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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8월19일 박정희 대통령 배우자 육영수 여사의 유해가 청와대 정문을 나오고 있다.
1974년 8월19일 박정희 대통령 배우자 육영수 여사의 유해가 청와대 정문을 나오고 있다. ⓒ 대통령경호처

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교포 23세 청년 문세광이 총을 쏘는 순간, 박종규 체제 아래 제도화된 충성의 질서는 산산이 무너졌다. 문세광은 첫 발을 오발해 자신의 허벅지를 쏜 뒤 연단을 향해 달려가며 네 발을 잇달아 발사했다. 이에 경호실장 박종규도 즉각 응사했으나 현장에 있던 합창단 여고생이 피격돼 숨졌다.

박정희는 나무에 철판을 덧댄 연설대 뒤로 몸을 숨겨 총격을 피했지만, 대통령 부인 육영수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돼 응급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사망했다. 육영수의 사망은 경호실의 물리적 실패를 넘어, 유신체제가 의존하던 카리스마적 권위의 균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복잡한 정치적 계산 속에서 발탁한 차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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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독일의 정치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경고한, 제도화의 실패로 인해 카리스마 권력이 위기에 빠지는 전형적 사례였다. 박정희의 개인적 자질에 의해 정당화되던 카리스마적 권위가 유신체제라는 법적 질서로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육영수 피격 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실패를 넘어 박정희 개인숭배의 균열을 드러냈고, 경호실의 구조적 변화를 촉발했다.

당일 연속된 행사와 허술한 검측 등으로 경호상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난 만큼, 근본적인 처방과 새로운 경호 비전이 요구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차지철이 등장했다. 그는 박종규가 구축한 체계를 계승하면서도, 충성의 의미를 신화화(mythologization)라는 환상적 차원으로 한층 끌어올렸다.

1974년 8월 22일, 세 번째 경호실장으로 취임한 차지철의 경호실은 단순한 경호조직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신체제의 상징적 성전이자 권력 재생산의 제의적 장치였다. 박정희가 그를 발탁한 것은 군사 쿠데타의 동지였던 박종규에서 베트남전 영웅 차지철로 경호의 축을 옮겨, 이를 효율성의 논리에서 서사적 카리스마의 영역으로 재구성하려는 정치적 계산이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대 차장을 지낸 그는, 이듬해 소령으로 진급한 뒤 중령으로 예편했고, 충성의 원형 신화를 새롭게 써 내려가기 위해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의 집무실에는 "각하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는 신념이 새겨져 있었다.

전임 경호실장 박종규와 국무총리 김종필 등은 차지철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신 예비역 해병 준장 오정근(훗날 국세청장을 역임)이 추천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박정희가 당시 40세의 차지철을 발탁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정희가 차지철을 경호실장으로 낙점한 배경에는 생전에 육영수가 그에게 보였던 호의적 평가가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여성 관계에서도 방탕하지 않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로서는 세상을 떠난 부인에 대한 정서적 기억을 되살리며, 그런 인물을 곁에 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8·15 피격 사건 이후, 분절되고 흔들리던 경호의 합리성은 차지철의 손에서 상징적 질서로 재편되었다. 충성은 더 이상 단순한 조직 규범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정체성을 떠받치는 근본 신화이자 권위주의 통치의 문화적 토대로 격상되었다. 다시 말해 경호실은 국가 안보의 최후 보루를 넘어, 유신 이데올로기를 떠받드는 성전으로 기능했다. 차지철은 박종규가 구축한 '폐루프 체계'를 계승하는 동시에, 충성을 신화적 서사로 변환시켰다. 그들에게 경호요원은 단순히 생명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라, 대통령의 그림자이자 국가의 성벽이었다.

이는 차지철의 발탁 단계에서부터 이미 예고된 변화였는지도 모른다. 박종규가 제도화를 통해 기계적 충성을 구현했다면, 차지철은 초급 장교로 예편한 뒤 국회의원으로서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베트남전 참전 반대 운동에 나섰던 경험 등을 바탕으로 나름의 영웅 서사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바로 그 차지철을 통해 경호를 군사적 효율성의 차원을 넘어 상징적 카리스마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차지철은 경호요원을 하나의 순교자 집단처럼 재편했다. 아침마다 한자리에 모인 경호요원들은 "대통령 한 분이 국민 백만 명"이라는 식의 설교를 들어야 했고, 그의 경호실은 군대라기보다 종교 집단에 가깝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였다.

