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이야기 기록 작가단의 전순자(70) 작가가 원광효도마을시니어클럽에서 추천해준 어르신의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있다. ⓒ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처음엔 대부분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쓸 이야기가 있냐'며 손사래를 치시죠. 그런데 여러 번 찾아가면 마음의 문을 열고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놓습니다. 어릴 적 죽을 만큼 힘들었던 이야기, 세상을 떠난 가족과의 상처 등 가슴속 깊은 이야기에서, 그 평범한 삶 속에서도 진주를 캐내는 거죠." - 전순자 작가
지난 13일 오후 전북 익산시 신용동 원광효도마을시니어클럽. 폭염이 한풀 꺾이고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이날, 이곳에서 조금 특별한 노인 일자리를 만났다.
이름은 '인생이야기 기록 작가단', 줄여서 '인기작'이다. 노인역량활용사업으로 추진되는 이 일자리의 참여자들은 지역 어르신을 직접 찾아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자서전과 회고록으로 기록한다. 단순히 글을 대신 써주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을 듣고, 기억을 꺼내고, 때로는 아픈 사연까지 받아 적어 한 권의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현재 원광효도마을시니어클럽에서는 4명의 참여자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 5일, 하루 3시간, 월 60시간 일하지만 정해진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 방식은 아니다. 대상자를 만나 여러 차례 심층 인터뷰를 하고, 집필과 편집을 이어간다. 한 사람을 5~7차례 만나면서 삶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전북에서는 올해 12개 기관이 이 시범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7월 기준 자서전과 수기 등 이미 164편의 값진 생애 기록이 만들어졌다.
"이 일자리를 하면서 제 인생을 다시 돌아봤어요"

▲초등학교 교장으로 41년간 근무하다 퇴직한 전순자(70) 작가는 교직 노하우와 문학적 소양을 살려 인생이야기 기록 작가단에 참여하고 있다. ⓒ 한국노인인력개발원
70세 전순자씨는 초등학교에서 41년간 근무한 뒤 교장으로 퇴직했다. 문학 활동도 해왔지만 자신에게 맞는 노인 일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인생이야기 기록 작가단'이라는 이름을 보고 "나와 딱 맞는 일자리가 생겼다"고 생각해 참여했다.
전씨는 참전용사와 자원봉사자, 복지서비스를 이용하는 어르신 등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경험을 했다.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자신을 조망하게 됐어요. 힘든 처지에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분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행복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6·25 참전용사였다. 전쟁 당시의 경험과 이후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기록하는 과정에서, 어르신은 자녀들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던 삶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전씨는 "한 분의 삶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 일을 하면서 오히려 제가 치유받는 느낌도 받았다"고 말했다.

▲피아노를 전공하고 학원을 운영하던 장현희(64) 작가는 암 투병 후 고향으로 내려와 새로운 삶의 길목에서 인생이야기 기록 작가단을 만나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은 장 작가가 어르신을 만나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 한국노인인력개발원
63세 장현희씨의 경험은 더욱 직접적이다. 피아노를 전공해 음악가와 피아노 강사로 살아온 그는 고향 익산으로 내려온 뒤 새로운 일자리를 찾다가 인기작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래서 자신의 자서전부터 써봤다. 어린 시절과 부모에 대한 상처를 글로 꺼내놓으면서 자신 안에 남아 있던 아픔을 들여다봤다.
"제 삶을 먼저 정리해보면서 부모님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게 됐어요."
그는 이후 만난 어르신들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을 봤다. 처음에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며 손사래를 치던 어르신들이 여러 차례 만남을 거치면서 가족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장 작가는 "6·25 참전용사와 고엽제 전우, 90대가 넘은 홀몸 어르신들을 만나며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살아 있는 역사를 배웠다"면서 "평생 친정이나 자식들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가슴속 상처를 제3자인 저에게 털어놓으며 마음을 치유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며, 1년도 안 된 이 기록 작가단 활동이 음악을 해온 수십 년의 세월보다 더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야기를 다 내놓으면서 어르신들의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며 "이 사업은 수혜자뿐 아니라 작가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KT에서 40년간 장기 근속했던 이장택(72) 작가는 6.25 참전 학도병과 참전 용사들의 생생한 증언을 기록으로 남겼다. ⓒ 한국노인인력개발원
72세 이장택씨도 KT에서 40년을 근무한 뒤 이 일에 참여했다. 한 어르신의 삶을 기록해 글을 완성해 읽어드리자 어르신이 눈물을 흘렸다.
"결혼 직후 남편의 외도로 한평생 고생하다 혼자 남겨진 어르신의 삶을 글로 풀어 읽어드렸더니 눈물을 흘리시며 '남편이 죽기 전에 (남편에게) 내가 잘못했다는 사과를 듣고 싶었지만 듣지 못했는데, 이 글로 위안을 받은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씨에게도 이 일은 남의 삶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어르신들을 만나면 오히려 제가 더 공부하고 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타인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나 자신의 삶도 깊이 반성하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기록 넘어 '통합돌봄'으로
인기작의 의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작가들은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건강 문제, 경제적 어려움, 가족관계, 외로움 등 현재의 어려움까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필요한 경우 지역 복지기관이나 복지자원과 연결할 수도 있다.
박지혜 원광효도마을시니어클럽 팀장은 "혼자 생활하거나 가족과 교류가 적은 어르신에게 누군가 찾아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정서적인 돌봄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최근 보건복지부가 주요 정책으로 추진하는 지역사회 통합돌봄과도 맞닿아 있다.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을 단순히 서비스 대상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과 욕구를 파악하고 지역사회 자원과 연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김수영 한국노인인력개발원장은 "어르신들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돌봄"이라며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우리가 책으로만 배웠던 근현대사를 직접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피아노를 전공하고 학원을 운영하던 장현희(64) 작가는 암 투병 후 고향으로 내려와 새로운 삶의 길목에서 인생이야기 기록 작가단을 만나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은 장 작가가 어르신을 만나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 한국노인인력개발원
무엇보다 이 일자리의 특징은 '노인이 누군가를 돕는 동시에 자신도 회복하는 일자리'라는 데 있다. 노인역량활용사업은 기존의 단순 활동형 일자리에서 벗어나 참여자의 경험과 전문성을 사회서비스에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기작은 그 취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교장 출신은 글쓰기 역량을, 음악가는 소통 능력을, 기업에서 오랫동안 일한 참여자는 자신의 경험을 활용해 다른 어르신의 삶을 기록한다. 원광효도마을시니어클럽은 올해 19건의 자서전과 9건의 수기 등 28편의 작품을 진행했다. 앞으로 보석·석재 산업 종사자, 원불교 원로 교무, 판소리 문화재 등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품은 사람들의 삶도 기록할 계획이다.
"한시가 급합니다." 박 팀장은 최근 매칭(연결)을 앞둔 한 국가유공자가 갑자기 건강이 악화돼 다른 지역 요양원으로 옮겼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기록해야 할 삶이 있고,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어르신들이 있지만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도 있다. 그래서 인기작은 자서전을 만드는 노인 일자리를 넘어선다.
누군가의 삶이 잊히기 전에 찾아가 듣고, 그 과정에서 외로운 어르신에게 사람이 찾아가고, 필요한 돌봄을 발견하며, 작가로 참여한 노인 역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한 사람의 삶을 기록하는 일이 다른 한 사람의 마음을 돌보는 일이 되고, 그 일을 하는 노인 역시 치유되는 것. '인생이야기 기록 작가단'이 보여주는 노인 일자리의 새로운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