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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7일 청와대에서 프랑스·영국이 주도하는 호르무즈 해협 자유항행에 관한 화상 정상회의를 하고 있다. 이번 회의에는 한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호주, 이라크, 싱가포르 등 50여 개국 정상·대표들이 호르무즈 해협 항행의 자유를 위한 국제적 노력, 선원 안전 및 선박 보호, 전쟁 종식 후 항행 안전보장을 위한 실질적 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7일 청와대에서 프랑스·영국이 주도하는 호르무즈 해협 자유항행에 관한 화상 정상회의를 하고 있다. 이번 회의에는 한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호주, 이라크, 싱가포르 등 50여 개국 정상·대표들이 호르무즈 해협 항행의 자유를 위한 국제적 노력, 선원 안전 및 선박 보호, 전쟁 종식 후 항행 안전보장을 위한 실질적 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 연합뉴스

최근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오만·카타르 등 중동 산유국들과 협의를 거쳐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는 경로로 연말까지 원유 2억7300만 배럴과 나프타 210만 톤을 확보했다고 밝혔습니다. 사우디는 4~5월 5000만 배럴을 홍해 경로로 우선 공급하고, 연말까지 추가 물량도 한국에 우선 배정하기로 했다고 전해졌습니다(Reuters, 2026.4.15). 정부는 이 과정에서 한국 내 저장시설 활용, 공동비축 확대, 우회 공급망 구축 방안까지 함께 논의했다고 설명했습니다(연합뉴스, 2026.4.15).

겉으로 보면 이는 에너지 수급 대책입니다. 그러나 이번 사안은 그보다 훨씬 큰 함의를 갖습니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지점은 원유를 얼마나 확보했느냐가 아니라, 왜 중동 산유국들이 지금 한국을 동북아 전략 거점 가운데 하나로 보기 시작했느냐는 사실입니다. 어떤 나라는 시장으로 소비되고, 어떤 나라는 거점으로 선택됩니다. 이번 신호는 한국이 후자의 위치로 이동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국제질서는 이미 이동하고 있습니다. 한때 세계 에너지 질서는 미국의 군사력과 해상 통제력, 달러 체제를 중심으로 작동했습니다. 중동에서 생산된 원유가 특정 해협과 항로를 지나 아시아로 향하는 구조 역시 그 질서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최근 중동 전쟁과 호르무즈 위기는 하나의 현실을 드러냈습니다. 이제 어느 한 초강대국도 세계 공급망과 해상 질서를 단독으로 안정시킬 수 없습니다. 전쟁은 국경 안에서 벌어지지만 충격은 곧바로 유가·물류·환율을 타고 세계로 번집니다. 단일 패권의 시대는 흔들리고, 다극적 협력 질서가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중동 산유국들 역시 이번 전쟁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었을 것입니다. 막대한 자본과 외부 안보보장만으로 국가의 안전이 자동으로 확보되는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유시설과 항만, 산업도시는 언제든 미사일과 드론의 표적이 될 수 있고, 전쟁의 충격은 하루아침에 수출과 투자, 국가 신뢰도 전체를 흔들 수 있습니다. 사우디의 네옴시티(NEOM), UAE의 산업 다각화, 카타르의 물류 허브 전략은 모두 원유 이후 시대를 대비한 국가 프로젝트입니다.

달라진 세계 에너지 질서, 대안은 분산과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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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대안은 분산과 연결입니다. 공급망을 여러 나라로 나누고, 에너지 저장 거점을 해외로 확대하며, 특정 강대국 일변도가 아닌 다층적 협력망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번 한국과의 협력 강화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변화 속에서 산유국들이 찾는 상대는 단순한 소비국이 아닙니다. 위기 때도 안정적으로 저장할 수 있고, 필요하면 정제·가공·재수출까지 가능하며, 산업·물류·금융 역량을 함께 갖춘 신뢰할 만한 협력국입니다. 원유 한 배럴의 가치는 땅속에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디서 저장하고, 어떻게 가공하며, 어느 시장으로 연결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의 의미가 커집니다. 일본은 이미 사우디와 공동비축 경험을 가진 중요한 파트너입니다. 일본 정부 산하 기구는 오키나와 비축기지 일부를 사우디 아람코와 공동 활용해 왔고, 비상시 일본이 우선 구매권을 갖는 구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JOGMEC, 2025.11.19; Reuters, 2026.3.4). 그러나 이번 한국 관련 논의의 의미는 일본을 대체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중동 국가들이 이제 동북아 전략 거점을 일본 한 곳에만 두지 않고, 한국까지 포함한 복수 거점 구조를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한 나라에 기대는 질서가 아니라 여러 파트너와 위험을 나누는 질서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국이 갖는 경쟁력은 단순 저장 능력을 넘어섭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정유 능력과 석유화학 산업, 대형 항만, 고도화된 물류 체계, 조선업 경쟁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습니다. 초대형 원유운반선과 LNG 운반선 분야에서 한국 조선업은 여전히 세계 최상위권입니다. 반도체·자동차·배터리·철강·기계 산업이 촘촘히 연결된 제조 기반도 견고합니다.

