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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은 방대하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정보 전달 방식에서 기존의 지식형태와 충돌하는 특성도 지닌다. 하이퍼텍스트는 정보의 '선형성'과 '순차성'을 깨뜨림으로써 정보를 체계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인터넷은 방대하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정보 전달 방식에서 기존의 지식형태와 충돌하는 특성도 지닌다. 하이퍼텍스트는 정보의 '선형성'과 '순차성'을 깨뜨림으로써 정보를 체계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 강인규

나는 기술을 거부하는 '러다이트(luddite)'가 아니다. 학교에서 뉴미디어를 가르치고 인터넷 매체에 글을 쓰면서 기술에 거부감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인터넷을 열심히 쓰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론 독자분께도 인터넷을 포기하라고 권할 생각이 없다. 만일 그래야 한다면, 이 글 먼저 읽지 말아야 할 테니 말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이 인터넷을 버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뿐 아니라, 인터넷을 포기하는 게 꼭 나은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지난 두 편의 기사(트위터를 버려 당신의 뇌를 구하라! / 대학생들 답이 왜 이래? 위험한 인터넷)를 통해 인터넷이 양산하는 맥락 없는 지식을 경계할 것을 당부했다. 아울러 파편화된 정보를 지식과 구분하자고 제안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가능할 것이다. 결국 인터넷을 포기할 수 없다면, 이런 논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인터넷은 모바일 기기와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교류매체'를 타고 우리 삶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고 있지 않은가.

정확히 그것이 글을 쓰게 된 이유다.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됨으로써 인터넷의 영향을 비판적으로 살피기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우리에게 더 '당연한 것'이 되기 전에 이 기술이 가져온(그리고 가져올) 변화를 '낯설게' 고찰해 보고 싶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이 있다. 모든 이가 알고 있듯, 우리가 정보를 얻는 방식은 크게 바뀌었다. 집중과 사고로 캐내야 했던 정보들은 이제 검색어 하나로 간단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식 개념이 과거와 동일하다고 착각하곤 한다. 지식에 대한 존경과 열망도 여전하다.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 칭찬인 때가 있었다. 그런 시절은 오래전에 지났다. 이제 백과사전은 휴대용 기기를 통해 언제든 검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걸어다니는 모든 이들이 주머니 속에 가지고 다니는 백과사전이 자랑일 수는 없다. '걸어다니는' 건 자랑거리가 될지 모르겠다. 신체활동이 줄어든 현대사회니 말이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 발전이 예술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폴 발레리의 글을 인용해, 예술은 대상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이 미미했던 시절에 탄생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사물에 대한 통제력, 즉 기술이 예술의 개념을 바꾸었듯, 정보를 다루는 기술이 정보와 지식의 개념을 바꾸는 것은 당연하다.

하이퍼텍스트의 축복 또는 저주

정보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료라면, 지식은 그 자료를 능동적이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 나는 이전 글에서 인터넷이 종이책에 비해 집중하기 어렵고,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용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종이가 모니터보다 뛰어난 매체여서이기보다는, 정보가 수록되고 전달되는 방식의 변화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하이퍼텍스트(hypertext)'다.

인터넷으로 글을 읽다 보면 파란색 밑줄이 그어진 단어나 문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링크를 클릭해서 다른 글이나 이미지로 옮겨갈 수 있게 만든 문서를 '하이퍼텍스트'라 부른다. 웹문서의 동의어가 된 하이퍼텍스트는 정보의 추가제공과 문서들 간의 상호참조를 돕기 위해 고안된 기술이다.

링크가 없더라도, 컴퓨터나 휴대용 단말기에서 문자로 인식되는 모든 인터넷 정보는 하이퍼텍스트로 기능한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구글이나 네이버 등의 검색회사가 인터넷에 뿌린 '검색봇'이 돌아다니며 그 글을 검색어와 연결시키는 '인덱싱(indexing)' 작업을 한다. 저자가 원하지 않아도 그 글은 다른 방대한 문서들과 연결고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구글 북스'처럼 온라인으로 검색하고 읽을 수 있는 인터넷 도서뿐 아니라, 킨들이나 아이패드처럼 내려받는 형태의 전자책도 넓은 의미의 하이퍼텍스트에 포함된다. 단어를 선택해 사전으로 뜻을 찾아볼 수도 있고, 관련주제를 다룬 위키피디아 항목을 읽을 수도 있다. 원한다면 책의 요점을 다른 사람과도 나눌 수 있다. 문제는 하이퍼텍스트의 이런 장점이 집중과 이해를 방해하는 역기능도 갖는다는 점이다.

