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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4.12 14:29 수정 2019.04.12 14:40
"전부 나와!"
"국민학교로 전부 모여!"

경찰과 군인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소리 질렀다. 그들의 기세는 등등했다. 그냥 목소리만 크고 위압적인 것이 아니라 살기(殺氣)가 있었다. 옷가지나 가재도구를 챙기는 것은 사치였다. 군·경은 단 몇 분간의 시간만 주고, 집 처마 밑에 불을 붙였다. 초가집은 '호르륵' 하며 순식간에 타버렸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집이 타는 것을 보며 눈물 흘릴 여유도 없이, 이호국민학교(제주읍 이호리)로 발걸음을 분주히 옮겼다.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이미 노형리 사람들이 와 있었다. 노형리도 며칠 전 모든 가옥이 불타버렸다는 소문이 바람결에 전해진 터였다.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회원들은 총과 몽둥이로 주민들을 겁박하며, 운동장에 마을별로 모일 것을 지시했다.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매서운 날씨였지만, 추위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두꺼운 외투는 고사하고, 이불이나 담요 등 추위를 막을 게 하나도 없었다. 1949년 1월,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전부 눈 감아."

교단에 선 군(軍) 책임자가 호령을 내렸다. 500여 명의 주민들은 운동장 한가운데 모여 앉았고, 주위에 군인과 경찰들이 에워쌌다. 운동장에 모인 주민들 중 남성 청·장년은 하나도 없었다. 군인과 경찰이 무서워 그들은 이미 피한 상태였고, 여성과 노인, 그리고 12세 미만의 아이뿐이었다.

"남편과 자식 중 한라산에 올라간 사람은 손들어!"

눈을 감은 주민들은 누구도 손을 들지 않고, 웅성거리기만 했다.

"탕!"
"시끄러워.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가족 중에 입산한 자들은 손들어."
 
손가락 재판

이번에는 웅성거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그저 추위와 공포에 질려 손과 발, 입술만 떨었다. "이 빨갱이 새끼들 안 되겠구만"하며 군 책임자는 마을의 한 청년을 데리고 주민들이 모여 있는 운동장 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군 책임자 뒤로는 군인과 경찰 십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마을 청년이 손가락으로 한 여성을 가리켰다. 군 책임자가 턱을 옆으로 하자, 뒤따르던 군·경이 그 여성의 양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아이고 하느님. 살려 주세요" 그 여성은 운동장 가장자리로 끌려가 앉혀졌다.

손가락질은 계속 되었다. 이른바 '손가락 재판' 이었다. 어떤 합법적인 재판도 아니고, '입산자 가족'이라고 하는 이들에게 자기를 변호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 손가락질을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2명의 여성과 아이, 노인들이 끌려나와,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들은 잠시 후 자신들이 죽을 것임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군 책임자의 턱짓에 군·경은 이들을 학교 옆 '임이밭'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는 어떤 설명이나 일장 연설도 없었다.

잠시 콩 볶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가족 중 남편과 자식, 그리고 아버지가 집에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빨갱이 집안', 아니 '폭도'로 몰려 학살된 것이다.

1949년 1월 13일 제주읍 이호리 오도롱 마을 사람이 겪은 '난리 아닌 난리'였다. 오도롱 사람들은 한 달 전인 1948년 12월 7일 마을 500미터 남쪽에 위치한 '호병밭'에서 또 하나의 '난리'를 겪었다. '입산자 가족'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주민 16명이 학살된 것이다.
 
살기 위해 입산
 

군경의 방화로 살 곳을 잃어 한라산에 오른 사람들을 표현한 작품. 강요배 <한라산 자락 사람들>(1992) ⓒ 박만순

 
제주읍 이호리 오도롱 사람들이 이호국민학교에서 참변을 겪을 때 김명훈(1946년생)의 큰아버지 김희선도 희생양이 되었다. 당시 김희선은 50대 중반으로 자녀가 며칠 전 한라산으로 피신한 상황이었다. 당시 50대 중반이면 '노인'으로 인식되었으나, 군·경의 눈엔 '빨갱이 자식을 둔 폭도'로만 보일 뿐이었다.

이 손가락 재판에서 김명훈의 아버지 김희교(1914년생)는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집이 불타면서 본의 아니게 한라산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즉, 제주도민 절대다수는 미군정과 대한민국에 저항하기 위해 한라산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마을이 불타면서 거주할 곳이 없어서 한라산행을 택한 것이다. 단순히 살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입산을 택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당시에는 죄가 있고 없음이 아니라, 보이는 남성 청·장년은 무조건 학살 대상이 되었다. 집안에 청·장년이 없으면 이는 다시 '입산자 가족'으로 분류되어, 방화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1949년 1월 중순 본의 아니게 입산했던 김희교는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선무방송만 믿고 자수해, 그해 4월경 산에서 내려왔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주정공장에 구금되었다. 아내가 면회를 가자, 남편은 "난 아무 죄도 없으니 조만간 석방될 거야"라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남편은 석방되지 않았고, 아내가 두 달 후에 주정공장을 다시 찾았을 때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 후 대전에서 엽서가 왔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산내에서 불법적인 학살을 당했다.

