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9년 전 일이다. 2017년 8월 대법원은 LCD 생산라인 노동자의 희소질환(다발성경화증)을 산업재해(업무상질병)로 인정하며, 처음으로 "첨단산업분야" 작업환경의 특수성에 대해 말했다. 직업병에 대한 연구 부족, 작업 환경의 잦은 변화와 관련 정보의 은폐(영업비밀), 법·제도 미비, 안전대책과 교육 불충분 등으로 인하여, "첨단산업"은(더 정확하게는 그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불확실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왔다고 했다.
그리고 2025년 1월, 대법원은 배전전기원의 갑상선암을 업무상질병으로 인정하며 이러한 "불확실한 위험"의 문제가 비단 '첨단산업'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전통적인 산업분야"에서도 작업환경 변화, 종사자 수 부족, 유해성 규명에 대한 기술적 한계 등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불확실한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고 했다.
'불확실한 위험'의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고 그것을 전제한 대책이 필요하다
"불확실한 위험"이 뭘까. 노동자의 건강을 해치는 원인으로 강하게 의심은 되지만 그 유해성의 실체를 밝힐 수는 없는 것들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나는 2013년부터 '반도체 직업병' 문제에 깊이 관여해 오며 그러한 위험 요소들을 숱하게 보았다. 냄새가 독하고 피부를 따갑게 하는 각종 화학물질, 온종일 귓전에서 웅웅거리는 고압 설비. 경고 표시만 화려한 방사선 설비, 밤낮을 불규칙하게 바꿔 생체리듬을 무너뜨리는 교대근무 등등.
모두 사람의 건강을 서서히 망가뜨리는 위험 요인들로 여겨졌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어느 정도로, 건강을 해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었다. 의학적으로 그 유해성의 실체와 작동방식(기전)을 규명하는 것은 원체 어렵고 더디지만, 산업사회는 매우 빨리 변하고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사람의 생명·건강을 최우선시했다면, '인체에 무해함'이 완전하게 규명되지 않은 물질은 산업 현장에서 취급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유해성이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설비는 일터에서 즉시 제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러지 못했다. 고도의 산업사회에서, 기업간·국가간 기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노동 건강권에 대한 고려는 뒷전으로 밀렸다. 산업의 발전을 위해 어느 정도의 위험은 묵인하는,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한 위험은 없는셈 치자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산업 현장에서 집단적인 직업병 피해가 발생한 것은 어쩌면 예상할 수 있는 재난이었다. 대략 2007년과 2010년경부터 각각 불거졌던 '반도체 산업' 직업병 문제와 '고압선 작업자' 직업병 문제들은 그 대표격이라 하겠다. 두 사건에서 대법원이 강조한 것은 산재보험이 "불확실한 위험을 대비하는" 보험으로서, "산업사회가 원활하게 유지․발전하도록 하는 윤활유와 같은 기능", "근로자의 희생을 보상하면서도 첨단산업의 발전을 장려하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산업 발전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계속 '불확실한 위험'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러한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산업사회가 발전하여 왔으니, 그들의 건강문제 만큼은 산재보험 제도를 통해 폭넓게 보살필 필요가 있다는 취지였다.
'불확실한 위험'을 줄이려는, 혹은 그것을 전제한, 직업병 대책

▲2024년 6월 노동안전보건단체와 노동조합들이 산재보험 60년024년 6월 노동안전보건단체와 노동조합들이 산재보험 60년을 맞아 산재보험 개혁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한노보연
아픈 노동자들의 지난했던 업무상질병 인정 투쟁이 이러한 판례들을 만들어냈다. 우리 사회 직업병 피해 '보상' 문제와 관련해서는 중요한 지침으로 삼을만 하다. 판례의 올바른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근로복지공단의 판정 지침으로 제도화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직업병 피해 '예방'과 관련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안타깝게도 "불확실한 위험"의 문제가 우리의 산업 현장에서 사라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산업 사회의 발전 속도와 그에 대응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불확실성'을 최대한 줄이려는 대책과 그 불확실성을 '전제한' 대책들이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
몇 가지 제안을 하자면 이렇다. 먼저, '안전보건자료'의 통합적 수집·관리와 그 자료에 대한 열람권(알권리) 보장 문제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작성·제출되는 유해위험방지계획서(제42조), 안전보건진단 서류(법 제47조), 물질안전보건자료(제110조), 작업환경측정 자료(제125조) 등을 모두 전자문서화하여 통합 관리하는 전산 시스템부터 생각해 보면 좋겠다. 그리고 해당 사업장에 현재 일하고 있거나 과거에 일했던 노동자들에게는 관련 자료에 대한 폭넓은 접근권이 보장해야 한다. 문서 일부에 기업의 보호가치 있는 영업비밀이 기재될 수 있다면 관련 정보는 배제하고 안전보건에 관한 자료는 온전히 기록되는 방향으로 문서의 구성 자체를 다시 고민하는 것도 필요하다.
관련하여 꼭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산업기술보호법 제9조의4는 당장 손봐야 한다.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정보를 공개해서는 아니 된다"고 할 뿐, 그 관련성에 대한 판단기준 조차 마련하지 않아 해당 기술이 운영되는 사업장에서는 감추고 싶은 정보를 전방위로 은폐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되고 있다. 최근에도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장 작업환경 측정 자료에 대한 법원의 제출명령이 있었음에도 그 일부를 '국가핵심기술'을 이유로 감췄다. 이미 그 해악이 큰데 앞으로는 더욱 커질 것이다.
산재보상 신청 및 승인에 관한 정보를 노동자의 '일터' 중심으로 관리해야 하는 과제도 시급하다. 현재는 근로계약상 사업주 중심으로 관리하는 탓에 실제 어느 일터에서 어떤 직업병 의심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지를 근로복지공단조차 잘 알지 못한다. 산재 예방 정책의 핵심 기반이 되는 산재 행정 통계에 있어 매우 큰 공백이 아닐 수 없다. 점점 더 심화되어 가는 '위험의 외주화' 문제를 고려하면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다.
직업병 피해 실태를 온전하게 드러내려는 노력 먼저
업무상질병 문제는 그 원인과 책임 관계를 따지기에 앞서 그 실태를 온전하게 드러내려는 노력부터 세심하게 해야 한다. 어떤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사이, 혹은 어떠한 물질이나 설비를 취급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유독 어떠한 질병 피해가 많이 발생한다는 류의 정보가 산재승인 여부와 무관하게 꼼꼼하게 수집·관리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실태 파악을 통해 감추어졌던 유해성이 밝혀지기도 할 것이고, 그 유해성에 대한 과학적 규명 이전에 보상 혹은 예방 정책을 선제적으로 도입할 필요성이 논의되기도 할 것이다. 일터에 존재하는 모든 위험과 일터에서 발생하는 모든 건강 문제를 세심하게 파악하고 분석·정리하여 사회적으로 공유하려는 노력, 그것이 직업병 예방을 위한 다소 더디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임자운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으로 변호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