종이책의 구성은 수세기를 거치며 체계화되었다. 문장은 논리적으로 결합되어 문단을 구성하고, 문단은 서론, 본론, 결론의 형태로 완결된 구조를 갖는다. 추가 정보는 주석으로 처리해 흐름이 끊기지 않게 한다. 글은 왼쪽이나 오른쪽 어느 한 방향에서 시작해 반대편에서 마무리되는 방향성 또는 선형성(linearity)을 갖는다.

하이퍼텍스트는 이런 선형성을 파괴한다.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링크를 클릭해 다른 기사로 넘어가기도 하고, 논의의 맥락을 소화하기도 전에 엉뚱한 자료를 뒤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일쑤다. 선형텍스트와 하이퍼텍스트가 집중과 이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많은 논문이 나와 있다. 이 가운데 다수가 하이퍼텍스트가 정보의 이해와 기억에 끼치는 부정적 측면을 지적한다.

예컨대 타미 맥도넬(Tommy McDonell)은 2006년 연구에서 동일한 정보를 하이퍼텍스트와 선형텍스트로 만들어 비교실험을 했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부는 하이퍼텍스트를 모바일 기기로 읽게 하고, 다른 집단에게는 종이 인쇄물을 나누어 주었다. 맥도넬은 이 두 실험군 사이에 현저한 차이를 발견한다. 하이퍼텍스트를 읽은 학생들은 인쇄물을 읽은 학생들에 비해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읽은 내용을 잘 기억하지도 못했다.

 한 포털 사이트의 뉴스페이지와 하이퍼텍스트 코드. 특정 단어들이 링크화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링크들은 해당 표현이 사용된 다른 문서들과 기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기사내용을 파악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한 포털 사이트의 뉴스페이지와 하이퍼텍스트 코드. 특정 단어들이 링크화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링크들은 해당 표현이 사용된 다른 문서들과 기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기사내용을 파악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 강인규

'차악'의 하이퍼텍스트

인터넷이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독자들이 경험을 통해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잘 훈련받은 학자도 예외는 아니다. 프린스턴대 역사학 교수인 다니엘 벨은 전자책을 읽은 후 소감을 이렇게 기술했다.

"과거 같으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찾는 이 책은 종이에 인쇄되어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에서만 열람 가능한 '전자책'인 것이다. 클릭 몇 번으로 책이 컴퓨터 화면에 뜬다. 읽기 시작한다. 내용과 구성 모두 훌륭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집중이 안 된다. 화면을 이리저리 넘겨보고, 검색어를 입력해 본문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보통때보다도 커피잔을 채우러 더 자주 일어나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뉴스를 읽고, 쓸데없이 서랍정리도 한다. 결국 책을 다 읽고는 기뻐한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니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데이비드 벨("책 없는 미래: 인터넷이 학문에 끼치는 영향", <뉴리퍼블릭> 2005년 5월 2일, 27~28쪽)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터넷을 포기할 수 없듯, 하이퍼텍스트를 포기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또 다른 연구가 시사점을 준다. 앞서 지적했듯, 하이퍼텍스트는 대체로 선형텍스트에 비해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고 기억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런 혼란은 특정 분야의 지식이 얕은 사람에게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일정 수준의 체계적 지식을 쌓은 사람들일수록 인터넷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종이책이 인터넷이나 전자책을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교육용으로 전자책을 도입할 때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더불어, 하이퍼텍스트라도 내용의 연관성과 중요도에 따라 링크를 체계적으로 배치할 때 이해도와 기억력을 높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하이퍼텍스트에도 선형텍스트의 체계성을 도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교육당국과 웹개발자뿐 아니라 모든 사용자가 고민해야 할 문제다. 인터넷 시대에는 모든 이가 정보의 생산자이기도 하지만, 사용자의 이해가 정보 서비스 제공자의 이해와 항상 일치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사용자가 링크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큰 손해지만, 검색업체와 광고주 입장에서는 이들을 최대한 잡아두는 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생을 위한 교재들. 학생들이 단문에 익숙해지면서 종이책의 편집 방식도 바뀌고 있다. 글자는 커지고 정보량은 줄어드는 반면, 이미지와 사진의 사용은 크게 늘고 있다. 점차 집중력이 약해지는 독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책 두께도 얇아지고 있다. 사진 위쪽에 <90분에 끝내는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제목의 책이 보인다.
미국 대학생을 위한 교재들. 학생들이 단문에 익숙해지면서 종이책의 편집 방식도 바뀌고 있다. 글자는 커지고 정보량은 줄어드는 반면, 이미지와 사진의 사용은 크게 늘고 있다. 점차 집중력이 약해지는 독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책 두께도 얇아지고 있다. 사진 위쪽에 <90분에 끝내는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제목의 책이 보인다. ⓒ 강인규

