속 고희동의 모습은 개화되어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고는 있으나 한편으로는 전통을 버리지 못하는 선구자들의 문화 지체 현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고희동의 동양화 화풍 그림
             

고희동 '부산 영도해안' ⓒ 황정수

 
서양화를 많이 남기지 못한 고희동은 동양화를 다시 그리기 시작한 후 많은 동양화 작품을 그린다. 현재 남아 있는 고희동의 동양화 작품은 적지 않은 양이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품목은 산수화이다. 그의 산수화는 기본적으로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배운 남종산수화가 바탕이 되었으나 스승들의 그림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다.

고희동은 스승들로부터 배운 조선시대의 남종화에 도쿄미술학교에서 배운 서양화법을 더해 새로운 형식의 산수화를 그린다. 그의 그림은 사진 기법이나 원근법과 같은 서양화법이 구사되었고, 진한 채색 등 색채 감각에서도 서구식 수채화의 표현과 유사한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실제 그의 그림에 자주 쓰이는 진한 푸른 색조는 전통 산수화에서는 잘 쓰지 않는 채색 방법으로,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는 매우 이질적인 모습이다.
                     

고희동 '금강산 삼선암' ⓒ 고희동 가옥

 
산수화 중에서도 특히 금강산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해방 전 금강산을 좋아하여 여러 번 여행하며 데생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특히 만물상을 중심으로 기이한 봉우리를 주로 그렸는데, 소품 중에 뛰어난 솜씨를 보이는 것이 눈에 띈다. 이밖에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에도 능했으며, 괴석(怪石) 그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일부 학자들 중에 그의 그림이 "양식적으로는 독자성을 이루지 못하여 독립된 화가로서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고 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한동안 그의 작품이 발굴되지 않아 부족한 자료 속에서 내린 평가일 뿐이다. 실제 새로 발굴된 그의 작품들을 근거로 평가하면 정반대의 견해도 가능하다. 그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이유이다.

고희동에 대한 재평가 필요

고희동은 그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의 역사적 의미와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로서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 행정가로서의 성격이 강해 일부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더욱이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임에도 결국 서양화를 포기하고 동양화로 돌아온 화가로서의 정체성 문제는 더욱 그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치우친 평가는 그에 대한 화가로서의 평가라기엔 부족한 면이 있다.

실제 전하는 그의 작품들은 당대에 활동한 대표적인 화가들 못지않은 개성과 미덕을 가지고 있다. 원근이 살아 있는 생동감 있는 산수화나 뛰어난 색채감을 보이는 개성적인 화면은 다른 화가들에게서 보기 어려운 새로운 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은 현대에 와서 더욱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런 면에서 미술행정가로서 뿐만 아니라 화가로서의 고희동에 대해 더욱 정치하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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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