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과 김대중 전 대통령 어록비. 기념탑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6.25 전쟁 직후에 조성한 것이다. ⓒ 서부원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다 보면, 뭔가 허전하고 설명하기 난감할 때가 있다. '사건'만 있고, 주동한 '사람'이 없는 경우다. 대개는 특정 사건과 인물이 바늘과 실처럼 따라오기 마련이지만, 교과서엔 주동 인물 없이 사건의 이름만 외따로 등장하는 경우가 여럿 존재한다.
예컨대, 동학농민운동 하면 대번 전봉준 장군을 떠올리고, 3.1운동 하면 유관순 열사의 이름이 맨 앞이다. 봉오동 전투라고 하면 홍범도 장군이고,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 장군을 거의 본능적으로 들먹인다. 일당백으로 홀로 싸운 게 아닌데도 주동자는 사실상 사건과 동일시된다.
대표적인 게 6.10 만세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이다. 이 둘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항일운동으로, 교과서에 단원 하나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크다. 쇠락해 가던 항일운동의 불씨를 되살린 변곡점으로, 특히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역사 교사들조차 두 사건의 주동자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저 학생들이 주도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수능에서도 약방의 감초처럼 출제되는 내용이지만, 인물에 대해선 일절 묻지 않는다. 둘을 각각 민족유일당 운동과 신간회의 역할을 관련지을 따름이다.
잊히고 지워진 그들의 이름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리는 기념물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운동장 주변의 산책로 이름부터 '성진로'다. 독립운동을 주동한 단체인 '성진회'에서 따온 것이다. 산책로 에 세워진 안내 팻말도 죄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관한 것이다. ⓒ 서부원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그 이유는 주동자들이 대부분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분단의 모순 속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인물이라도 사회주의자라면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질 못했던 거다. 반세기가 넘는 동안 독재정권이 지속되면서 그들의 이름은 잊히고 지워졌다.
김일성의 북한 정권에 협력한 이들은 말할 것 없고, 해방을 보지 못하고 순국한 이들까지도 이름을 드러내지 못했다. 심지어 이미 세상을 뜬 그들에게까지 6.25 전쟁과 분단의 책임을 들씌웠다. 불과 이태 전까지도 홍범도 장군조차 '빨갱이'로 치도곤당하는 시절 아니었나.
굳이 구분하자면, 6.10 만세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이었다. 학생이라는 두루뭉술한 이름을 앞세워 사회주의의 공과 역할을 애써 감출 필요는 없다. 교과서에서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바퀴로 전개됐다고 명토 박았다.
지난 월요일(4월 27일) 오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상지인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일고)를 찾았다. 당시엔 광주고등보통학교였고, 해방 후 광주서중학교를 거쳐 광주일고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일제가 허문 광주 읍성의 북문 옆이고, 오른편 광주천 너머가 신사가 자리했던 광주공원이다.
통학 기차 안에서 일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한 일이 빌미가 된 '나주역 사건' 나흘 뒤인 11월 3일, 양국 학생들이 충돌하면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시작됐다. 그날은 메이지 일왕의 생일이었고, 신사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각 학교의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는 삽시간에 도시 전체로 확산됐다.
당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있던 신간회가 진상조사단을 파견했고, 시위 소식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식민지 차별 교육과 노예 교육 철폐' 요구는 이내 '조선 독립'이라는 구호로 바뀌었고, 다음 해 봄까지 5만4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한 대규모의 항일운동으로 비화했다.
건물의 이름도 '성진관', 운동장 주변의 산책로 이름도 '성진로'

▲광주제일고등학교 본관 입구에 심어놓은 이낙연 전 국무총리의 기념 식수. '제45대 국무총리 이낙연'을 새긴 표지석이 도드라져 보인다. 뒤로 보이는 빗돌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의 구호가 새겨져 있다. ⓒ 서부원
학교는 온통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떠올리게 하는 유물들로 에워싸여 있다. 교문을 들어서면 당시의 구호를 새긴 빗돌이 우뚝하고, 교정 곳곳에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기록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건물의 이름도 '성진관', 운동장 주변의 산책로 이름도 '성진로'로 명명되어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성진회'에서 따온 것이다. '깨어(醒) 나아간다(進)'는 뜻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926년, 광주고보 출신인 왕재일과 장재성 등이 조직한 비밀 결사체다. 이들은 창립 초기부터 조선의 독립과 사회주의 사상 연구 등을 주요 강령으로 내걸었다.
