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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은성, 강이종행 기자
사진 : 김진석 기자


▲ 이제 곧 청계천 고가도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 김진석
청계천은 그야말로 폭풍전야다. 7월 1일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하지만 모든 청계천 사람들은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묵묵히 자신들의 일에 열심이다.

대부분 오랫동안 한 곳에 있어왔기 때문에 크고 작은 변화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태연할 수 없는 모양이다. 혹시 복원공사로 인해 생계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다.

청계천을 걸으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적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40년 이상 청계천을 지켜온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몇 명을 소개해보려 한다.

"예전엔 중고서점이 청계천의 대명사" 44년째 중고서점 운영하는 윤영오씨

"저기 건너편에 전차 차고가 있었어요. 차고 담을 양쪽으로 옷가게, 서점, 시계방, 구두방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죠. 그 당시 여기 청계천하면 중고서점이 대명사였어요. 모두 100여곳 이상 있었을 겁니다."

점원을 시작으로 44년째 외국 중고서점에서 일하고 있는 윤영오(56)씨는 전주에서 초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온 뒤 처음 본 청계천 6가(지금의 동대문운동장 사거리 구 평화시장 패션타운 앞)를 이렇게 설명했다. 눈짐작으로 영어를 익힌 윤씨는 지금까지 중고 서적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당시 청계천 복개공사는 4가 정도까지 돼 있었죠. 60년대 들어서는 이 앞(6가)에도 공사를 시작했어요. 사실 청계천 복개 공사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지는 못했어요. 솔직히 하루 벌기도 힘들 때였으니까요."

윤씨에게 청계천은 생존권을 지켜주는 곳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그 소중함을 느끼면서도 그럴 수 없었던 현실이 밉기도 하다고.

"60·70년대 유행했던 책은 영문 소설책이었어요. 펄벅(Pearl Buck)의 <대지>, 헤밍웨이(Ernest M. Hemingway)의 <무기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 그리고 <안네의 일기> 등이 잘 팔렸어요. 특히 세익스피어 등 고전 책들은 굉장히 귀했어요. 71년 내 장사를 시작한 뒤로 책을 구하기 위해 부산, 대구, 광주, 서울 변두리 서점 등을 돌며 책을 구하러 다녔죠."

윤씨의 눈이 반짝인다.

"70년대 이후엔 대학 교재들이 잘 팔리기 시작했어요. 특히 <서베이 오브 잉글리쉬 리터러쳐>(Survey of E. Literature)를 찾거나 들고 다니는 여학생은 무조건 이대생이었죠. 이대에서 그 책이 필수였으니까요. 80년대 들어서는 공대와 어문학 서적들이 꾸준히 나갔죠. <공업수학>과 <그레이 해부학>은 가장 잘 나가는 책이었어요."

하지만 80년대 중반 이후 컴퓨터와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중고서점이 설자리를 잃어버렸다고 윤씨는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100여곳이 넘던 서점이 이제 50여 곳이 채 안 된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 44년간 외국 중고서적을 판매해온 윤영오씨
ⓒ 김진석
"이제 청계천이 복원되고 아무래도 젊은이들의 장소가 되면 중고서점들은 아마 더 이상 장사를 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심정적으로는 당연히 이번 공사는 반대해요. 하지만 대세가 찬성 쪽인데 그래도 기대를 가지고 기다려 봐야죠."

윤씨는 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쉬고 싶진 않을까?

"당연히 그만두고 싶을 때가 수백번도 넘어요. 하지만 어려운 학생이 오면 깎아주기도 하고 외상도 주고, 귀한 책 구해줘서 학생이 좋아하면 보람을 느낍니다. 아! 60년대 말인가 70년대 초인가, 일본에서 나온 <자본주의>란 책이 있는데 금서였죠. 그런데 부산가서 그 책을 구해오다가 용산역에서 불신검문 걸려 들키고 말았죠. 3일 동안 용산 경찰서에 있으면서 가택수사도 받았어요. 아궁이까지 뒤지더라고요."

끝날 것 같던 윤씨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40년 이상 계속해온 일들을 말하기엔 불과 1시간 남짓은 너무나 짧은 것 같다.

"한결 같은 것이 청계천 변천사" 골동품상 김정남씨

청계천(淸溪川) 변천사

ⓒ오마이뉴스 남소연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구와 중구와의 경계를 흐르는 하천. 길이 3,670`m. 최대 너비 84`m. 북 악산 인왕산 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분지의 모든 물이 여기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箭串橋] 근처에서 중랑천(中浪川)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 강으로 빠진다.

