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복지국가다. 부정하고 싶어도 세계적 수준의 보편적 제도를 갖춘 나라다. 안타깝게도 그 출발에 노동운동이 기여한 바는 적다. 권위주의 독재 정부가 만들어 놓은 앙상한 제도가 바로 산업재해보상보험과 국민건강보험이다.
이 왜소한 제도를 그나마 여기까지 만들어 온 데는 시민사회·농민·노동운동의 역할이 크다. 이제 그 마지막 사회보장제도의 조각이 채워지는 중이다. 바로 아프면 쉴 권리 보장의 최소 조건인 유급병가와 상병수당이다.
마지막 사회보장제도의 조각
아픈 건 내 탓이었다. 고된 생산 노동을 마치고 이어지는 가정에서의 재생산 노동때문에 잠을 못 잤더라도 아프면 후회한다. '그날 잠 좀 일찍 잘걸.' 내가 몸 관리하지 못한 탓에 아프니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 한다.
출근은 당연하고, 행여라도 아파서 물량을 못 맞추거나 동료에게 짐이 될까 눈치 보며 버틴다. 주말까지만 버티자는 마음으로. 산재보상보험과 건강보험이 만들어진 후에도 노동자들은 '아프다'는 것과 '결근'이 한 문장에 놓일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사이 많이 좋아졌다. 그래도 이제 공무원이나 어느 정도 규모의 사업장에서는 아파서 쉰다고 급여를 깎진 않는다. 단체협약으로 유급병가를 꽤 오랜 기간 보장한다. 사업주의 선한 마음이라 오해하면 안 된다. 투쟁의 결과이고 사회적 임금의 한 형태다.
다만 전체 노동자의 3분의 1 정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그마저도 단체협약으로 버젓이 있는 유급병가를 편하게 쓰는 노동자 수는 더 줄어든다. 여러 겹의 곤란함이 섞여 있어 여기부터는 설명이 어려워진다. 일부 사업장은 단체협약에서 유급병가를 보장한다. 일부는 쓰고, 나머지는 눈치 보며 편히 못 쓴다.
이조차도 대다수 사업장에는 없다. 유급병가 없는 사업장은 아프면 월차를 쓴다. 병가는 무급이니 월차를 먼저 쓰는 것이다. 하지만 병치레를 오래 할 상황이면 이마저도 무용지물이다. 그만두거나, 운이 좋아야 장기 무급휴가를 받는다.
한국은 (공무원을 제외하면) 유급병가와 상병수당이 법에 없다. 유급병가와 상병수당을 주장하는 시민·노동·사회 연대체인 '아프면쉴권리 공동행동'은 이 문제에 주목한다. 유급병가는 아파서 1~3일 쉬어가는 기간의 급여를 보장한다. 입원을 하거나 수일 이상 병치레를 할 때는 초기 며칠(대기기간) 이후부터의 결근을 상병수당이 보장한다.
유급병가는 근로기준법에 없지만, 상병수당은 내년 7월 도입될 예정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제도가 다 완성되더라도 모든 일하는 사람의 질병에 대한 소득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영업자,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제도 논의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유급병가와 상병수당의 공백 메꾸기
전국의 8개 광역과 기초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는 유급병가를 도입했다. (실제 시행되지 않아도 조례가 있는 곳은 좀 더 있다.) 적용 범위와 보장하는 소득의 수준은 조금씩 다르다. 공통점은 영세 자영업자와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가장 앞서 지자체 조례로 유급병가를 도입한 서울시의 초기 경험에 관한 연구는 이 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혜자뿐 아니라 탈락자에게서도 제도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소득 수준과 교육 수준이 낮고 아파도 출근하는 '출근주의'를 경험한 환자들에게 질병을 조기 발견하는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났다. 제도 이용자들은 이 제도가 생계를 유지하고 건강 회복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1)

▲현행 지자체 유급병가 현황 ⓒ 아프면쉴권리공동행동
내년 7월 도입이 예정된 상병수당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모든 노동자의 질병을 보살피기는 어렵다. 유급병가 법제화 투쟁이 이 부족함을 메울 수 있지만, 일하는 사람의 상당수를 배제할 가능성이 크다. 지자체 유급병가 요구는 바로 이 공간을 메운다. 우리 동네 노동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이 요구는 몇 가지 주요한 의의가 있다.
첫째, 사회보장의 확대는 사회적 연대의 실천이고, 지자체 유급병가는 자본에 맞서는 지금과 미래의 나와 우리를 위한 요구다. 국민연금이 세대 갈등의 원인이 되고 연기금의 투자 수익률이 제도의 목표가 되어버린 상황은 자본의 치밀한 기획이다.
건강보험이 재정 고갈과 보험료 인상이라는 논의에서만 맴도는 것도 마찬가지다. 상병수당과 유급병가를 둘러싼 공론장도 이와 유사하다. 지금 나의 사업장은 유급병가가 보장되고 있어 나와는 무관한 요구라 생각하는 노동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정년 이후 미래의 내 사업장은 어떤가? 그곳은 지금의 이곳과 다르다.
더군다나, 대다수 노동자는 지금도 유급병가가 보장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의료보험 통합일원화 투쟁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답은 쉽다. 안정적인 직장의료보험을 가진 노동자도 농민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투쟁에 연대했다. 사회보장제도는 사회적 연대가 기본 원리이고, 지금과 미래의 나와 우리를 위한 정책이기 때문이다.
둘째, 노동기본권을 바로 세우는 전형을 전국 곳곳에 만들 수 있다. 내년 도입될 상병수당은 제한적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최소한의 소득 보장으로 설계 중이다. 법정 유급병가에 정부는 관심이 없다. 더욱이 우리 사회는 '아프면 쉴 수 있다'는 권리의 언어가 규범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다양한 시도와 경험, 이를 토대로 한 효용감을 확산하고 운동으로 조직할 필요가 있다.
선거는 투쟁의 공간이고 기회의 시간이다. 보수 양당의 정치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지방선거판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보자. 그 결과로 일부 지자체에서 유급병가를 도입하고 그 경험을 공유하자. '그런 게 되겠어?'가 아니라 아프면 당당하게 쉬고 회복하는 이야기들이 쌓여야 한다. 지자체 유급병가는 상병수당의 한계 극복과 법정 유급병가 투쟁의 촉발제가 될 수 있다.
아프면 쉴 권리는 정책 도입만으로 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책의 기능은 사회적 경험의 축적이고 새로운 투쟁의 출발선이기도 하다. 2026년 지방선거, 지자체 유급병가 도입 요구는 자본에 맞선 사회적 연대의 실천이다. 우리 동네 노동기본권을 위해 투표하자.
1) 문다슬·유사라·김소담·정혜주·노진원. 2021. "서울형 유급병가지원 제도를 위한 논리모형 설계와 초기 평가 결 과". 보건사회연구 41(3), 269-297.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5월호에도 실립니다.이 글을 쓴 최홍조 님은 아프면쉴권리공동행동 집행위원,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