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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26 12:02 수정 2019.03.28 14:56
올해 첫 국내 술 기행을 나섰다. 지난 3월 23일 일기예보는 좋지 않았다. "전국이 대부분 낮부터 늦은 오후 사이 비 또는 눈, 돌풍, 번개, 천둥 동반, 하지만 오후 6시면 모두 그치겠다"고 예고했다. 그래서 우산을 챙기긴 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충주로 떠난다. 오전엔 옹기를 굽다가 증류소까지 마련한 윤두리공방을 방문하고, 점심은 두루치기 쌈밥을 먹고서 잠시 충주호가의 탄금대를 서성이다가 오후에는 중원당 청명주를 방문할 예정이다. 모두 37명이 버스에 올라탔다.

벌써 봄 나들이를 나섰나, 고속도로를 들어서자 길이 막혔다. 우리가 탄 버스는 전용차선을 타고 가래떡 빠져나가듯이 막힐 듯 막히지 않고 길을 갔다. 충주시 엄정면 도자기길의 윤두리공방 입구에 내렸을 때, 하늘은 푸르렀다. 연기가 멀리 흩어진 듯한 흰빛이 있기는 했지만, 뭉친 구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푸른 하늘이었다. "뭐야, 일기예보하고는 딴판이잖아!" 하고 하늘을 비웃으며 윤두리공방엘 들어섰다.
 

발효 숙성 항아리를 설명하고 있는 이윤 대표 ⓒ 막걸리학교

 
이윤 윤서예 부부가 이름 속에 윤자가 둘이 들어있다고 윤두리공방이라 이름짓고 충주 도자기마을에 정착해 살고 있다. 이미 발효 숙성 항아리 '숙아리'로 이름을 얻었는데, 그 숙아리에 소주를 직접 담는 일까지 벌이게 되었다. 옹기를 만들고, 증류기를 다루는 남자 이윤씨는 자신이 술과 인연을 맺은 이야기를 하면 두 가지 것을 먼저 말한다.

하나는 삼해주 맛이 기가 막혀, 그것도 자신이 빚은 삼해주 맛은 세상 둘도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2006년에 술을 배우러 국순당 창업주인 배상면 회장을 찾아갔는데 자신더러 발효 숙성 항아리를 만들라고 권했던 일이다. 그는 그 뒤로 발효 숙성 항아리를 기획하게 되었고, 2011년부터 점토 배합을 달리하고 유약을 바르지 않고 물레를 차서 빚는 항아리를 출시했다. 직접 손발로 만들기에 그가 만든 항아리나 초병이나 술춘 들은 커봐야 팔이 들어갈 수 있는 깊이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항아리를 빚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항아리를 주문 받으면, 굽다가 주저앉거나 금이 갈 수 있어서 두세 개를 더 빚는다. 그 항아리들이 멀쩡하게 다 살아나오면 재고가 되고, 그 처리를 고민하다가 항아리에 술을 담으면 가치가 10배, 20배 커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술박물관 리쿼리움에 있는 프랑스 사랑트식 동증류기. ⓒ 막걸리학교

 
 

윤두리공방에 들인 동증류기. 가운데통에 술을 넣고 끓이면 오른쪽관을 타고 증류된 알코올이 올라간다. ⓒ 막걸리학교

 
그는 20년 동안 술을 빚어 차곡차곡 쟁여두고 난 뒤에 20년에 걸쳐 그 술을 나눠 팔면 그게 곧 연금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때 담기는 술은 유통기간이 정해진 막걸리가 아니라, 유통기간이 무궁한 소주라야 했다. 그래서 그는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게 증류 장비를 만든다는 독일 회사에, 그곳에서 손으로 만든 가장 작은 설비를 1억원 정도를 들여서, 주문한 지 1년 만에 받았다. 증류기 안에 담을 수 있는 원주(原酒)는 50ℓ 정도지만, 고압으로 물청소를 할 수 있는 시설이 붙어 있어서 하루에 8번도 증류할 수 있다.

그가 우리 일행에게 술을 내주었다. 술 한 모금, 술 한 잔에 모두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말문이 열린다. 이 순간에 이르기 위해 술 여행을 떠나온 것이다. 윤두리의 술 이름은 '주향'이다.

