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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부터 생긴 불안장애로 일상의 영역이 좁아진 사람이 도전하지 못했거나 도전하지 않았던 것들을 해보는 이야기를 씁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공항을 향하며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이 내겐 가장 큰 설렘이었다. 출국장 특유의 공기와 분주함은 늘 내 가슴을 부풀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여행을 망설이게 됐다. 비행기 공포증 때문이다.
사실 오랫동안 비행을 꽤 많이 했다. 대학생이었던 2000년대 초반부터 숱한 여행을 해왔고, 2013년에는 여행 예능 프로그램 작가로 일하며 2주에 한 번씩 저가항공을 타고 해외 출장을 다니기도 했다. 2016년 뉴욕 출장 때는 심한 난기류를 만나 기내 승객들이 울고 기도하는 상황까지 겪었지만, 그때조차 나는 비행기를 무서워해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2023년, 불안장애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어느 순간 찾아온 비행기 공포증

▲비행기 결항 안내판. ⓒ 이슬
내 불안장애의 많은 증상 중에서도 유독 나를 괴롭힌 건 비행기 공포증이었다. 이륙하는 순간의 굉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땅에서 멀어지는 감각, 비행 내내 계속되는 기체의 흔들리는 느낌. 그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숨이 얕아졌다. 머리로는 비행기가 통계적으로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 중 하나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습관처럼 심박수를 확인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켜야 했다.
유튜브에서 비행기 공포증을 극복했다는 사람들의 영상도 찾아봤고, 항공 안전 시스템을 설명하는 영상들도 수없이 봤다. 하지만 막상 비행기에 올라타게 되면 이런 노력은 모두 속수무책이 됐다. 한번 몸에 새겨진 공포는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문득, 아무렇지 않게 여행을 다니던 예전의 내가 부러워졌다. 두려움 없이 비행기에 오르던 사람이 정말 나였나 싶을 정도였다.
결국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처방 받은 약을 복용해야만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됐다. 비행 한 시간 전 약을 먹으면 심박수가 조금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당연히 혼자서 하는 비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누군가 옆에 있어야 했고, 가능하면 짧은 노선이어야 했다.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이 생겼다. 어디든 갈 수 있었던 나의 영역은 그렇게 계속 좁아져 갔다. 그래서 올해 초, 불안장애 극복 리스트를 적으며 가장 먼저 떠올린 목표가 있었다.
'혼자, 약 없이, 비행기 타기.'
누군가에겐 사소한 목표처럼 들리겠지만 내게는 몇 년째 미뤄온 숙제였다. 더 이상 나의 세계가 좁아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마음먹고 부딪쳐 보기로 했다. 계획은 여러 번 세웠지만, 여러 번 실패했다. 예매 창을 열었다가 닫고, 날짜를 잡았다가 취소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제주에서 일이 터졌다.
지난 4월, 출장 겸 여행으로 제주도에 내려갔다. 제주에 갈 때만 해도 일행이 있었고, 약도 있었다. 문제는 돌아오는 날이었다. 4월 3일 저녁, 기상 악화로 우리가 타야 할 항공편이 결항됐다. 더 큰 문제는 다음날 항공편을 구하는 데 있었다. 연휴와 겹치면서 남아 있는 항공권이 거의 없었던 거다. 가까스로 표를 구했지만, 일행과 다른 시간대의 비행기를 혼자서 타야 했다.
공항 근처 숙소에서 잠을 청하며 불안해졌다. 일행은 돌아갈 비행편을 구해서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혼자 타야 하는 비행기' 생각뿐이었다. 여분의 약을 챙기지 않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렇다고 먼저 떠나는 일행 앞에서 티를 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겨우 잠들었다.
내 안의 호흡 찾기

▲비행 (해당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 rparmly on Unsplash
다음날 결국 혼자 비행기에 올랐다. 다행히 복도 자리였기에 창밖은 최대한 보지 않으려 했다. 옆자리 승객은 이미 눈을 감고 있었고, 나는 미리 다운로드해둔 차분한 음악을 들으며 몸에 힘을 뺐다. 긴장했을 때 온몸에 힘이 들어가면 더 호흡이 어려워진다는 말을 되새기며, 기내의 소음보다는 내 안의 호흡에 집중하려 했다.
결항 사태 속에서 어렵게 구한 항공편이었기에,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안도감도 들었다. 그래서인지 예상보다 불안이 심하게 몰려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승무원의 안내 방송이 들리고, 이륙을 위해 엔진 소리가 커지는 순간 몸은 자동 반응하듯 긴장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워치를 확인했다. 심박수는 90 정도. 생각보다 안정적인 수치였다.
이륙 후 안전띠 표시등이 꺼지자 그제야 내 불안도 조금은 잠잠해졌다. 단지 빨간 불 하나 꺼졌을 뿐인데도 안전을 허락받은 기분이었다. 물론 기상 악화의 영향으로 기체가 흔들릴 때마다 심장은 다시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 대신, 그동안 공포를 견디며 익혀온 나만의 방식에 기댔다.
기체가 흔들릴 때마다 나는 승무원들의 표정을 바라봤다. 그들은 여느 때처럼 평온한 얼굴로 승객을 응대하고 있었다. 비행이 일상인 사람들의 무심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나도 조금씩 진정됐다. 예전에 들은 한 조종사의 말도 계속 떠올렸다.
"난기류는 비포장도로 위를 달리는 것과 같다."
그 말을 떠올리면 흔들림이 아주 조금 덜 무섭게 느껴졌다. 그저 울퉁불퉁한 길 위를 지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창밖에 펼쳐진 울퉁불퉁한 구름을 잠시 바라보았다.
짧은 비행이 끝나고 비행기는 무사히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순간, 다 됐다는 생각에 안도의 미소가 절로 나왔다. 공항을 걸어 나오며 문득 생각했다. 사실 이번 도전은 거창한 결심 끝에 시작된 일이 아니었다. 뜻하지 않은 결항이 나를 떠밀었고, 선택지가 없었기에 어영부영 비행기에 오른 것에 가까웠다. 근사한 방식의 도전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면 용기란 늘 대단한 결심에서만 생기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용기는 도망칠 곳이 없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선택지가 없어 보이는 그 순간에도 결국 선택한 무언가 있다면, 그 선택 자체도 용기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떠밀린 자리에서 끝내 버텨낸 것도, 내게는 충분히 의미 있는 성취였다.
다시 다음 비행을 꿈꾸고 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담담한 마음으로, 오롯이 나의 결심과 준비만으로 떠날 수 있기를. 그렇게 또 한 번, 좁아졌던 나만의 세계가 조금씩 넓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