비판적·선별적 사용

여기서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선형 텍스트 또는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하이퍼텍스트가 정보 수용에 유리하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사용자의 편의와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터넷이 하루아침에 바뀔 것을 기대할 수 없다면, 남는 것은 사용자들의 비판적이고 선별적 사용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선형 텍스트'를 많이 소비하는 것이다. 즉 인터넷을 쓰더라도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특정 분야에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인터넷 검색으로 얻는 단편적 정보보다는 완결된 구조의 글이 도움이 될 것이다.

온라인상에서도 이런 글들을 찾는 게 불가능하지 않지만, '하이퍼텍스트의 늪'에 빠지거나 이메일, 트위터, 페이스북으로 순환되는 '기능의 미로'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검색으로 찾아낸 정보는 출처와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 인터넷이나 전자책에서 원하는 부분을 찾더라도, 그 문장이 포함된 문단과 장 속에서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주의집중 문제도 중요하다. 우리는 왜 도서관에 갈까?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인터넷으로 체계적 지식을 쌓는 것은 안락한 집에 누워 따분한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 좋아하는 텔레비전 방송이 나오고, 좋아하는 음식이 쌓여 있고, 좋아하는 친구에게 쉴 새 없이 전화가 오는 집에서 말이다(그리고 밖에는 폭풍이 불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인터넷은 가치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다. 상업적 이해관계가 침투해 있고, 통제를 열망하는 권력이 도사리고 있다. 때로 합리적인 토론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순진한 자기애가 표출되는 곳이기도 하고, 억지와 무례로 남의 목소리를 억누르려는 욕망의 장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서 손쉽게 얻는 정보를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물론 인터넷이 선사한 긍정적 변화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자료 하나를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맬 필요가 없게 된 것은 물론, 기억 저편으로 건너간 글귀를 귀신같이 찾아낼 수도 있다.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수동적 독자에 머물렀던 일반인들이 매체의 무시를 깨고 당당한 발언자의 권리를 얻은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런 장점이 있다고 해서 인터넷을 무비판적으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니다. 요즘 전화번호부를 외는 사람이 있다면, 경탄의 대상이 되기보다 '머리를 생산적인 데 쓰라'는 핀잔이나 듣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번호를 아느냐가 아니라, 어떤 번호를 아느냐와 그 번호를 어떻게 쓰느냐다.

'모든 이가 생산자'인 인터넷 시대에 지식의 개념은 바뀔 수밖에 없다. 쏟아지는 모든 정보가 가치 있고 믿을 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 지식의 핵심은 정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분별하는 능력과, 이렇게 얻은 정보를 특정 맥락에 맞게 체계적으로 재조직하는 능력이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의 지식에도 '합리'와 '체계'라는 전통적 지식의 미덕이 강조되는 것이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의 결합은 전 세계 사람들이 정보를 습득하고 사람과 교류하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 여성이 스마트폰으로 상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의 결합은 전 세계 사람들이 정보를 습득하고 사람과 교류하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 여성이 스마트폰으로 상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 Peter Drier

단문소통의 미덕과 문제점

위에서 '체계적 지식'이란 말을 썼지만, 지식은 그 자체로 체계적이다. 그리고 지식은 논리적으로 조직화된 글의 산물이다. 월터 J. 옹이 <문자문화와 구술문화>에서 지적했듯, 형식논리는 그리스인들이 글쓰기 기술을 체화하는 과정에서 발전시킨 문자문화의 산물이다. 잘 다음어진 글과 정돈된 사고는 뗄 수 없는 관계다.

