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처음엔 애들 학원비나 벌어볼까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혼 서류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40대 가장의 통곡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는 '자산 광풍'의 참혹한 민낯을 보여준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는 '용돈벌이'로 시작한 주식 투자가 5000만 원의 빚으로 돌아오고, 가정은 파국을 맞았다.
'경제적 자유'라는 유혹에 빠져 본업을 뒷전으로 하고, 스마트폰 차트 속 숫자에 미래를 저당 잡힌 청년들의 실패 사례 우리 사회의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 15년간 재무 상담사로서 현장을 지켜본 필자의 눈에, 지금의 '코스피 5,000' 열풍은 1929년 대공황 전야의 광기와 닮은 파국의 전조처럼 보인다.
한국 주식시장의 광기, 숫자로 보는 현실

▲1월 23일 오전 서울 중구 우리은행 딜링룸에서 딜러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이날 코스피는 오전 9시 21분 기준 전장보다 62.72포인트(1.27%) 오른 5015.25다. ⓒ 연합뉴스
현재 한국 주식시장의 광기를 보여주는 가장 섬뜩한 지표는 지수 자체가 아니라 '활동계좌 수'에 있다. 금융투자협회 통계에 따르면 2026년 1월 22일 기준 주식 거래 활동계좌 수는 9946만 2031개로, 경제활동인구 약 2900만 명을 고려하면 투자자 1인당 평균 3~4개의 계좌를 운용하는 셈이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기형적 현상이다. 미국이나 북유럽 등 자본주의 선진국에서는 가계 자산의 핵심이 연금이나 펀드 등 간접 투자에 있고, 개인이 직접 여러 계좌를 열어 단기 차액 거래에 몰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1억 개의 계좌는 한국 사회가 주식시장을 기업 성장의 씨앗을 심는 '투자처'가 아니라, 한순간의 베팅으로 인생 역전을 노리는 '거대한 온라인 투전판'으로 소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비극의 이면에는 금융권과 일부 전문가들이 유포하는 '인플레이션 공포 마케팅'이 자리 잡고 있다. "은행에 돈을 두면 화폐가치가 녹아내린다"는 위협은 시민들을 투기시장으로 내몬다. 하지만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인플레이션 공포와 금융권의 유혹
기술 진보가 '한계비용 제로'를 향해 달리는 시대에, 물가가 치솟는 이유가 기술 부족 때문일까? 100년 전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우리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을 통해 기술 발전이 인류를 노동의 굴레에서 해방할 것이라 예견했다.
진정한 인플레이션 방어는 국민을 투기장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필수 비용을 낮추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기술 혁신의 과실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 자산시장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주식시장의 본래 기능은 기업이 자금을 조달해 혁신 투자로 이어지도록 하는 '발행시장'에 있다.
그러나 K-주식시장은 기업 성장을 돕는 자본은 사라진 채, 이미 발행된 주식을 개인끼리 사고팔며 시세 차익에만 몰두하는 '유통시장'의 투기성만 비대해졌다. 오로지 남보다 비싸게 팔고 나가려는 '폭탄 돌리기' 식 차액 거래가 시장을 지배하는 기형적 구조다.
여기서 우리는 '시장 공정성'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진정한 공정은 주가 조작이나 작전주를 잡는 기술적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의 성격과 소유 구조에 따른 불평등을 바로잡는 '자산시장의 구조적 공정'이 핵심이다.
현재 28조 원에 달하는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 직전 미국 상황과 비슷할 정도로 위험하다. 거대 자본이 하락장을 견디며 수익을 독점하는 동안, 개인 투자자들은 작은 변동에도 반대매매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자본의 체급 차이가 시장 변동성을 키우고, 그 피해가 서민 파산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이 바로 오늘날 자산시장의 가장 큰 불공정이다.
기본사회와 자산시장 개혁의 필요성
결국 K-주식시장의 비정상을 바로잡는 길은 이재명 정부가 주장하는 '기본사회'의 비전과 맞닿아 있다. 기본사회는 단순히 복지를 늘리는 시혜적 차원이 아니라 자산 소득을 공동체의 미래 비용을 낮추는 씨앗자금으로 전환하는 경제 구조의 개혁이다.
정부가 이를 실현하려면 금융투자소득세 도입 등 조세 정의를 통해 자산 소득을 공정하게 과세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식주와 교통 등 필수 비용을 낮추는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삶의 기본권이 보장될 때, 시민들은 인플레이션 공포에 쫓겨 투기판으로 뛰어들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자유'를 얻는다.
동시에 기업과 투자자 모두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기업은 수익률을 넘어 기후 위기와 불평등 해소에 기여해야 하고, 자본은 그러한 기업의 혁신을 지원하는 '인내하는 자본'이 되어야 한다.
숫자의 환상에서 벗어나 일상의 단단한 바닥을 다지는 것이 필요하다. 주식 지수가 국민 행복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 그것이 국가가 국민을 위해 해야 할 진짜 정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금융과 미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