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7일 국회에서 열린 5월 임시국회 제1차 본회의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 등에 관한 특별법안(대안)이 가결되고 있다. ⓒ 연합뉴스
1. 시작하며
우리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하여 주권재민을 천명하고 있다. 주권이란 국가의사를 전반적·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최고의 권력 또는 권위를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국민인 우리는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로서 주권자임을 실감하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이를 체감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장 자크 루소의 다음 말이 더 가슴에 와닿을지도 모른다.
"시민은 오직 의원을 선출하는 동안만 자유롭다. 의원이 일단 선출되면 시민은 그 즉시 노예가 된다."
헌법 제1조 제2항을 이렇게 바꾸어 읽어보자.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통령과 국회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대통령과 국회로부터 나온다."
어떤가? 현실은 후자에 훨씬 가깝지 않은가? 냉철하게 직시하면, 현재 대한민국에서 국가의사를 전반적·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과 국회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주권자인 국민은 정작 국가의사 결정의 자리에서 소외되어 있다. 자크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면, 오늘날 국민은 '몫 없는 이들'에 가깝다. 헌법상 주권자라는 이름만 가졌을 뿐, 실상 주권자로서의 아무런 몫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국민이 주권자의 진짜 몫을 찾을 수 있을까? 그 첩경은 국민이 입법권을 직접 행사하는 것이다. 루소는 입법권을 '국가의 심장'이라 불렀다. 행정권은 대표자가 대신 행사할 수 있지만, 주권의 본질인 입법권만큼은 오직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행사해야 한다고 보았다. 국민이 입법권을 직접 행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국가의사를 최종 결정하는 진짜 주권자가 될 수 있다.
국민이 입법권을 직접 행사하는 대표적인 제도적 장치가 바로 '국민발안제'다. 그러나 국민발안제에는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한계와 부작용이 존재한다. 이에 이 글에서는국민발안제의 의의와 문제점을 검토하고, 현행 입법과정의 한계를 짚어본 뒤, 주권재민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서 '풀뿌리 직접 입법 모델'을 제안하고자 한다.
2. 국민발안제의 문제점
(1) 국민발안제의 의의
국민발안제는 일정 수 이상의 국민이 특정한 법안을 발의하면 이를 국민투표에 부쳐, 다수가 찬성할 경우 법안을 최종 확정하는 제도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2차 헌법개정 당시, 민의원 선거권자 50만 명 이상의 찬성으로 개헌을 제안할 수 있도록 한 '헌법 개정 국민발안제'를 도입한 바 있으나 유신헌법 때 폐지되었다. 현재는 헌법은 물론이고 일반 법률에 대해서도 국민발안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다만 조례에 대해서만 '주민조례발안에 관한 법률'을 통해 다소 제한적인 형태로 주민발안제를 채택하고 있을 뿐이다.
(2) 정족수의 문제와 부작용
국민발안제는 대개 상당한 규모의 발안 정족수를 요구한다. 통상 헌법 발안은 100만 명 이상, 법률 발안은 50만 명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동의를 요구하는 조건은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문제를 낳는다.
첫째, 개인과 작은 단체의 소외: 개인이나 작은 단체가 수십만 명의 정족수를 충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설령 고도화된 전자청원시스템이 뒷받침된다 하더라도, 인지도·조직력·자금력이 부족한 탓에 50만 명은커녕 5,000명의 동의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다. 결국 이러한 정족수는 전국적 규모의 거대 조직만이 충족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대다수 국민의 실질적 발안권은 박탈당하게 된다.
둘째, 정치 서비스 산업화와 돈 잔치 우려: 대규모 정족수를 채우기 위한 홍보와 서명 수집 과정에는 막대한 노력과 비용이 투입된다. 즉, 발안의 성공 여부가 자금 동원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주 단위에서 국민발안제를 시행하는 미국의 경우, 이 제도가 상당한 돈을 들여 전문 대행조직을 활용해야 하는 '정치 서비스 산업'으로 변모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90년 대 캘리포니아주 기준으로 국민발안 하나를 성사하는 데 100만~200만 달러가 소요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민발안제는 또 다른 돈 잔치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셋째, 포퓰리즘과 독재로의 악용 가능성: 정족수를 채우기 위한 캠페인 과정에서 메시지가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국민을 기만할 수 있다.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는 즉홍적이고 선동적인 포퓰리즘의 도구가 될 우려도 다분하다. 특히 막강한 권력을 쥔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악용할 경우, 대중 선동을 통한 독재의 길을 여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진영논리와 가짜뉴스가 범람하고 대결과 적대의 정치가 횡행하는 오늘날의 한국 정치 환경에서는 그 위험성이 더욱 대두된다.