'성진'이라는 이름은 광주일고뿐만 아니라 광주광역시 전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지역의 대표 명사가 됐다. 지난 2016년, 친일반민족행위자 김백일의 이름을 딴 백일초등학교를 성진초등학교로 개명한 건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친일 잔재 청산의 상징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어느덧 '성진회'는 학교와 고장을 상징하는 이름이 됐건만, 정작 단체를 조직한 인물들이 가려져 있다. 주중에만 문을 여는 학교 내 역사관 안에서만 그들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마저 월요일도 휴관일이다. 외지인이라면 휴가를 내지 않고선 내부 관람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6.25 전쟁 당시 좌익계 인사로 몰려 학살당한 장재성이야 그렇다 쳐도, 해방 후 건국훈장을 수훈한 왕재일과 그의 친동생인 장매성 등도 잊힌 인물이 됐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혁명적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이끌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했지만, 언급 자체가 금기시됐다.
왕재일은 고향인 전남 구례에 동상이 세워졌지만, 고향 사람들조차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동상의 위치를 아는 이도 드물고, 대로변인데도 눈길을 주는 이도 거의 없다. 장재성은 지난 2020년 기념사업회에서 기념관 내에 흉상을 건립했으니,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
교문 옆엔 1954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기념탑이 있다. 그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을 '학생의 날'로 호명했다. 어처구니없게도 항일운동을 주도한 학생과 6.25 전쟁 당시 동원된 학도병을 동일 선상에 둔 것이다. 기념일로 재지정된 건, 무려 반세기도 더 지난 2006년 때다.
이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물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기념일을 두고 독립운동이 아닌, 학생에 '방점'을 둠으로써 이승만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보여준 사례로 그 빛이 바랬다. '오직 바른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기념탑의 글귀마저 생뚱맞게 느껴진다.
기념탑 가는 길옆엔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최근 광주일고 동문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건립했다고 한다. 정면은 그의 얼굴을 새긴 동판 부조로 장식했고, 위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는 그의 어록을 집자해 새겨 놓았다.
교정엔 광주학생독립운동과는 무관한 이름도 보인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모교 방문을 기념해 심은 식수가 자못 우람하다. 나무 곁 '제45대 국무총리 이낙연'을 새긴 빗돌마저 도드라져 보인다. 광주일고를 빛낸 동문이라는 뜻에선지 본관 건물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성진로'를 걷고 '성진관'에서 생활하는 재학생들이 '총리 선배'만 알고 정작 '독립운동가 선배'를 모를까 두렵다.

▲전남 구례군 구례읍 서시천변에 세워진 왕재일 선생의 동상. 사실상 그의 유일한 기념물인데, 정작 인근 주민들조차 동상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경우가 드물었다. ⓒ 서부원
교문을 나서면 담벼락에 한 인물의 생애를 적은 동판 하나가 눈에 띈다. 1920년대 동맹휴학을 이끌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장석천을 기리는 내용이다. 당시 그는 신간회 간부로서, 격문을 써서 광주의 소식을 서울에 알렸다.
일제에 붙잡혀 여러 해 옥살이하다 석방되었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서른둘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그가 숨을 거둔 곳이 바로 기념 동판이 설치된 맞은편 허물어진 가게 자리다. 도심 재개발을 앞두고 인적이 끊겨 흉물스럽고, 대낮인데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감돈다.
명실공히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상지로서,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이라는 위상을 감안하면 독립운동을 주동한 인물들은 꼭 기억되어야 한다. 왕재일과 장재성, 장석천 등의 이름을 낯설어하면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논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역사는 '인물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