본래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 조선 왕조의 한양정도(漢陽定都) 당시 이 내는 자연하천 그대로여서 홍수가 지면 민가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시에는 오수가 괴어 매우 불결하였는데, 제3대 왕 태종이 개거공사(開渠工事)를 벌여 처음으로 치수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영조 때에는 준설 양안석축(兩岸石築) 유로변경 등 본격적인 개천 사업을 시행하였다. 이 공사로서 내의 흐름이 비로소 직선화하였다. 순조 고종 때에도 준설 공사는 계속되었는데 이 개천에 놓인 다리는 수표교(水標橋) 오간수교(五間水橋) 광교(廣橋) 영미교(永尾橋) 관수교(觀水橋) 등 모두 24개가 있었다. 국권피탈 후 일제강점기 초(이때에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에는 근대적 도시계획의 성격을 띤 대대적인 준설공사가 행하여졌다.

8˙15광복 후에도 청계천의 유지관리에 힘써 왔고 1958년 6월부터 복개공사에 착수, 60년 4월에 1단계로 광교∼주교(舟橋) 1∼4가 간을 완공하여 너비 50`m의 간선도로를 만들었다. 답십리동(踏十里洞) 신답초등학교 앞까지 복개된 그 위에는 고가도로가 건설되어 있다.

- 두산대백과사전 참조
"청계천은 내 꿈의 산실이자 제2의 고향입니다. 지금 고향에 가 본다고 한들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모든 게 다 변해버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근데 청계천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요. 청계천 변천사요? 변하지 않는 곳, 한결 같은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청계천 변천사죠."

청계천 도깨비 시장에 위치한 10평 남짓한 민속 골동품점. 신라의 토기부터 현대의 인테리어 소품까지 대략 2만 여점의 골동품이 시간의 먼지에 쌓인 채 진열돼 있다. 골동품과 함께 도깨비 시장을 한 장소에서만 30년 가량 지켜온 김정남(61)씨는 주변에서 붙여준 '보물섬의 터줏대감'이라는 별명에 무척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8남매의 장남이었던 그는 생계를 위해 고향인 부산을 떠나 72년 처음으로 청계천을 밟았다. 그 후 김씨는 한 장소에서 자신의 직업을 '천직'이라 여기며 한 가정을 건강하게 일궈내고 청계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70년대는 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민속용품이 주부들에 의해 많이 팔렸고, 경제가 가장 좋았던 80·90년대 전성기에는 값비싼 도자기가 주류를 이뤘다. 그 후 2000년 문턱엔 유흥업소 흥행에 힘입어 인테리어 소품이 잠깐 성황을 이뤘지만, 요즘은 오히려 업소들이 사들였던 물품들을 다시 내다 파는 실정이라 한다.

"은행 문턱을 밟아 본 지가 까마득해요. 그래도 이 작은 가게를 통해 알뜰살뜰 모아 내 집도 마련하고 아들딸 다 시집 장가 보내고 공부시키고 그랬어요. 근데 요즘은 매출은 고사하고 가게세도 못 낼 형편이죠. 그나마 건물 주인이 가게세를 내려줘 근근히 버티죠. 청계천 복원 말이 나오고 난 후에는 건물주인들 대부분이 임대료를 10~30%까지 삭감했죠."

▲ 청계천 8가엔 없는 물건이 없다.
ⓒ 김진석
전성기 때보다 채 10분의 1도 손님이 오지 않는다며 한숨 짓는 그는 주말이 아닌 평일엔 단 한두 명의 손님조차도 찾아오지 않는다며 그저 암담해할 따름이었다. 그간 남이 버린 물건을 주워 매매 할 수 있는 새 물건으로 보수해 '시집' 보낼 때마다 얼마나 큰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는지 모른다는 김씨는 자식보다도 골동품을 더 사랑했노라 고백한다.

"사람이 팔 다리가 없다고 그 값어치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건도 똑같은 거예요. 열심히 일하고 닦고 조이며 느꼈던 처음 시작할 때의 그 희망이 지금은 너무나 희미해서 그저 서글퍼지네요."

그는 가식이나 허례허식이 없는 청계천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느냐 반문한다. 없는 서민들이 함께 어울려 맘 편히 막걸리 한잔 걸칠 수 있는 곳, 시중보다 가전 제품의 가격이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서민들의 때와 땀이 서려 있는 청계천을 정말 아느냐고 연방 물어왔다.

ⓒ 김진석
"꼭 무슨 거대한 업적을 남겨야만 애국자인가요? 우리가 보수한 중고품을 새것으로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고, 외국인 관광객들을 국내로 끌어들이고, 없는 서민들 한숨 덜어준 우리 청계천 가족들도 진짜 애국자 아닌가요?"