3. 대안: 풀뿌리 직접 입법 모델
(1) 현행 입법 과정의 한계
법을 만드는 과정은 통상 <입안 → 발의 → 심의 → 의결 → 공포>라는 다섯 가지 단계를 거친다. 유감스럽게도 현행 대의제 아래에서는 권력기관들이 이 과정을 철저히 분점한다. 법안의 뼈대를 만드는 입안권과 이를 공식적으로 제출하는 발의권은 행정부의 수반(대통령 또는 지자체장)과 의회(국회 또는 지방의회)가 나누어 갖고 있으며, 제출된 법안을 꼼꼼히 따져보고 결정하는 심의·의결권은 의회가 독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통과된 법을 국민에게 알리는 공포권은 원칙적으로 행정부 수반의 권한이다. 결국, 이 모든 과정에서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틈은 존재하지 않는다.
(2) 풀뿌리 직접 입법 모델의 구조
이러한 권력기관 중심의 독점적 입법 구조를 과감히 깨뜨리고, 주권재민의 헌법 정신에 맞게 입법권을 국민에게 다시 돌려주기 위해 다음과 같은 혁신적인 '풀뿌리 직접 입법 모델'을 제안한다.
첫째, 입안과 발의 단계는 풀뿌리원탁회의가 행사한다.
풀뿌리원탁회의란 동일한 생활권(읍·면·동)에 주소나 연고(직장·학교·단체 등)를 둔 시민 5명 이상만 모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결성할 수 있는 비법인 조직을 말한다. 이는 하나의 읍·면·동 내에 복수로 설립될 수 있으며, 독자적인 입안권과 발안권을 갖는다. 개인이 아닌 '5인 이상이 모인 풀뿌리원탁회의'에 권한을 부여한 이유는 민주주의의 기본이 '숙론(熟論)'에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5명 이상이 모여 숙의 과정을 거쳐 법안을 다듬도록 하되, 기준을 5명으로 대폭 낮추어 국민 누구나 장벽 없이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를 통해 평범한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느끼는 필요와 지혜를 모아 직접 법안을 고안하고(입안), 이를 공식적인 제안으로 연결(발의)할 수 있게 되어 권력자들만의 전유물이었던 법안 제출의 문턱을 시민의 삶의 현장으로 낮출 수 있다.
둘째, 심의와 의결 단계는 주민자치회 또는 시민의회의 단계적 심의를 거친다.
풀뿌리원탁회의가 발의한 법안은 곧바로 표결에 부쳐지는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대표성을 갖는 주민자치회나 공론화된 시민의회에서 꼼꼼한 토론과 검토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단계적 심의 구조를 통해 직접민주주의가 가질 수 있는 즉홍성이나 포퓰리즘의 우려를 불식하고, 법안의 완성도와 사회적 합의를 높인다.
셋째, 최종 확정 단계에서는 의회가 거부할 시 국민(주민)투표를 통해 결정한다.
시민들이 숙의를 거쳐 올라온 법안을 국회나 지방의회가 기득권 유지나 정쟁 등의 이유로 거부할 경우, 주권자가 국민투표나 주민투표를 통해 최종 확정권을 행사한다. 이로써 국민(주민)이 최고·최종 결정권을 갖는 명실상부한 주권자임을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3) 제도적 장점
첫째, 실질적 참여의 평등 보장: 생활권 내에서 5명만 모이면 되므로 자금이나 조직력이 없는 개인, 작은 단체도 입법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 발안에 드는 비용이 거의 없어 돈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다.