가장(家長)이 어이없는 죽임을 당한 후, 남은 가족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의도치 않게 이산가족이 되었다. 김명훈의 누이들은 제주와 부산의 공장으로 일하러 갈 수밖에 없었고, 어린 김명훈은 어머니와 함께 이호리에서 힘겨운 생활을 해야 했다. 주말마다 한라산에서 땔감을 해 5일장에 팔았고, 이모가 준 소를 키워 학비에 보탰다. 그는 이렇게 험난한 상황에서도 제주중학교와 제주상고를 나와 제주교대까지 마쳤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앞두었다.
 
거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김명훈증언자 김명훈 ⓒ 박만순

 
"김명훈씨 계십니까?"
"누구시죠."
"지서에서 나왔습니다."

경례를 한 이는 외도지서에서 나온 젊은 순경이었다.

"이번에 초등학교 선생님 발령이 나셨던디, 신원조회 나왔습니다."

김명훈의 가슴은 쿵쾅거렸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빨갱이', '신원조회' 하면 가슴 졸이며 겁부터 나던 버릇이 발동한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사실대로 아버지가 4.3 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죽었다고 했다.

"제주도경찰국에 보고해야 하는데, 4.3 때문에 죽었다고 하면 발령을 못 받을 텐데요..." 하는 것이 아닌가. 당시 1968년은 반공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그런 시절에 아버지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죽었다고 상급 정보기관에 보고된다면, 교사 자리는 물 건너 가는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김명훈은 마치 판결을 앞둔 죄수처럼 머리를 푹 숙였다. 30대 초반의 외도지서 경찰은 마치 자기 일처럼 한참을 고민하더니, "아버님 사망신고는 되어 있습니까?" "아니오." "그럼 잘 됐습니다." 김명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 되다니요?" 김명훈의 아버지 김희교가 2개월 전에 병으로 죽었다고 허위로 사망신고를 내자는 것이었다.

김명훈은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그것만큼 묘안은 없었다. 당시에는 6.25를 전후한 시기에 사망신고를 내면 군인이 아닌 한 '빨갱이 짓'을 하다 죽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다보니 한국전쟁 전후에 학살된 많은 이들이 사망신고를 실제 죽은 년도보다 몇 년 늦게 하거나, 아예 사망신고를 내지 않은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이 사망신고를 위조하자고 하니,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김희교는 1967년 12월에 집에서 병사(病死)한 것으로 사망신고서가 작성되었고, 덕분에 김명훈은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무사히 받을 수 있었다.

제주 4.3 때 경찰들이 주민들에게 저지른 악행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 후에 서북청년회를 포함한 육지경찰들은 대거 제주도 경찰에 편입되었다. 그들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했고, 수십 년 동안 제주도민들을 괴롭혀왔다. 그런데 4.3 사건 유족이 신원조회로 불이익을 받을까봐 사망신고를 위조하는 데 협력한 경찰이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거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만큼 고통 받은 사람은 없어요"

제주시 노형동에 살고 있는 김명훈씨와 한참을 인터뷰하고 있는데,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김명훈 아내 김차수(1947년생)가 끼어들었다. "4.3 때 나만큼 고통 받은 사람은 없어요."

남편 김명훈의 바로 옆 마을에 살았던 김차수가 겪은 4.3은 참혹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당시 제주읍 이호1리에 살았던 김차수 가족은 4.3의 풍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47년경 학생들이 데모할 때, 진압경찰은 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학생들이 무차별하게 폭행당하기 직전 김차수 오빠들은 두 팔을 들고 막았다. "학생들이 뭔 죄가 있다고 이러십니까?"

온 몸으로 경찰의 폭행을 막았던 오빠들은 4.3 직후에 마포형무소에 구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포형무소에 구속되었던 큰 오빠 김영수는 북한군에 의해 옥문이 열리면서 고향 제주도로 내려왔다. 하지만 한국전쟁 중에 제주도 정뜨르 비행장에서 학살되었다.

둘째 오빠 김택수는 마포형무소 옥문이 열린 후 북한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둘째 오빠가 고향사람들에게 "북으로 가니 걱정하지 마라"고 가족에게 전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소식을 모르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행방을 모른다.

김차수 아버지 김정익은 자식들의 활동으로 인해 고초를 겪은 경우다. 4.3 직후 목포형무소로 끌려간 김정익은 고문후유증으로 인해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형무소에서도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자 그를 내보냈다. 어렵사리 제주도 고향에 연락이 되어 동생이 제주항으로 마차를 끌고 마중을 나갔다.

