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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 길의 시작과 끝에 5·18의 흔적이 남아있다)

충장로도 옛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뻗은 길 중의 하나이다. 광주의 고지도를 살펴보면, 광주읍성의 북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큰길이 바로 지금의 충장로다. 오늘날 광주의 중심 대로인 금남로는 근대 이후에 새로 만들어진 길이니, 충장로의 역사가 더욱 깊다.

 정조가 김덕령 의병장에게 내린 교지
정조가 김덕령 의병장에게 내린 교지 ⓒ 여경수

충장로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김덕령 장군의 시호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익호(翼虎)', 즉 '날아다니는 호랑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용맹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반역 혐의로 옥사 하였으며, 후대에는 억울한 죽음으로 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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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정조는 김덕령에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직접 글을 지어 그의 충절을 기렸다. 충(忠)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라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 정신을, 장(壯)은 군사를 이끌고 국난을 극복한 용맹함을 뜻한다.

무등산 자락에는 그를 모신 사당인 충장사도 세워졌다. 본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본정(本町)'이라 부르며 상권을 차지했던 이 길은 독립 이후 김덕령을 기리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식민지의 흔적을 지우고 지역의 역사를 되살리려는 뜻이 길 이름 속에 담겨 있는 듯했다.

 충장로 혼수의 거리
충장로 혼수의 거리 ⓒ 여경수

나는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이곳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중심 무대였으며, 수많은 학생들이 식민지 지배에 맞서 거리로 나섰던 곳이다. 혼수의 거리로 불리는 충장로 4·5가를 걸으니 한복상점과 귀금속 판매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충장치안센터가 나타났다.

 충장로
충장로 ⓒ 여경수

광주충장로우체국 앞을 지나칠 즈음, 이 자리가 조선시대에 관원들이 활을 쏘던 관덕정 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올해 광주에서 개별공시지가가 가장 높은 곳이 바로 이곳이라 하니, 예나 지금이나 광주의 중심지였음이 분명하다.

관덕정 인근, 지금의 무등빌딩 자리에는 객사인 광산관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정조는 광산관에서 호남 인재들을 위한 특별 과거시험인 '호남정시'를 열었다. 정조가 직접 답안지를 검토했다고 한다. 국난을 이겨낸 호남의 충절을 귀하게 쓰겠다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아기자기한 상점들 사이를 빠져나오니, 어느새 옛 전남도청이 눈 앞에 나타났다. 이곳에서 충장로는 금남로, 서석로와 맞닿는다. 광주의 의로운 기운은 일제 침탈의 시대에도 꺼지지 않았다. 1909년 일본은 '남한대토벌작전'을 감행하며 의병 활동이 거셌던 호남 지역을 표적으로 삼아 잔혹한 탄압을 이어갔다.

그러나 산천을 피로 물들였던 의병들의 정신은 도시의 학생들에게로 이어졌다. 충장로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이 식민지 차별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던 거리였디. 그 정신은 마침내 1980년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제봉로에는 고경명의 호가, 금남로에는 정충신의 작호가, 충장로에는 김덕령의 시호가 새겨져 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몸을 던졌던 이들의 이름이 지금도 광주의 길 위에 살아 있다. 충장로라는 이름 안에는 단순한 지명 이상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충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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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충장로·금남로·서석로·제봉로, 광주의 길을 걷다

내게 힘이 되는 생활 헌법(좋은땅 출판사) 저자, 헌법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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