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경향신문>이 보도한 [속보]국민 90% “원전 필요”···신규 건설엔 10명 중 7명이 “추진돼야”](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6/0123/IE003574223_STD.jpg)
▲21일 <경향신문>이 보도한 [속보]국민 90% “원전 필요”···신규 건설엔 10명 중 7명이 “추진돼야” ⓒ 경향신문
지난 21일, 기후에너지환경부가 발표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하 11차 전기본)에 반영된 신규 원전 건설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는 우리 사회 에너지 정책 결정 과정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냈다.
정부는 '국민의 대다수가 신규 원전 추진에 찬성한다'는 조사 결과를 공개하며, 마치 압도적인 사회적 합의가 이미 형성된 것처럼 설명했다. 특히 한국갤럽과 리얼미터라는 공신력 있는 조사기관을 앞세워 신규 원전 건설을 추진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의 증거'로 규정하고 정책 추진에 속도를 내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이 숫자가 과연 시민들의 숙고된 판단인지, 아니면 이미 정해진 정책 방향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산출물'인지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에너지 정책은 단순히 전력을 어떻게 공급하느냐 하는 기술적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안전과 비용, 그리고 미래 세대의 생존권과 지역적 정의를 결정짓는 고도의 정치적·윤리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먼저 이번 여론조사의 설계와 집행 과정에 내재된 이론적 결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론조사는 질문의 설계가 곧 결론이 되는 도구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프레이밍 효과(Framing Effect)'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기후에너지환경부의 여론조사 속 안내문 ⓒ 기후에너지환경부
여론조사에 앞서 제시된 짧은 안내문은 인공지능(AI) 산업 확대로 전력 수요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원전을 그에 대한 필연적 해법인 것처럼 묘사했다. 이는 응답자들의 인지적 틀을 사전에 특정 방향으로 제한한 것으로, 사실상 질문에 앞서 결론을 암시한 것에 가깝다.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시민들에게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전력이 부족해질 텐데, 원전 말고 다른 대안이 있겠느냐'는 식의 유도된 질문을 던진 셈이다.
그 과정에서 전력 수요 관리, 에너지 효율 향상, 재생에너지 확대와 이에 따른 전력계통 유연성 강화 등 다른 정책 시나리오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결국 시민들은 제한된 정보와 편향된 맥락 속에서 선택을 요구받았고, 이는 민주적 여론 형성의 핵심 조건인 '정보의 균형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결과로 이어졌다.
"찬성한다면, 내 집 앞에도 지을 수 있는가"

▲새울 3, 4호기 원전 건설 현장. ⓒ 원자력안전위원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원전 정책의 본질적인 갈등 요소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점이다. 여론조사가 진정한 의미의 공론화 기초 자료가 되려면 정책의 편익뿐만 아니라 수반되는 비용과 위험에 대해서도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의 영구 처분 대책이 여전히 전무하다는 사실, 중대 사고 발생 시 감당해야 할 천문학적인 사회적 비용, 그리고 특정 지역에 위험을 전가하는 구조적 불평등에 관한 질문이 빠져 있었다.
'원전이 필요한가'라는 추상적 질문에는 높은 찬성률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거주지 인근에 핵폐기물 처리장이나 신규 원전을 건설하는 데 동의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도 같은 수치가 유지될 수 있을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이 차이는 이미 여러 인식 조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국에너지정보문화재단이 2024년 8월 14일 발표한 '2024년 상반기 에너지 국민인식조사'에 따르면, 국내 원전 계속운전에 대해 국민 10명 중 7명이 찬성했고, 원자력 발전량을 늘려야 한다는 응답도 60%에 달했다. 그러나 거주 지역에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될 경우를 가정하자 응답은 달라졌다. '반대하겠다'는 응답이 52.8%로 '찬성하겠다'는 응답(45.1%)을 앞섰다.