주향 25도는 아직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하는 순진한 신입사원 같다. 주향 41도는 당차다. 굳세게 목줄을 타고 내려서는데 끝은 부드럽게 사라진다. 55도는 소리친다. 한 모금 마시니 입을 다물고 있기 어렵다. 탄성과 함께 술맛이 감지된다. "우리는 너무 오래도록 감미료 소주에 길들여져 왔다. 소주에 속고 살았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데 자성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 여행이 예년과 달라진 점은 여자들의 참여 숫자가 남자들보다 두 배나 된다는 것이다. 나는 막걸리학교 강좌를 10년째 진행하고 있는데, 초창기는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두 배는 많았고 주도층도 40~50대 중년 남자들이었는데, 이제는 주도층이 30~40대 여자들로 바뀌었다. 이날 술 기행의 현장에서도 그 변화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 중년 여성은 내게 "술 맛을 알게 해주어서 감사하다"는 말까지 한다.

술에서 남성성이 흐려진, 이 변화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술은 격한 노동을 한 뒤에 마시는 난폭한 액체에서, 삶의 새로운 시선을 부여하는 부드러운 액체로 바뀌었다. 이성을 혼미하게 하는 물약에서, 감성을 깨우는 곡차로 바뀌었다. 곡물을 허비하는 부자들의 사치품에서, 곡물을 응용하는 발효 식품이자 요리가 되었다. 아, 이 모두가 공존하면서 새로움을 더하고 있다.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을 듣는다. 남자들은 술을 마시면 곧잘 나를 내세우는데, 여자들은 술을 마시면 남을 잘 받아들인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훨씬 덜 요란하다. 술이 여성들과 친해지면서, 술도 음식과 친해졌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딸이 등록해줘서 막걸리를 배우고 있는 여성은 술을 배워 딸에게 가르쳐줄 예정이라고 했다. 독일인과 혼인한 여성은 독일에 가서 작은 막걸리 양조장을 차리겠다고 했다. 여성들이 술을 좋아하면서, 마시는 것 말고 다른 이유들이 늘어났다. 술을 생산이나 소멸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술을 응용하는 시선이 확장되고 있다.

윤두리 공방의 이윤씨는 아내와 함께 술을 빚는다. 그는 무거운 항아리를 빚으면서 술까지 빚는다. 그가 보여주는 것처럼 술 빚는 노동은 혼자서도 가능하다.

한국 술은 본디 부엌에서 시작된 여성들의 노동 산물이었다. 권력이 개입하면서 세금이 붙고, 자본이 개입하면서 남성성이 강화되었다. 소규모 주류제조 면허도 생겨나면서 수제품 술을 찾는 소비자들도 생겨났다. 집단 체조 같던 술 마시기에서 벗어나 개인화된 혼술과 개성화된 홈술 문화와도 만나고 있다. 혼자 살거나, 한둘만 낳아 기르던 자녀가 빨리 품을 벗어나버려, 새로운 삶의 방편을 종교가 아닌 사회 속에서 찾으려는 중년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청명일에 마시는 술 청명주

윤두리 공방에서 우리는 지갑을 털렸다. 막걸리 양조장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발그레해진 낯으로 도자기마을을 나서는데 하늘에 흰 구름이 가득 몰려든다. 술 마시기 전에는 하늘이 푸르렀는데, 술을 마시고 나니 "하늘이 이렇게 좁았던가" 싶게 구름이 차올라 푸른색을 지워버렸다. 점심에 밀양 단장 막걸리 대표가 가져온 막걸리 한 상자를 반주로 마시고서, 소화도 시킬 겸 충주호가 내려다보이는 탄금대를 걸으려 했으나 찬바람과 빗방울이 가로막았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일기예보가 들어맞았다.

급히 우리는 충주 중앙탑 공원에 있는 술박물관 리쿼리움으로 방향을 틀었다. 술의 신 바커스, 천년도 넘게 지중해에 잠겨 있던 포도주병 암포라, 와인을 증류하던 사랑트식 동증류기, 천사의 몫이 되어 날아간 위스키를 보여주는 오크통, 고두밥을 찌면서 솥에 물을 부을 수 있게 고안된 대형 질시루, 이 모든 유물들을 모았을 이종기 대표의 환희와 고단함을 보고 느끼면서 리쿼리움 카페로 올라오니, 창밖 충주호에 눈이 내린다.

아침 하늘이 맑더니, 눈이 날리다가 진눈깨비로 흐려진다. 아침엔 봄을 노래하더니, 낮에는 봄을 질투한다. 술에 취한 듯 변덕스런 날씨에 우리는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다시 술 향기를 맡고 싶어 약속된 중원당 청명주로 향했다.

