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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밤새 눈이 내렸다. 제대로 쌓인 눈을 보는 건 이번 겨울 들어 처음인 듯하다. 손자 녀석에게 눈이 오면 놀이터에서 눈썰매를 태워주겠다고 했었다. 드디어 그 약속을 지키는 날이다.

날이 밝자 눈썰매를 들고 놀이터로 갔다. 겨울이라 놀이터는 인적이 없고 아직 눈도 치우지 않아 비교적 깨끗한 눈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로리는 잠깐 앉았다가 금세 썰매에서 내린다고 한다.

"나 썰매 안 탈래요!"

대신 로리는 썰매를 끌었다. 타는 대신 끌고, 천천히 돌아다녔다. 초록색 썰매는 놀이기구가 아니라 눈을 담는 그릇이 되었고, 로리의 손은 눈을 만지며 즐거워했다. 속도보다는 촉감을 좋아했던 것 같다.

썰매를 타지 않는 아이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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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겨울은 속도가 아니라 촉감에 더 가까운가 보다. 로리는 눈을 움켜쥐었다 놓고, 부숴보고, 살짝 뭉쳐도 보고, 다시 흩뜨렸다. 눈 위에 눕기도 했다. 하얀 바닥에 몸을 맡기는 일이, 아이에게는 두려움이 아니라 확신처럼 보였다. 썰매 위에 눈을 가득 담아서 집으로 가져가겠다는 로리, 이곳 저곳으로 썰매를 끌고 다닌다.

눈은 손끝에서 금세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바람이 센 곳의 눈은 더 거칠고, 사람들이 많이 밟은 곳의 눈은 단단하며, 그늘진 곳의 눈은 오래 차갑다. 아이는 그 차이를 '설명'이 아니라 '몸'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그 몸의 감각은 어른이 놓치기 쉬운 것을 자꾸만 발견하게 한다.

썰매야 집에 가자 눈을 퍼 담고 뒹굴고 놀던 로리가 썰매에 눈을 담아 집으로 가겠다고 끌고간다.
썰매야 집에 가자눈을 퍼 담고 뒹굴고 놀던 로리가 썰매에 눈을 담아 집으로 가겠다고 끌고간다. ⓒ 신혜솔

하얀 눈 속의 하얀 알갱이

놀이터를 이탈한 로리가 소리쳤다.

"할머니! 이것 좀 봐요! 이것도 눈이야?"
"이건 눈이 아니구나. 만지지 말자~"
"눈이 아니라고요? 눈처럼 하얀데요, 할머니?"

바닥을 자세히 보면, 눈보다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한 것들이 있었다. 보도블록 틈과 벽면 가장자리, 나무 둘레의 흙 위, 작고 하얀 알갱이들이 박혀 있다. 마치 겨울이 선물로 뿌려둔 구슬 아이스크림처럼, 그리고 신기하게 그 주변엔 눈이 녹고 바닥은 말라있다. 제설제였다.

이 알갱이들은 대개 '미끄러움'을 막기 위해 뿌리는 재료들이다. 눈과 얼음을 녹이려는 제설제일 수도 있고, 마찰을 높이려는 모래·입자 혼합재일 수도 있다. 이것들이 길 위에만 있지 않고, 사람의 동선을 따라 놀이터 안쪽까지도 들어온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신발 바닥, 썰매 밑, 젖은 눈더미를 따라 이 물질들도 이동한다. 눈이 내릴 때는 모든 것이 하얗게 덮여 균일해 보이지만, 녹기 시작하면 경계가 드러난다. 눈더미의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하고, 바닥과 맞닿은 선이 검게 젖는다. 녹은 물이 흘러간 길이다. 그 물은 바닥의 먼지와 흙, 미세한 입자들, 그리고 알갱이의 흔적까지 끌어안고 하수구를 향해 이동하며 마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 경계선을 보면서 생각했다. 눈은 깨끗한 것처럼 보이지만, 도시의 눈은 늘 '미세먼지의 도시를 통과한 눈'이라는 것을. 하얀 눈이 내릴 때는 모든 것을 덮어 버릴 듯 하지만 녹고 나면 남는 것은 물만은 아닐 것이다.