경호청사에 기도실 마련해 틈틈이 예배와 기도

 1979년 1월 24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호실 작전차장보 이취임식에서 휘장을 달아주고 있다.
1979년 1월 24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호실 작전차장보 이취임식에서 휘장을 달아주고 있다. ⓒ 대통령경호처

차지철의 강한 신앙심 역시 그의 통치 방식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첫 결혼을 한 뒤 여섯 달 만에 이혼한 이후, 그는 기독교 신앙생활에 깊이 몰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육사 시험 낙방으로 인한 열등감과 실패한 결혼이 남긴 외로움이 그를 신앙으로 이끌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그는 집안에 기도 공간을 마련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노모와 함께 예배를 드렸고, 청와대 경호청사 3층 집무실 인근에도 기도실을 두어 틈날 때마다 십자가 앞에서 예배와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오랫동안 군홧발로 상징되는 차지철이 기도실에서 어떤 심정으로 무엇을 바라며 기도했는지, 그 내면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차지철의 기독교 신앙과 박정희를 향한 충성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그의 신앙은 단순한 내면적 확신에 머무르지 않고, 충성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기도와 금욕이라는 엄격한 수행은 결국 "박정희=신의 대리자"라는 등식으로 수렴되었고, 그 결과 경호실은 하나의 기독교적 친위 공동체로 변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신앙은 충성을 증폭시키는 촉매로 작용했으며, 개인에 대한 숭배는 "로열티"라는 언어로 세련되게 포장되어 초월적 사명으로까지 격상되었다. 그리하여 권력은 신앙의 외피를 두르고 스스로를 정당화했고, 이는 권위주의 체제를 떠받친 신앙의 정치화가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가 되었다.

차지철은 평소 "경호실은 각하의 신변만 보호하는 곳이 아니다. 각하가 자리에서 물러나면 경호실은 아무 소용이 없다. 경호실은 각하의 자리까지도 보위해야 한다"는 소신을 내세웠고, "각하를 지키는 것이 국가를 지키는 것"이라는 문구를 집무실에 걸어두기도 했다. 맹목적 충성이 신격화와 순교의 논리로 기울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실제로 박정희 경호요원 출신의 한 인사는 차지철이 경호요원은 대통령을 위해 죽어야 하는 순교자 집단이라는 신념을 반복적으로 강조했으며, 경호요원들에게 극한의 생존 훈련과 가상 암살 시뮬레이션을 수시로 시켰다고 전했다.

기독교 신앙은 차지철의 경호실 조직문화를 교회화와 순교주의로 재편하며 맹목적 충성을 극대화했다. 경호조직을 성전으로 승화시키려는 각종 의식과 제도가 시너지를 발휘할수록, 성전으로서의 열망은 더욱 깊어졌다. 단순한 맹목적 충성만으로는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음을 체감한 차지철은, 메시아적 박정희와 속죄자적 국민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하는 제사장의 직분을 꿈꾼 것으로 보인다. 신앙의 제국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서는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친위대가 필수적이었다.

3선 국회의원 출신인 차지철은 법적 정비를 통해 경호실을 권력기관으로 격상시키려 했다. 1974년 9월 11일 설치된 '대통령경호·경비대책통제단'은 대통령 경호안전 관련 사항을 범정부적으로 통합·조정하는 대통령 직속 합동기구였다. 8·15 사건 이후 청와대 폭파 음모, 무장공비 침투 등 대형 사건들을 종합 재검토한 결과, 경호실 단독으로는 경호·경비·정보·치안의 분절적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이에 경호실과 경찰·군·정보기관을 아우르는 상설 협의체가 요구된다는 결론을 받아들여 설치한 것이었다.

절대적 충성을 위한 친위대 조직 등 군사화

대통령경호안전대책위원회의 모태가 된 대통령경호·경비대책통제단은 오늘날 범정부 합동경호 체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아 다자간 정상회의나 테러 위협에 대비해 지속적으로 확대 운영되고 있다. 차지철은 통제단 설치로 경호 효율화에 일정 성과를 거두었으나, 충성의 신격화와 결합되면서 자신의 권력욕으로 정부 조직을 총동원하는 특별기구를 통해 충성 중심의 독단 구조를 고착화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의 영향력은 군과 경찰은 물론 정보기관, 정부 부처까지 실핏줄처럼 스며들게 되었다.