인터넷에서도 주요 소통 수단은 글이다. 그러나 흔히 온라인상의 글쓰기는 '파격'을 특징으로 한다. 문법과 어법이 무시되고 형식은 파괴된다. 비록 문자를 사용하지만, 소통의 즉각성으로 인해 글은 구술성을 띠게 된다. 구어체가 유행하고 소리 나는 대로 쓰는 맞춤법이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경향신문>은 한국 드라마 대사가 짧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람들이 트위터식 단문에 익숙해진 결과라는 것이다. 한국만이 아니다. 일본의 문화현상이 된 '휴대폰 소설(携帯小説)'도 그렇다. 휴대폰으로 쓰고 휴대폰으로 읽는 이 새로운 문학 장르는 문자메시지를 주요 소통 수단으로 삼는 젊은이들의 문화를 반영한다.

<뉴욕타임스> 2008년 1월 22일자 기사에 따르면, 2007년 10편의 일본 베스트셀러 소설 가운데 무려 5편이 휴대폰 소설이었다. 그리고 이 '베스트셀러 작가' 다수가 아무런 문학 훈련도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고등학생 시절, 편의점으로 아르바이트하러 가는 지하철 안에서 휴대폰 소설을 쓴 이도 있다. 문자메시지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짧은 소설은 등장인물이나 이야기 전개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나는
아키
나이?
23
아, 올해 24
남자친구는?

있어

미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문자메시지가 주요 소통수단이 되면서 젊은이들이 이메일조차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메일은 제목, 서두, 본론, 마무리로 진행되는 '선형 텍스트'의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2010년 12월 21일자 <뉴욕타임스>는 이메일의 '공식성'이 젊은이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단문으로 소통하며 가벼운 관계를 맺는 젊은이들이 이메일의 '무거운 형식'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구술적 글쓰기는 친밀감을 줄 뿐 아니라 민주적 속성도 지닌다. 트위터의 '140자로 쓰기'는 글쓰기에 요구되는 형식의 부담 없이 누구나 쉽게 참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장점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사고가 단편적인 정보와 단문의 글처럼 바뀌고 있지 않은지 말이다.

 일본의 '휴대폰 소설'을 다룬 <아사히신문> 웹사이트. 문자 메시지가 주요 소통 수단이 된 일본 젊은이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문학장르다. 길고 복잡한 문장 구성에 부담을 느끼게 된 독자들 사이에서 크게 인기를 얻었다.
일본의 '휴대폰 소설'을 다룬 <아사히신문> 웹사이트. 문자 메시지가 주요 소통 수단이 된 일본 젊은이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문학장르다. 길고 복잡한 문장 구성에 부담을 느끼게 된 독자들 사이에서 크게 인기를 얻었다. ⓒ <아사히신문>

오프라인만의 시간

독자 가운데 많은 분들이 인터넷 없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말 그대로 인터넷이 '삶의 일부'가 된 것이다. 나 역시 오랫동안 인터넷을 써 왔지만, 이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기회가 찾아왔다.

2007년 여름, 취재 때문에 보름간 배를 타게 되었다. 인터넷도, 전화도 없는 낡은 배 위에서 두 주를 지내면서 인터넷이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짧은 '금단현상' 후에 온 첫 자각은 내가 정말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인터넷과 책 없이 머리에 담긴 지식과 관찰만으로 기사를 쓰자니, 한 줄 한 줄이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전까지 인터넷을 '분뇌'처럼 쓰면서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빈 머리의 자각'이 고통스러웠을망정, 인터넷 없이 지낸 보름간은 아주 기쁘고 행복했다. 어쩌면 1995년 이래, 내 머리로 사고한 유일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집에서 쓰던 인터넷을 끊었다. 필요하면 공공도서관이나 찻집의 무선인터넷을 쓰기로 하고서. 커피숍에 죽치고 앉아 있는 시간이 늘긴 했지만, 집에서 먼지를 쌓아가던 책꽂이에 자주 손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터넷과 보내는 시간은 줄었지만, 이전보다 훨씬 즐겁게 쓰게 됐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단 하루만이라도 인터넷을 끊고 지내보라고 권하고 싶다. 생각보다 어렵지만, 생각보다 훨씬 큰 기쁨을 얻으실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전 세계가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교류의 망'으로 연결되면 사람들은 덜 외로워질까? 과연 세계는 더 평화로워질까? 그렇다면 '교류미디어'에서 늘어가는 자기애(나르시시즘)의 표출과 극단적 무례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터넷에서 배타적 민족주의 담론이 더 극심하게 드러나는 현상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다음 기사에서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의 '교류매체'가 사람들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뉴미디어#인터넷#하이퍼텍스트#트위터#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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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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