청명주는 하늘이 청명해진다는 청명일에 마시는 술이다. 집안 어른이 쓴 <향전록>에 제조법이 나오고, 집 앞 남한강 나루터에 전해오는 술이기도 하다. 마을 창동리에서 흘러내린 물이 남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인 수살매기 수면의 3자 3치 밑에서 물을 길어다가 술을 빚었다고 한다.

 

청명주를 소개하고 있는 김영섭 대표 ⓒ 막걸리학교

 
대를 이어 청명주를 빚는 김영섭 대표는 2007년 32살에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가장 젊은 나이에 술로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되었고, 이즈음에는 인스타그램을 가장 열심히 하는 젊은 장인으로 통한다. 말수가 적은 충청도 사나이인데, 이제는 "아버지가 술 담는 것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셨지만,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으셨다"고 농담까지 할 정도로 유연해졌다.

언덕을 파고 들어간 자리에 양조장을 넣고 넓은 유리창을 만들어 발효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발효실에는 160ℓ 크기의 우람한 항아리들이 가득하다. 무거운 항아리는 바퀴가 달린 나무판 위에 올려놓고 움직인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약주 청명주에 탁주 청명주를 보태서 지난해엔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이 봄에 새롭게 55도 청명주 증류주도 선보일 예정이다.

탁주 청명주는 달콤하다. 밥맛에서 배어나오는 단맛이 입안에서 풍선처럼 확대되어 느껴진다. 요거트 같은 질감인데 끈적거리지 않고 날렵하고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서 잔 맛이 입안에 오래 남지 않는다. 황금빛이 도는 약주 청명주는 알코올 도수 17도인데도 독하지 않고, 묵직하지만 달지 않고, 액체임에도 입안에 씹히는 것처럼 풍부한 술맛을 지니고 있다.

한 잔만 마셔야지 하는데도, 자꾸 술잔을 내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증류한 소주 55도짜리는 입안에서 북소리처럼 울려퍼진다. 술맛이 머뭇거리지 않고 선명하다. 전통 누룩을 바탕으로 만든 증류주의 강한 힘이 느껴진다. 세찬 바람에 밀리듯이, 그 술맛에 사람들이 밀린다. 잠깐 사이에 우리는 10병도 넘게 술병을 비웠다. 그런데도 취하는 사람은 없고, 합창을 하는 것처럼 요란한데, 튀는 목소리가 없다. 술이 지휘자다. 술에 시큰둥한 사람, 술에 뒷걸음치는 사람이 없어, 술 기행은 두려운데 설렌다.
 

중원당 청명주 마당에 핀 매화 ⓒ 막걸리학교

 
윤두리는 둘이라지만 중원당 청명주는 혼자 술을 빚는다. 술은 혼자서도 빚을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배우기도 간단하다. 요리 하나를 배우는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장인들은 비법을 좀체 말하지 않는다. 쉽게 따라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허투루 듣는 얘기지만 술은 조금 마시면 몸에 좋다고 하고, 허황된 얘기지만 몸에 좋은 술도 있다고 한다.

분명한 건 술은 나누기 좋은 음식이다. 빚어서 내가 먹을 수도 있고, 응원하는 이들이 늘어나면 창업할 수도 있다. 기호식품인지라 모두의 입맛에 맞출 수는 없지만, 누군가의 입맛에는 맞는다. 오죽했으면 세상에 가장 맛있는 술이 '공술'이라고 하지 않던가. 공짜로 주면 모두가 맛있다고 하니, 술맛은 뜻밖에 겨누는 과녁이 넓다.

허우대가 좋고 성격도 편안한 청명주 김영섭 대표가 연신 핸드폰 카메라로 우리를 찍는다. 우리의 모습이 인스타그램에서 #청명주를 타고 퍼져나갈 것이다. 소문은 물 위에 번지는 파문과 같아서, 돌을 던지듯이 누가 말을 해야 퍼져나간다. 예전에는 누군가 돌을 던져주기를 바랬지만, 이제는 스스로 돌을 던져 파문을 만들 수 있다. 혼자 술 만들면서, 혼자 술 마시고, 혼자 핸드폰 통신 놀이를 하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 기이하고 요상하고 섬뜩한 세상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데 술에 취해 깜뿍 잠에 취했다가 창밖을 보니, 다시 붉은 햇살이 나고 아침보다 더 푸른 하늘이 열린다. 날씨가 도대체 왜 이런 것일까? 날씨도 봄을 타나, 술에 취했다 깼다가 다시 취하는 오늘 내 모습 내 마음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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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평론가, 여행작가. 술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술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막걸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