차지철은 민간인이 군을 지휘할 수 있도록 경호실의 무장화를 본격 추진했다. 취임 3개월 만인 1974년 11월 대통령경호법 개정을 통해 경호실장 직급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하고 직제를 개편한 데 이어, 1976년 2월에는 관계기관 협조·지원 권한을 명문화해 작전부대를 사실상 지휘할 수 있게 했다. 더 나아가 호랑이 세 마리와 독수리를 둘러싼 별 10개의 상징물을 경호실 심볼로 채택하고, 히틀러의 SS 제복을 연상시키는 특제 작전부대 제복을 도입했는데, 이는 미국 <타임>지에서조차 "SS 스타일 제복"이라 비판하며 국제적 조롱의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러한 친위대화는 8·15 저격사건 이후 충성의 제도화에 균열이 생긴 경호실의 실권을 회복하고, 대통령을 직접 보호할 전담 부대를 확보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권력 유지를 위한 필요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치사회학의 전투화(combatization) 이론에 따르면, 이는 민간 경호 조직에 군사적 집단의식을 이식하여 충성을 생존 경쟁의 서사로 재구성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총알받이가 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차지철의 선언은 강한 카리스마를 띠었으며, 그는 모집 과정에서부터 개인의 희생을 국가적 영광으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논리는 개인의 자유 억압을 국가 생존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하려는 유신체제의 이데올로기와 정확히 맞물렸다.

청와대 일대에는 슈츠슈타펠 복장의 경호 인력이 급증했으며, 장갑차와 전차 같은 중장비까지 배치되었다. 경호실의 친위대화는 이른바 '국기 하기식'으로 이어졌다. 차지철은 1975년경부터 경호부대 사열을 '국기 하기식'이라 명명하여 정례화했다. 경호실 요원은 물론, 청와대 경비를 담당하는 수경사 30·33경비단과 공수부대, 경찰(101경비단) 등이 매주 경복궁 신무문 안쪽의 30경비단 연병장에 집결해 열병과 분열을 실시했다. 이는 표면적으로 부대의 단결과 사기 진작, 정신무장 강화를 목표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차지철 개인의 권력 과시라는 점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국기 하기식은 충성의 신격화라는 측면에서 일종의 제의적 행위로 기능했다. 차지철의 지시에 따라 경호실 병력과 화기를 총동원해 진행한 의식은 단순한 사열을 넘어선 정치적 상징 행위였다. 이를 통해 그는 권력의 '2인자'로서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고, 충성의 규범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했다. 형식상 경호실 내부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군의 날 사열식을 연상시키는 연출을 통해, 차지철은 마치 군 통수권자처럼 비쳤다. 이후 행사 규모가 확대되면서 이는 상징 권력(symbolic power)을 행사하는 장으로 자리 잡았고, 장·차관과 여야 정치인, 언론 및 학계 인사, 주한 외교 사절까지 초청되며 의례를 통한 지배 질서의 재생산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 결과 차지철은 비공식적 '2인자'로서의 위치를 대내외에 각인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군을 장악하고 싶어한 권력의 2인자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12월 18일 대통령경호실 창설 15주년 기념 만찬에 참석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12월 18일 대통령경호실 창설 15주년 기념 만찬에 참석했다. ⓒ 대통령경호처

청와대 경호부대가 연병장에 도열한 가운데 군악대의 팡파르와 함께 사열식이 시작되면, 당시 경호실 작전차장보였던 육군 준장이 행사를 지휘했다. 전두환과 노태우 역시 작전차장보로서 제병지휘관 역할을 수행하며 젊은 장교들을 차지철 주변으로 결집시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한편, 행사 초청을 받았음에도 끝내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당시 비서실장 김정렴은 "대통령도 아닌 민간인 경호실장이 왜 군 병력을 사열해야 하는가. 이는 경호실장이 군을 장악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어 그 의도가 의심스러웠다"고 회고했다. 권련 내부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던 것이다.