둘째, 선동적 포퓰리즘 및 독재 차단: 주민자치회나 시민의회의 심의에 이어 지방의회나 국회로 이어지는 2단계 스크리닝(심의)을 거치므로, 대중 영합적인 포퓰리즘 입법을 걸러낼 수 있다. 또한, 대통령이 대중 선동을 통해 초법적 권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원천 차단한다.
셋째, 분권과 자치 강화: 모든 입법안의 출발과 1차 심의가 읍·면·동 풀뿌리 단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위로만 쏠려 있던 권력의 무게 중심을 우리 삶의 현장인 아래로 내릴 수 있다. 이는 풀뿌리자치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4. 실천적 이행 방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풀뿌리 직접 입법 모델을 실현할 수 있을까? 그 시작점은 제주특별자치도와 세종특별자치시를 비롯해 전국 226개 기초자치단체에서 '풀뿌리원탁회의 활성화 조례'를 제정하는 운동이 될 것이다. 226개 기초자치단체를 기준으로 한 이 조례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 읍면동 주민 5명 이상이 모이면 자유롭게 풀뿌리원탁회의를 구성할 수 있다.
② 풀뿌리원탁회의는 정책안 또는 입법안을 구청장과 구의회에 건의할 수 있다.
③ 풀뿌리원탁회의의 건의안은 읍면동 주민자치회의 심의를 통해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한다.
④ 구청장·구의회는 건의안이 다른 기관의 사무일 경우 해당 기관에 이를 건의한다.
⑤ '풀뿌리원탁회의 지원센터' 설치 등 법률적·행정적·재정적 지원체계를 구축한다.
여기서 정책 또는 입법의 '제안'이나 '발의'가 아닌 '건의'라는 표현을 쓴 이유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는 상위 법령의 한계 때문이다. 현행 법제상 조례만으로는 풀뿌리원탁회의에 입법 발의권을 직접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조례 발의에는 법률의 근거가 필요하고, 법률이나 개헌 발의에는 헌법적 근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 단추는 현행 법제 안에서 가능한 '조례 제정을 통한 건의 형식'으로 시작해야 한다.
만일 이 조례가 전국적으로 제정되어, 전국 3,500여 개 읍면동마다 풀뿌리원탁회의가 촘촘히 뿌리내리고 활성화된다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바로 '풀뿌리 원탁회의 발안법' 제정 운동이다. 국회를 통해 이 법이 제정되면, 풀뿌리원탁회의는 비로소 지방자치단체 조례에 대한 공식적인 발의권을 획득하게 된다. 주민자치회는 이를 정식 심의할 수 있으며, 지방의회가 합리적 이유 없이 거부할 시 주민투표를 통해 최종 확정하는 구조가 완성된다.
마지막 최종 단계는 헌법 개정을 통해 풀뿌리 직접 입법 모델을 완성하는 것이다. 헌법적 근거가 마련된다면 풀뿌리원탁회의는 법률안뿐만 아니라 개헌안까지 직접 발의할 수 있게 된다. 시민의회(주민자치회 등)가 이를 심의하고, 국회가 거부하더라도 국민투표를 통해 최종 확정권을 행사하는 명실상부한 주권재민의 시스템이 실현되는 것이다.
5. 마치며
민주주의의 역사는 몫이 없던 이들이 자신의 정당한 몫을 찾아 나가는 끊임없는 투쟁과 확장의 역사였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제1조 제2항의 선언이 선거일 투표소 안에서만 잠시 반짝이는 박제된 권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대의제 기득권에 포섭된 입법권을 이제 시민의 삶의 현장으로 당당히 끌어내려야 할 때다.
물론 새로운 제도를 완성해 나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현행 법제의 벽을 넘어 조례에서 법률로 그리고 마침내 개헌으로까지 나아가는 여정은 긴 호흡과 끈질긴 실천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 동네 이웃 다섯 명이 모여 앉아 삶의 문제를 토론하는 작은 원탁회의들이 전국 3,500여 개 읍면동에 들불처럼 번져나간다면, 그 어떤 견고한 기득권의 장벽도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풀뿌리 직접 입법 모델의 제도화를 통해 국민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국가의 심장인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일상의 삶 속에서 주권자의 몫을 온전히 누리는 진짜 주권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