저장 능력을 넘어서는 한국의 경쟁력

 원유·나프타 등의 확보를 위해 카자흐스탄,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을 방문한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 14일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원유·나프타 등의 확보를 위해 카자흐스탄,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을 방문한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 14일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 연합뉴스

최근에는 방위산업까지 빠르게 성장하며 중동 국가들과 협력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저장과 운송, 가공과 제조, 안보와 기술이 한 체계 안에서 연결되는 나라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한국의 경쟁력은 분명합니다. 중동 산유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탱크 몇 기를 빌릴 나라가 아닙니다. 원유를 저장하고, 정제하고, 고부가 화학제품으로 전환하며, 이를 실어 나를 선박을 건조하고, 산업 인프라와 방산 협력까지 확장할 수 있는 종합 파트너입니다. 변화한 시대가 한국형 역량의 전략적 가치를 새롭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긴장을 이유로 이른바 '코리안 리스크'를 말합니다. 그러나 시장과 국가는 이미지보다 실력을 봅니다. 한국은 수십 년간 안보 위기 속에서도 생산과 수출, 금융과 법질서를 유지해 왔습니다. 위기 때마다 공급망 복원 능력을 보여주었고, 최근 민주주의 위기 국면에서도 제도적 회복력을 세계에 입증했습니다. 국제사회가 한국을 신뢰하는 이유는 홍보가 아니라 축적된 성과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화자찬으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이번 움직임의 본질은 한국이 잘났다는 찬사가 아닙니다. 세계가 더 이상 한 나라의 힘만으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현실, 그리고 공급망과 안보, 산업과 외교가 복합적으로 재편되는 시대가 왔다는 신호입니다. 지금 국제사회는 지배보다 연결, 종속보다 협력, 패권보다 책임의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세계... 문제는 한국 내부

문제는 한국 내부입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냉전기의 사고와 대외 의존적 습속이 남아 있습니다. 국내 문제를 외부 권력에 기대 해결하려 하고, 동맹을 협력이 아니라 종속으로 이해하며, 특정 강대국의 승인 여부를 국가 판단의 기준처럼 여기는 태도도 적지 않습니다. 일부 정치세력과 기득권 집단은 이러한 낡은 질서를 여전히 이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 안보의 의미도 바뀝니다. 과거의 안보가 군사동맹 하나에 기대는 것이었다면, 오늘의 안보는 공급망·기술·금융·민주주의의 신뢰를 함께 지키는 능력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실용은 강한 나라 뒤에 서는 일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국가들과 연결되고, 상호 이익을 설계하며, 공동 번영의 질서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우방과 협력하는 것과 외부에 기대어 내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한국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반민주적 도발이 다시는 발붙이지 못할 만큼 튼튼한 민주헌정질서를 세우고, 그 위에서 에너지·조선·방산·기술·문화 역량을 연결한 국가전략을 추진해야 합니다. 저장시설 확대 역시 산업정책의 한 항목으로 끝낼 일이 아니라, 외교·경제·안보를 함께 묶는 장기 전략으로 다뤄야 합니다. 기회는 늘 준비된 나라의 몫이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나라에게 국제질서는 늘 남의 역사였습니다.

동맹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맹이 국가의 상상력까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사우디가 지금 한국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면,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입니다. 한국도 스스로를 새롭게 선택할 것인가. 남이 만든 질서의 변두리에서 안전한 자리를 구하는 나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회복력과 산업의 역량, 협력의 철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제질서의 한 축을 함께 세우는 나라로 나아갈 것인가. 세계는 이미 움직였습니다. 남은 것은 한국의 선택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한국은 새로운 국제질서하에서 균형과 상 호존중, 동반성장이라는 국제규범을 앞장서서 제시하고 실천하며 전략적 포지셔닝에 주력해야 할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 그렇기에 주권국으로서의 자체정비와 가치기준 마련에 주력해야 한다. 이 글은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주체적 대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출발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유류저장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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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권 (lbkwon21) 내방

서강대 역사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30년간의 사회생활을 거쳐 우리시대에 필요한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는 '인문연구가 이병권'입니다. 극우로부터 파생된 정치, 경제, 역사, 사회,철학 등 전 분야에 걸쳐있습니다. <시민언론 민들래> 에 60편이 넘는 칼럼을 써오고 있습니다. 다수의 유투브에 출연하거나 강연, 논문발표를 통해 제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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