눈과 제설제 로리에게 눈 결정체를 보여주기 위해 클립형 메크로 렌즈로 찍었다. 눈(雪)과 제설제 알갱이를 비교해 보았다. 제설제는 실물 모양 그대로지만 눈은 습기를 머금고 예쁘게 퍼져 모습이 다양하다.
눈과 제설제로리에게 눈 결정체를 보여주기 위해 클립형 메크로 렌즈로 찍었다. 눈(雪)과 제설제 알갱이를 비교해 보았다. 제설제는 실물 모양 그대로지만 눈은 습기를 머금고 예쁘게 퍼져 모습이 다양하다. ⓒ 신혜솔

"눈 비비면 안 돼!"

눈 위에 앉아 눈을 퍼 담던 로리가 얼굴에 눈이 튀자 눈을 비비려 했다. 장갑 낀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는 순간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안 돼! 눈 비비면 안 돼!"

잔소리가 아닌 생활 속의 새로운 규칙 하나를 더 알려주려는 순간이 되었다. 눈 자체가 나쁘다기 보다, 눈이 지나온 자리에 섞일 수 있는 것들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알갱이든 먼지든, 무엇이든 손끝에 묻은 채로 눈을 비비면 눈 점막을 자극할 수 있다. 아이들은 '순간'에 얼굴을 만진다. 어른은 그 순간을 먼저 막아야 하는 입장이다. 생활 속에서 결론은 언제나 작은 쪽으로 난다.

· 눈 놀이 중엔 손으로 얼굴 만지지 않기(특히 눈 비비기는 절대 안 됨)
· 집에 들어오면 손·얼굴을 미지근한 물로 씻기
· 장갑이 젖으면 가능하면 갈아 끼우기(젖은 장갑은 더 많은 것을 붙잡는다)
· 쌓인 눈의 가장자리(누렇게 변한 부분)는 만지지 않게 하기
· 눈 위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오면 현관이 시꺼먼 물로 흥건해진다. 바로 신문지를 깔아 흡수하고 닦아내는 것이 좋다.

이런 요령들은 아이의 놀이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도시의 겨울을 안전하게 지나는 데 도움이 되는 내 나름의 생활 지혜로 기억해두려 한다.

눈보다 오래 남는 것
 사람이 다니는 길은 눈을 말려버리는 제설제의 위력. 안전을 위한 편리함만 생각했었다. 시멘트가 부식될 정도니 나무 위로는 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이 다니는 길은 눈을 말려버리는 제설제의 위력. 안전을 위한 편리함만 생각했었다. 시멘트가 부식될 정도니 나무 위로는 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 신혜솔

제설은 눈으로 인해 미끄러워진 길에서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해 준다. 동시에 제설의 흔적은 눈이 녹은 뒤에도 남는다. 물론, 남는 건 꼭 문제만은 아니다. 다만 남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덜 남기게 할 수 있다.

오늘 로리는 썰매를 타지 않았다. 대신 끌었다. 아이가 끌고 간 썰매 자국은 눈 위에 길을 남겼고, 나는 그 길 옆에서 하얀 알갱이를 보았다. 하얀 풍경 속에서 하얀 것 하나를 더 보는 일. 그것이 오늘 내가 얻은 겨울의 취재였다. 우리의 겨울을 위험으로부터 방지해 주는 제설제가 아이의 놀이에까지 흡수되지 않게 지켜주는 것도 눈 내린 겨울에 내가 할 일이다.

마지막에 나는 로리의 손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눈은 금세 사라진다. 그러나 겨울을 건너는 방식은 남는다. 우리가 뿌리고, 밟고, 흘려보낸 것들까지 포함해서. 그래서 내일도, 눈이 오면 나는 로리에게 말할 것이다.

"마음껏 놀아. 다만 눈을 만진 후 네 눈은 비비지 말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겨울#폭설#눈썰매#제설#제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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