경호실의 친위대화 과정에서 차지철은 하나회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며, 경호실을 사실상 군 내부의 정치적 사관학교와 같은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그 결과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충성의식을 의례화하며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던 그는, 나아가 스스로를 정치적 메시아로까지 상정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권력의 근원이 박정희에게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단순한 보좌에 머무르지 않으려 했던 그의 의지가 엿보인다. 그는 하기식을 마친 뒤 군 지휘관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했으며, 때로는 초청 인사들을 경복궁 경회루로 안내해 연회를 겸한 칵테일 파티를 열기도 했다.

차지철이 주도한 충성의 신격화는 나아가 헌정곡의 형태로까지 구체화되었다. 그는 충성심을 노랫말로 형상화해 '충정가'를 제작했는데, '5·16 넓은 광장은 밝은 빛을 심어주신 오직 한 마음 잘 사는 나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특정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헌신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훗날 경호처 창설 60주년을 맞아 제작된 헌정곡의 가사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당시 육군 장교로 경호실에 근무했던 임응환은 "경호실 행사에서는 애국가에 이어 충정가를 제창했다. 이는 대통령의 안위를 기원하고, 충성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차지철에 의한 충성의 신화화는 곧 권한의 일탈과 권력의 월권으로 이어졌다. 그가 권력 서열 2인자로 군림한 공간은 청와대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국회에서도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으며, 그 위세는 통상적인 정치 권력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여당인 공화당 의원총회에서는 발언 순서와 내용에 이르기까지 차지철이 사실상 개입해 관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공화당 국회의원이었던 이만섭은 "국회 내에 차지철의 영향력 아래 있던 의원이 30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이 수시로 국회 상황을 보고함으로써 그의 권력 유지에 기여했다"고 증언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경호실 권력은 급속히 비대화되며 누구도 견제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박정희와 관련된 거의 모든 사안, 경호는 물론 의전, 보고, 정보, 동선에 이르기까지 차지철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처리되기 어려운 구조가 형성되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독극물이 묻을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각종 보고서와 결재 서류까지 직접 통제하려 했다. 이는 경호실의 기능이 본래의 범위를 넘어 확장되었음을 의미하며, 비서실과 중앙정보부와의 충돌을 필연적으로 초래했다.

특히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부마항쟁 당시 차지철은 "시위대 100만~200만 명을 사살한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김재규를 두고는 "행사에나 참석하는 중정부장"이라고 비아냥거리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김재규와의 대립, 그것이 시해로 이어지다

향후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전두환·노태우·김복동 등도 차지철의 경호실 작전차장보 출신이었다. 차지철 중심의 충성 네트워크 형성으로, 경호실은 청와대 최상위 기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에 따라 유신체제의 기관 간 권력다툼이 제동장치 없이 가속화되면서 벼랑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경호실(물리적 방벽)과 중앙정보부(정보 장벽)는 박정희를 둘러싼 양대 축이었으나, 내부 갈등이 일대 격돌 양상을 보였다. 차지철이 충성의 신화화를 주도하며 전제군주로 등극한 박정희에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해 1979년은 현대사의 균열이 한꺼번에 폭발한 격변의 해였다. 정치권에서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되며 유신체제와의 정면 대결이 본격화되었다. 차지철은 정치권 공작에 나섰지만, 이미 번져 가던 저항의 불길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뒤 강경파 차지철과 온건파 김재규의 갈등은 점점 첨예해졌고, 차지철을 지나치게 비호하는 박정희의 태도는 김재규에게도 적지 않은 불편함을 남겼을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 또한 회고록에서 내부 권력투쟁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취지로 평가한 바 있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9월 16일자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유신헌법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공화당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으며, 미국 정부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 철회를 촉구했다. 이에 공화당과 유정회는 합동 조정회의에서 김영삼 제명을 결의했고, 그 조치는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되었다. 이 사건은 부마항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고, 차지철의 충성 신화가 실제 정치 위기 앞에서 시험대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차지철은 "탱크로 쓸어버리겠다"는 식으로 강경 대응을 주장했지만, 김재규는 "차지철의 오만이 국가적 혼란을 부른다"고 진단해 전혀 다른 현실인식을 보였다. .

