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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동상 철거 문제로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다. 민족의 은인인지, 아니면 절멸의 위기로 몰아넣으려 했던 문제적 인물인지가 논란의 핵심이다. 이에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고지훈씨가 맥아더에 대해 짚은 글을 싣는다. <편집자주>
▲ 6ㆍ25전쟁 때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1957년 인천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인천 중구 자유공원에 세워졌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 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두 사람 중 하나", "자기가 신이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극도로 자기중심적인 인물", "덩치만 큰 어린애", "하늘나라로 가면 하느님이 자리에서 내려와 머리를 굽히고 자리를 양보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인물", "싫어하는 동료가 배와 함께 가라앉기만 한다면 국가라는 배가 침몰하는 것을 보고도 좋아할 인간."

더글러스 맥아더. 그는 자신의 조국에서 이처럼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가를 남긴 이들도 루즈벨트·트루먼·아이젠하워 대통령, 루즈벨트 정부의 내무장관이던 해럴드 익케스, 맥아더를 가까이에서 보필했던 부관 중 한 명인 로버트 아이컬버그 장군 등 '빨갱이'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한국을 구원한 불세출의 영웅으로 불렸다.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던 이승만의 동상이 4.19 시위대에 의해 쓰러질 때도 그의 동상은 오히려 꽃다발 세례를 받았다. 맥아더는 "도대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나라를 위해 우리의 청년들이 개죽음을 당해야 하나"(미 국방장관 존 포레스탈)라는 자국 내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자 했던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맥아더가 과연 동상까지 세워가며 숭앙할 만큼 교훈적이거나 영웅적인 인물일까?

최고지휘관에 걸맞은 판단력 갖춘 적 없었다

그는 수십만의 사병들과 수백만 민간인의 '생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최고지휘관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영웅적 지휘관이란 호칭에 어울릴 법한 판단력을 갖춘 적은 별로 없었다.

그는 일본의 남방침략이 본격화되던 1941년께 극동군 사령관으로 군에 복귀했다. 맥아더는 이 때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현재 극동에 배치 해놓고 있는 병력의 절반만 가지고도 일본을 갖고 놀 수 있을 것이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맥아더와 미군은 일본군의 노리개로 전락했다. 맥아더는 영화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키는 "나는 지금 가지만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호주로 도망쳤다.

당시 극동지역 미군은 거의 대부분 필리핀에 집결해 있었음에도 맥아더는 일본군에 참패했던 것이다. 또한 태평양 지역 공군 전력의 대부분이 집결해있던 클라크 공군기지가 일본공군의 공격을 받아 반수 이상의 전투기가 날개 한 번 못 펴고 박살난 것도 그의 우유부단함 덕분이었다.

최고사령관의 무딘 예지력은 이로부터 10년도 채 안 돼 서울을 공황 상태에 빠트렸다. 상대를 가벼이 여기고 아군의 능력을 과장하는 그만의 비법이 한국전쟁에서도 발휘된 것이다.

북한군의 38선 침범소식을 접한 그는 "미군 몇 명과 제1기갑사단만 보내면 북한인들은 만주까지 허겁지겁 도망치고 말 것"이라고 큰소리치면서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미군은 전쟁 초반 3개월 간 꽁무니에서 연기나도록 도망쳐야 했고 미군 병사들은 고향에서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세 번의 크리스마스를 더 보내야 했다.

"중국본토로 진격해야 한다"... 동아시아 전면전 꿈꾼 맥아더

맥아더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극동 공산주의자들의 씨(그는 종종 공산주의자들을 '세균'과 동일시했다)를 말려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가 특히 괘씸하게 여긴 곳은 신생 중국이었다. 북한의 남침을 "전쟁의 신이 늙은 나에게 선사한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했던 맥아더는 '떡본 김에 제사지내는' 격으로 예전의 중국본토 침략계획을 밀어붙이려 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란 없으며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미래가 도래하게끔 만드는 능력일 것이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그와 같은 권능을 손아귀에 넣었고 이를 이용해 그의 인생 최후의 도박판을 벌였다. 동아시아, 아니 어쩌면 세계의 미래가 바뀔지도 모를 도박이었으며 판돈도 어마어마했다.

1950년 9월 29일, 워싱턴은 38선 돌파를 거듭 요구한 맥아더의 주장을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38선 돌파가 선제공격행위에 대한 징벌적 성격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조-중 국경선을 위협하는 행위는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힘들었다.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반대와 상부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맥아더의 공군은 만주상공을 수시로 침범했다.

맥아더는 압록강 연안은 물론이고 중국 내부의 군사기지에 대한 공격이 필요하다며 대통령의 지시에 어긋나는 행동을 공공연하게 했고 이는 모택동과 워싱턴 모두를 불안하게 했다. 더 나아가 맥아더가 "장개석과 대만군을 이용해서 중국본토로 진격해야 한다"며 중국내전의 재개를 공공연히 주장했던 점을 감안하면, 중국의 참전은 '형제국가에 대한 의리' 차원을 넘어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측면도 적지 않다.