"아이고, 형님." 동생이 형을 보았을 때 이미 형은 산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송장일 뿐이었다. 마차에 태우고 이불로 덮었지만 형은 집에 오는 동안 신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집에 돌아온 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사실 김정익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했을 때는 이미 김씨 집안에서 흘릴 눈물을 지닌 사람도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4.3의 광풍으로 남녀노소 없이 싹쓸이되었기 때문이다. 김차수의 첫째 올케(큰 오빠 부인)는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둘째 언니네 집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김차수의 둘째 언니 김이수와 형부 박영수(당시 초등학교 교사), 3세짜리 조카가 학살되었다. 당시 조카는 이름이 없어, 후일 비석에 '박아기'로 이름이 올랐다. 둘째 언니네 가족은 장소가 명확하지 않지만 죽창으로 공개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는 김차수가 어머니 홍종하에게 증언을 들은 것이다.
 
"우리 아기 탄다!"

김차수가 살았던 제주읍 이호1리가 군경에 의해 방화될 때의 상황도 무척이나 급박했다. 경찰이 초가집 처마에 불을 지르니, 지붕은 순식간에 타 버렸다. 그 순간에 언니 김덕수(당시 7세)는 맨발로 뛰어 나갔다. "사람 살려" 하면서 한참을 뛰었는데 갓난아기 차수가 생각이 났다.

"아이고, 우리 아기 탄다" 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초가집은 이미 반이 넘게 탔지만 7세 어린이가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덕수에게는 '동생 차수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불속에서 발견한 동생을 업고 변소로 뛰었다. 변소에는 돼지가 '꿀꿀'거리며 울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곳으로는 불이 번지지 않았다.

집이 불타고 간신히 살아남은 김차수 가족은 옆 마을인 도두리로 갔다. 도두리에서 사정을 해 간신히 방도 아닌 마루를 빌렸다. 그 마루에서 6개월을 살았는데, 그렇다고 마루 전체를 전세 낸 것이 아니었다. 4~5평 되는 마루에 4집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것이다. 한 겨울에도 마룻바닥에 지푸라기만 깔고 살았는데도, 가족 누구도 춥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해가 뜨면 마당에서 가족끼리 아침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아침식사는 마루가 아니라 마당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마루는 4가족, 20여 명이 식사 할 공간으로는 턱 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에 구세주 같은 이가 나타났으니, 제주읍내에 살고 있던 이모였다. 이모는 트럭을 보내 언니네 가족을 모두 읍내로 이사하게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사를 자유로이 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마치 '007 작전'을 하듯이 했다. 적재함에 실은 가구 안에 온 가족이 숨었다. 경찰들은 4.3 직후라 일주도로 곳곳에서 검문검색을 했는데, 다행히 걸리지 않았다. 그때 홍종하 언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홍종하 가족은 굶어 죽었을 것이다.
 
늦깎이 공부 시작해 문인이 되어

1947년생 김차수가 돌이 갓 지나 시작된 집안의 불행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그녀의 가방끈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상급학교에 진학은 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니 오빠 고등학교 보내는데, 너까지 (상급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 말이 엄청난 상처였지만, 당시에 오빠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여동생이 공장에 취직하거나 식모로 가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아니 1970년대까지 한국사회에서는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그렇다보니 그녀는 속울음을 울며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제주읍 외도에 있는 전분공장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경리 일을 보다가 편물공장으로 옮겼고, 다시 선거관리위원회로 가 7년을 일했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배운 회계 일이 이후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김차수는 막내아들이 대학교 4학년 때 큰 결심을 했다. 못다 한 공부를 해보자는 욕심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친 그녀는 정식 시험을 치러 한라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한라대학은 집에서 가까워서 선택한 학교였다. 그러다가 2012년에는 <창작수필>에 등단하여 현재는 문학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학업활동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 위기 때마다 격려를 해 준 이는 자식들이었다. "어머니가 하고 싶은 공부 하세요."
 

4.3 영문판김명훈의 장남이 번역한 4.3 영문판 ⓒ 박만순


자식들과 4.3을 소통한 지도 오래되었다. 2000년도부터 대전 산내에서 열린 합동위령제에 꼬박 참석했는데, 둘째 아들은 한양대학생 시절에 대전위령제에도 같이 참석한 일이 있었다. 큰 아들은 4.3 책자를 영문판으로 번역해 4.3을 전 세계로 알리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큰 아들은 아주대 영문과를 나와 2019년 현재 한라대 교수로 있다.
 
다시 김명훈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김명훈은 1968년에 집으로 찾아온 외도지서 순경을 잊을 수 없다. 벌써 51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 순경 덕분에 신원조회에 걸리지 않고 교사 발령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그 순경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김명훈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름도 알지 못하는 경찰이지만 평생의 은인이다.

사람다운 사람, 그 순경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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