그동안 축적된 절대권력에 대한 폐쇄적 충성 구조는 오히려 경호실을 고립시켰다. 내부에서는 '충성 자체가 성공'이라는 환상이 지배했지만, 바로 그 점이 10·26 직전 김재규가 품었던 불만과 위기의식을 간과하게 만든 배경이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는 박정희가 주재하는 만찬이 열렸고, 그 자리에서 김재규는 총을 꺼내 차지철을 향해 발사했다. 차지철은 부상을 입고 화장실로 피신했으나 끝내 치명상을 입었고, 궁정동 안가에 함께 있던 경호원들 역시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충성 신화가 총성 앞에서 무너진 순간이었으며, 유신체제 내부의 균열이 표면으로 드러난 장면이었다.

이 사건은 내부 배신의 필연성을 보여준다. 차지철은 8·15 저격 사건 뒤 <암살사>를 집필하면서 내부 배신을 가장 경계해야 할 것으로 지적했지만, 끝내 '각하'를 지키지 못했고, 자신의 목숨까지 잃어야 했다. 카리스마적 충성은 배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며, 오히려 권력투쟁을 증폭한다. 차지철 경호실은 안가 경호 미비와 내부 갈등을 무시하며 신화 재생산에 집착했다. 10·26 사건은 유신체제의 자기 붕괴 메커니즘, 충성 네트워크의 내부 균열을 보여준다. 한국 정치문화의 지도자 숭배와 충성 강요라는 고질적 패턴의 원형이라 하겠다.

충성은 미덕이 아니라 배신의 다른 이름

 1980년 3월 차지철 경호실장의 장례식에서 시신을 운구하고 있다. 차지철의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 영락교회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1980년 3월 차지철 경호실장의 장례식에서 시신을 운구하고 있다. 차지철의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 영락교회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 대통령경호처

차지철이 이끈 경호실은 '충성의 신화화'를 통해 체제에 단기적인 안정의 외피를 제공했다. 유신체제는 이 충성 신화를 문화적 정당성의 언어로 가공해 부마항쟁의 격랑 속에서도 가까스로 버텼다. 그러나 그 견고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화로 포장된 충성은 오히려 국민과 권력 사이의 거리를 더욱 벌렸고, 민주화 저항의 불씨를 은밀히 키웠다. 그 결과 10·26 사건은 우연한 돌발이기보다, 누적된 균열이 폭발한 국면으로 읽을 수 있다. 차지철은 충성을 일상적 직무에서 영웅 서사로, 다시 신앙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며 권력의 상징 체계를 재구축했지만, 그 체계는 현실의 총성 앞에서 급속히 붕괴했다.

충성은 처음에는 제도의 언어로 길들여진다. 직무의 규범과 조직의 윤리 속에 편입된 충성은 합리와 책임의 외피를 두르고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권력이 이를 요구하고 보상하는 순간, 충성은 갈수록 규범의 경계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그것은 더 이상 기능이 아니라 의미가 되고, 의미를 넘어 서사가 된다. 이때 충성은 신화로 승격된다. 개인의 선택은 운명으로 포장되고, 권력에 대한 복종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숭고한 미덕으로 재해석된다. 문제는 신화가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신화화된 충성은 비판을 허용하지 않기에 내부의 균열을 외면하고, 그 균열은 결국 파국의 형태로 폭발한다. 그때 충성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 배신의 다른 이름으로 드러난다.

권력을 떠받치던 언어와 감정이 한순간에 붕괴하면서, 충성은 권력을 지키지 못한 책임으로, 혹은 권력을 넘어선 과잉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충성은 제도에서 신화로, 신화에서 배신으로 이어지는 아이러니한 궤적을 그린다. 권력은 이 순환을 반복한다. 새로운 권력은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겠다고 말하지만, 충성을 요구하는 구조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같은 궤도를 다시 밟게 된다. 충성은 다시 제도 속으로 편입되고, 다시 신화로 포장되며, 결국 붕괴를 향해 나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충성의 신화화는 대한민국 대통령제가 오랜 시간 축적해 온 유산이자, 쉽게 끊어내지 못한 구조적 습속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관성이며, 권력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가장 은밀하면서도 강력한 방식으로 남아 있다.

#대통령경호처#김수병#차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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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경호처, 63년을 말한다

김수병 (pangon21) 내방

한겨레신문사에서 시사 주간지 <한겨레21> 발행에 참여했고, 대통령경호처에서 공보관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생산시민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첨단과학 오디세이>, <마음의 발견>, <사람을 위한 과학> 등의 책자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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