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0
1,000
등록 2018.10.12 14:27 수정 2018.10.12 14:27
 

약산 김원봉 장군약산 김원봉 장군은 1920년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을 창설한 인물이다. 1930년대엔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운 뒤 애국지사를 직접 길러냈다. 이후엔 항일운동의 선봉을 맡았던 조선의용대를 창설, 총대장을 맡았다. 일본은 약산에게 지금 가치로 320억 원 이상의 현상금을 걸었다. ⓒ KBS 다큐영상 캡처

 

김원봉은 15세 때인 1913년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밀양 시골에서 서울까지 유학을 갈 정도면 집안이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역관출신인 할아버지가 서울 출입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먹고 살 만큼 농사를 지어서 수입이 있었기에 서울 유학이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김원봉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다른 자식들과는 어딘가 남다른 모습에서 서울로 보내 인재로 키우고 싶었을 터이다. 
 
김원봉에게는 황상규(黃尙奎) 라는 고모부가 있었다. 
아버지 손아래 동생의 남편이다. 황상규는 밀양의 대표적인 유지이면서 독립운동가였다. 김원봉의 일생에 가장 많은 도움과 영향을 끼친 분이다. 서울행도 이 고모부의 조언이 컸다. 
 
황상규는 대한제국시기 집성학교(集成學校)를 졸업한 뒤 창신학교(昌新學校)와 밀양 고명학교(高明學校)를 설립하였다. 대한광복회를 창설하고 의군부 중앙위원이 되었다.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의열단이 결성될 때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0년 총독부 수괴 암살과 관청폭파를 목적으로 무기를 휴대하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피체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26년 출옥하여 밀양으로 가서, 1927년 밀양청년회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신간회 밀양지회 지회장, 1928년 밀양협동조합위원, 1929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을 맡는 등 일생동안 항일운동을 하다가 1931년 사망하였다. 김원봉이 젊은 나이에 의열단 단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황상규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김원봉은 상경하여 중앙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당시 교장은 유근(柳瑾) 선생이었다. 유근은 <황성신문> 발행에 참여, 1905년 을사늑약 때 이 신문에 유명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실었다. 이로 인해 신문이 정간되었다가 1906년 속간될 때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병탄으로 신문이 폐간되고, 유근은 중앙학교 교장으로서 교육사업에 헌신하고 있었다.
 
김원봉은 중앙학교에서 유명한 학생으로 알려졌다. 
교내 웅변대회에서 발군의 기량을 발휘한 것이다. <사회발전은 종교에 있느냐, 교육에 있느냐>라는 연제의 웅변대회에서 김원봉은 교육에 있다고 당당하고 조리있게 열변을 토하여 학생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유명학생'이 되었다.
 
김원봉이 중앙학교에서 이명건과 김두전을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이들은 생각하는 방향이 같았고, 서로 의기가 통하여 쉽게 친하게 되었다. 세 사람은 생명을 바쳐 조국 독립을 쟁취하자고 다짐하면서, 김원봉은 '산처럼(若山)', 김두전은 '물처럼(若水)', 이명건은 '별처럼(如星)', 

크고 넓고 빛나는 생을 살기로 다짐하고 맹세하였다. 

이후 세 사람은 굴곡 많은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각기 신념대로 살았다. 김원봉은 이후 항일투쟁의 과정에서 그때그때 여러 가지 이명과 별호를 사용하였지만, 공식적으로는 김약산으로 쓰고, 그렇게 불리었다. 
  

충칭 김원봉 장군 거주지약산 김원봉 장군은 이곳에서 충칭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다. 현재는 폐업정리 중인 옷가게가 운영 중이다. 이마저도 동네 재개발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 김종훈

 
김원봉의 중앙학교 시절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당시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의협심 강한 소년에게 학교에서 차분하게 공부만 하도록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병탄과 더불어 항일세력을 뿌리뽑고자 1911년 신민회 사건을 날조하여 700여 명의 민족운동가를 구속하였다. 

평안도와 황해도를 비롯한 서북지역 기독교계 인사들이 주로 검거되고, 그 중 105명이 징역 5~10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양기탁ㆍ이동휘ㆍ이승훈 등 신민회 간부들은 사상전향을 강요받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해 2명이 목숨을 잃었고 다수가 불구자가 되었다.
 
이 무렵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가 조직되고, 만주에서는 서일(徐一)을 단장으로 하는 중광단(重光團)이 결성되었으며, 1915년 초에는 경북 달성군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이 조직된데 이어, 풍기의 광복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들이 전투적인 독립운동단체로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일제와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김원봉 소년이 이와 같은 국내외 항일투쟁의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남다른 항일의식과 정의감에 불타고, 유근이 교장으로 있었던 관계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김원봉은 뒷날 작가 박태원과 인터뷰에서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에 대해 술회한 바 있다. 
 
박태원은 "1914년 봄, 동저고릿바람에 바람을 등에 지고, 명산 승지를 찾아 무전여행의 길을 떠났다. 그가 짊어진 바랑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몇 권의 서책이었다. 오직 그 뿐이다. 그 속에는 갈아입을 홑적삼 한가지 들어 있지 않았었다." 라고 썼다.

주석
1>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17쪽, 깊은 샘, 2000.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0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1,000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