맥아더 후임으로 연합군사령관에 임명됐던 리지웨이는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 이전부터 "모택동이 대만을 침공해주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고 전한다. 다시 말해 이 도박판에서 맥아더가 정말 상대하고 싶었던 것은 중국이었다.

맥아더 해임은 트루먼의 멍청함 때문 아니다

큰 도박꾼답게 몸집이 큰 상대를 원했던 것일까? 맥아더는 전쟁을 확대하고자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전쟁이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되기 직전 상황까지 갔지만 미군이 쫓기듯 다시 후퇴하면서 일단 전장은 한반도로 국한되고 있었다.

워싱턴에서는 상황이 악화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에 조심스럽게 협상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순간 욕망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맥아더 특유의 착란현상이 일어난다. 이와 관련, 맥아더의 전기를 집필한 마이클 샬러는 "맥아더는 상상 속의 전투에서 이룬 승리를 거듭해서 발표했다"고 전장에서 종종 출현했던 그의 착란증상을 비꼬았다.

중국과의 전면전에 대한 갈망이 너무도 컸던 맥아더의 눈에는 자신의 상관이던 대통령의 존재도 하찮게 보였다. 그는 중국본토에 대한 군사작전계획, 국민당 군대의 참전 그리고 원자탄 사용 같은 극비 사항을 태연스럽게 기자들을 상대로 늘어놓았다. 군인이 목숨보다 중하게 여겨야 할 '군기'와 '보안'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린 셈이다.

한반도의 북부를 코발트로 가득 채워 방사능 장벽을 친 다음, 만주의 주요 군사산업시설을 50여기의 원자폭탄으로 무자비하게 공습해야 한다는 맥아더만의 환상적인 전쟁 구상은 절정에 올랐다. 그 구상이 실현됐더라면 한반도 북부와 만주일대는 향후 백년 이상 '생태학적 진공지대'가 될 운명이었다.

워싱턴은 맥아더가 도무지 최고지휘관에 어울리는 판단력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판단해 그를 결국 해임했다. 그러나 일각의 주장과 달리 그의 해임은 트루먼의 '멍청함'에서 빚어진 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너무 늦게 해임됐다.

자기 뒷돈은 챙기면서 퇴직금 달라는 부하들에게는 발포

군사전략가로서의 능력이 떨어진 맥아더는 다른 훌륭한 덕목을 갖추고 있었을까? 부하를 자기 몸처럼 아낀다든지, 도덕적으로나 금전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든지 하는 미담 말이다.

그러나 이 역시 비관적이다. 맥아더 연구자들에 따르면, 그는 성적으로 가학적 취미를 가졌다고 한다. 또한 필리핀 군사고문관 시절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케손 대통령에게서 50만 달러 정도의 뒷돈을 챙기는 등 금전적으로도 깨끗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1932년 1차 대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정부가 약속한 '퇴직금' 지급을 요구하며 시위(이른바 '보너스 행진')를 벌였을 때 "크렘린의 사주를 받은 붉은 무리를 향해 겨눠 총!"을 외쳤다. 발포 명령으로 퇴역 군인 2명이 살해된 이 시위 참여자들이 원한 것은 1000달러였다.

이 모든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맥아더의 신기(神技)에 열변을 토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역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는 것일 게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가능성은 5000분의 1 이하라고 주장한 바 있다.

맥아더 등 군사적 모험주의자, 이젠 비판적으로 볼 때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은 천우신조의 신화로 격상돼야 할 만큼 성공가능성도 거의 없었거나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작전은 아니었다.

인천은 상륙이 예견되던 항구 세 곳(원산, 군산, 인천) 가운데 하나였으며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미국 국방성이 SL-17이라 명명했던 '전쟁시나리오'에 상륙을 감행할 지역으로 이미 예정된 곳이었다.

북한 또한 인천에 대한 미군의 상륙작전 가능성을 우려했을 정도로 충분히 예상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마치 남한이 북한과의 군사적 충돌을 여러 경로를 통해 예측했음에도 개전 직후 몇 달간 허무하게 무너진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북한도 알면서 당한 측면이 많았다.

어떤 사기도박꾼을 그린 만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게 도박"이라고. 전쟁이나 도박이나 그런 점에서 비슷비슷하다. 다만 도박을 하려거든 자기 목숨 걸어놓고 하는 게 정상이고, 패가망신을 해도 저 한 몸 패가망신을 해야지 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전쟁의 발발부터 확전에 이르기까지 타인들의 삶과 목숨을 함부로 다뤘던 남한, 북한, 미국, 중국의 모든 '군사적 모험주의자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맥아더는 그러한 군사적 모험주의자의 대표격이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한국현대사를 전공하는 연구자입니다. 현재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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