김씨는 청계천 복원 사업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또한 자연친화적 정책을 환영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생존권이 걸려 있는 그이기에 정부의 '무대책'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금년 즈음 청계천 조합을 한 번 만들어 활동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그는 끝내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만들어진 상권 타운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장지동) 무얼 믿고 어찌 들어갑니까? 결코 국책에 반대를 하는 게 아니에요. 단, 너무 빨리 대책 없이 서두르는 것에 화가 납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우리의 생존 구역이에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영세 상인에게 허허벌판에서 상권이 형성될 7~8년을 그냥 손놓고 기다리라는 게 과연 말이 되나요?"

김씨는 청계천 영세 상인의 미래에 몹시 불안해하면서도 결코 청계천을 떠나지 않겠노라 굳은 의지를 전한다.

"청계천과 같이 살아야죠. 이 자리에서 죽든지 살든지 그 모든 건 앞으로 청계천과 함께 살다보면 알겠죠."

"청계천 5088곳, 발품 팔아 만든 청계천 지도" '사이버 청계천' 운영자 이주용씨

▲ 사이버 청계천 운영자 이주용씨
ⓒ 김진석
그동안 청계천 상권이 오프라인 위주였다면 이를 온라인으로 옮긴 사람이 있다. 그 주인공은 이주용(44)씨로 지난 2000년부터 '사이버 청계천'(www.ccsk.co.kr)을 혼자 운영하고 있다.

10년간 청계천에서 수족관 관련 자영업을 해오던 이씨는 IMF를 맞아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 떠오른 것이 '청계천의 온라인화'다.

"'수없이 많은 가게들이 얽혀 있는 청계천을 한번이라도 와 본 사람이라면 궁금해 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산업문화단지로서 충분한데 이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없었죠. 골목 안에는 또 나름대로의 삶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어찌 보면 벤처의 출발점이 바로 청계천이라고 생각했어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씨는 5개월 동안 무려 6000곳 이상의 가게를 돌아다니며 데이터를 수집했다. 힘들 때도 많았지만 사명감 하나로 돌아다녔다는 게 이씨의 전언이다.

"나름대로 지도를 만들어서 갔던 곳은 다시 가지 않도록 표시를 해가며 정보를 얻었어요. 당시만 해도 인터넷 마인드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 문전박대했어요. 그래서 오프라인 지도를 만든다고 하면서 정보제공을 받았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이버 청계천'은 그야말로 청계천의 축소판이다. 청계천 지도에 어떤 업종들이 모여있는지 나와 있고, 각 업종별 사업체들도 소개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이버 청계천'은 청계천을 찾는 사람들의 바이블이 되어 갔다.

"최근엔 외국에서도 감사 메일이 와요. 일본, 호주, 동남아 등 교포들이 사이트 보고 사려는 물건을 살 수 있었다는 내용이죠. 얼마 전 안양의 한 자영업자가 납품하기 막막한 상황에서 우연히 사이트 보고 한 업체에 문의해서 납품까지 하게 됐다고 고마워했어요. 온라인을 통해 원스톱화 한 것이죠."

▲ '사이버 청계천'엔 청계천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수록돼 있다.www.ccsk.co.kr
ⓒ 김진석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사이트 게시판을 통해 구매, 판매도 되곤 하는데 사기를 당했다는 내용이 종종 올라와요. 특히 지방에서 그런 일 당했다며 경찰이 올라온 적도 있었죠. 그럴 땐 마음이 아파요."

그렇다면 생계유지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처음 1년 반 정도는 수입이 전혀 없었죠. 하지만 사이트가 알려지면서 광고를 문의하는 업체나 가게들이 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홈페이지 구축을 해달라는 문의도 들어오고 있어요. 사실 광고는 한 달에 2만원이니 비싼 편은 아니죠."

이씨는 열심히 일을 하면 경제적인 부분은 따라온다고 믿고 있었다. 어찌 보면 순진한 생각이지만 그의 믿음은 지금 현실로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사실 청계천 복원이 되면 청계천 온라인 사업은 더 강세를 나타낼지도 몰라요. 하지만 너무 아쉬운 것은 이왕 할 것이라면 청계천 주체들과의 공청회 등을 열어 조금 더 발전적인 모습으로 만들면 좋을 텐데. 복원 사업이 잘되면 좋죠. 하지만 잘못되면 이명박 시장이야 혼자 자숙하면 되지만 10만 상인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3D에서 하이테크까지 블록화 돼 있는 곳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어요. 혹시 이 소중한 모습이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걱정되는 거죠. 전 복원 사업도 잘 됐으면 좋겠어요."

열변을 토하는 이씨의 말에는 청계천 사람들의 걱정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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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동안 한국과 미국서 기자생활을 한 뒤 지금은 제주에서 새 삶을 펼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아닌 밝음이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실천하고 나누기 위해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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