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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1 09:01최종 업데이트 26.06.01 09:01

종로 4가 창신육회에서 거인을 만났다

[시로 읽는 오늘] 박다래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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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에서 기획한 '시로 읽는 오늘'을 연재합니다. 시로 아침을 시작한다면, 수많은 갈등과 전쟁도 줄어들 것입니다. 독자들은 힘 있는 언어를 익혀 튼튼한 내면을 가꿀 수 있고, 다양한 시를 통해 새로운 시민의 감수성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첨예한 문제를 시인의 예민한 감각으로 길어 올린 한국시를 매주 두 편씩 선정하여, 추천 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이사
- 박다래

종로 4가 창신육회에서 거인을 만났다 우연히 합석한 우리는 식탁 위에서 끓고 있는 소고기뭇국 다섯 그릇을 미동도 없이 마셨다 떠들썩한 무리에 섞여 나는 거인의 어깨에 매달려 방으로 돌아왔다

방은 거인 하나가 들어가기에 충분히 작았다 적당한 일조량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방에서 거인은 짐을 싸는 것을 도와준다고 했다 거인은 느리게 나무 상자에 접시를 담았다 나는 거인의 엉덩이골을 바라보았는데 그곳에는 붉은 털이 촘촘하게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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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은 어디로 짐을 옮겨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거인의 물로 거인의 수맥으로 짐을 옮기고 있었다 집 앞, 쌓여 가는 짐 앞에서 우리는 쉽게 무력해졌다 기압이 높은 날씨에는 거인의 활동이 느려진다고 한다

입에 파이프 물고 거인은 돌계단에 앉아 있었다 방은 더 이상 나의 방이 아니다 내일은 오늘보다도 더 맑을 것이라고 했다

출처_시집 <우엉차는 우는 사람에게 좋다>, 민음사, 2025
시인_박다래: 2022년 <현대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우엉차는 우는 사람에게 좋다>가 있다.

 방은 거인 하나가 들어가기에 충분히 작았다.
방은 거인 하나가 들어가기에 충분히 작았다. ⓒ 박유하 시인(디지털 포엠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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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이사를 많이 했다. 어릴 적의 잦은 이사는 부모의 불안이었겠으나, 청년 시절의 이사는 스스로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불안이었다. 불안은 종종 허기와 함께 찾아오곤 했는데, 이 시의 화자처럼 "소고기뭇국 다섯 그릇을 미동도 없이 마"실 정도로 마음의 허기가 질 때면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었다. 없는 거인에게라도, 상대가 누구라도 내가 매달릴 수 있는 거인이기를, 바라기는 바라도, 그 바라는 마음이 내 방처럼 비좁아 그를 다 들일 수 없을지라도, 그런 없는, 있다고 믿고 싶은 거인에게라도. 그런 곤궁한 마음을 들킨 듯 쌓여가는 짐들 앞에서 망연한 눈길을 거둘 수 없었을 때 그저 무기력해지기만 했을 때, "방은 더 이상 나의 방이 아니고" 아직 도착하지 못한 방이 어쩌면 지금보다 허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잔뜩 웅크리기만 했을 때, 깨지기 쉬운 접시 같은 시간도 느리게 돌봐줄 줄 아는 거인 하나 곁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거인이 있어, 비록 "거인의 수맥으로 짐을 옮"겨주지는 못했을지라도, "내일은 오늘보다도 더 맑을 것"이라는 허허로운 기대의 말이나마 파이프 담배 너머로 슬쩍 건네줬더라면 어땠을까. 막막한 이사의 시절을 외롭고 위태롭게 건너가는 이들에게 이제 누가 거인이 되어줄까, 되어줄 수 있을까 생각한다. (김근 시인)

#박다래시인#이사#우엉차는우는사람에게좋다#한국작가회의#시분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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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오늘

김근 (hanjak1118) 내방

(사)한국작가회의는 이 땅의 대표적인 문인단체로서 표현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정신을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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