이처럼 원전 정책에 대한 전국 단위의 찬성 여론은 입지 지역의 수용성 문제와 결합하는 순간 급격히 균열된다. 그럼에도 이번 신규 원전 여론조사는 이러한 차이를 드러내기보다, 전국 평균이라는 단일 수치 뒤에 숨겼다. 이는 원전 정책의 핵심 쟁점인 '위험의 지리적 외주화' 문제를 가린 채, 정작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지역 주민의 목소리를 통계적으로 지워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해외 선진국은 어떻게 결정했는가
해외 선진국들의 사례를 보면, 에너지와 같은 중대한 국가 의제는 단순한 여론조사가 아니라 고도의 숙의 과정을 통해 결정된다. 독일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안전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윤리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에는 원자력 기술 전문가뿐 아니라 철학자, 종교계 인사, 시민사회 대표들이 함께 참여해 원전의 기술적 안전성뿐 아니라 사회가 감당해야 할 윤리적 책임을 논의했다. 그 결과는 단순한 찬반을 넘어 위험을 다음 세대에 전가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결단으로 이어졌고 탈원전이라는 대합의의 토대가 됐다.
프랑스 역시 원전 의존도가 높은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정책 결정 과정에서는 광범위한 시민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프랑스의 국가공공토론위원회(CNDP)는 원전 건설이나 방사성 폐기물 관리처럼 민감한 사안에 대해 수개월에 걸친 공개 토론을 의무화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시민들에게 찬성 논거뿐 아니라 반대 의견과 위험 요소를 함께 제공하며, 반대 의견조차 정책에 반영될 수 있는 통로를 제도적으로 열어 둔다.
덴마크의 삼쇠섬 사례는 에너지 민주주의가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삼쇠섬 주민들은 에너지 협동조합을 결성해 재생에너지 사업의 주체가 되었고, 에너지는 '외부에서 강요되는 위험 시설'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자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수용성은 보조금이 아니라 참여와 통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이 사례는 분명히 보여준다.
기술적 현실 외면한 전력 계획

▲탈핵시민행동이 5일 부산 기장군 고리원전 앞에서 기자회견 후 '탈핵희망전국순례'를 시작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번 여론조사의 근거가 된 11차 전기본 자체도 기술적·경제적 타당성 측면에서 중대한 한계를 안고 있다. 핵심은 원전의 '경직성' 문제다. 전력 계통 공학적으로 원전은 출력을 수시로 조절하기 어려운 전원이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태양광과 풍력 등 변동성 재생에너지를 확대해야 하는 시점에서, 경직된 대형 원전 비중을 동시에 높이는 것은 전력망의 안정성을 심박하게 위협하는 선택이다.
재생에너지 공급이 넘쳐날 때 원전의 출력을 강제로 낮추는 '출력감발'이 잦아지면 원전의 경제성은 급격히 하락하게 된다. 송전망이 주변국과 촘촘히 연결된 유럽 국가들과 달리, 독립된 계통을 가진 한국에서 대형 원전을 추가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위험할 뿐만 아니라, 향후 제대로 가동되지 못한 채 방치되는 '좌초자산(Stranded Assets)'을 양산할 위험이 매우 크다. 11차 전기본은 이러한 전력망의 유연성 부족과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 가능성을 시민들에게 정직하게 공유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원전이 AI 시대를 위한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호도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곧 수립될 12차 전기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12차 계획은 11차 계획이 남긴 오류와 한계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정책 결정의 패러다임을 단순한 '숫자'에서 '숙의'로 전환해야 한다. 에너지 정책은 단순히 찬성표의 머릿수를 세는 다수결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위험과 비용, 그리고 책임을 어떻게 공정하게 배분할 것인지 논의하는 민주적 과정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12차 전기본은 다음과 같은 과제를 안고 있다. 첫째, 숙의 민주주의 모델의 전면 도입이다. 단순 여론조사를 넘어 시민들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상호 토론하고 학습하는 공론조사 방식을 통해 숙성된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원전의 실제 발전 단가뿐만 아니라 사고 위험 비용, 미래 세대가 짊어질 폐기물 관리 비용까지 포함된 투명한 정보 공개가 그 전제가 되어야 한다.
둘째, 공급 확대 중심에서 '수요 관리와 유연성' 중심으로 정책의 축을 옮겨야 한다. AI 시대를 명분으로 발전소부터 짓겠다는 발상은 20세기형 사고방식이다. 에너지 효율 혁신과 가상발전소(VPP), 수요 반응(DR) 자원을 확충하여 전력망의 지능화와 유연성을 꾀하는 것이 국가 경쟁력을 위한 진정한 해법이다. 셋째, '정의로운 전환'의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원전 인근 지역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에너지 시스템을 멈추는 제도적 개선안이 담겨야 한다.
결국 질문이 왜곡되면 민주주의도 왜곡된다. '국민 90%가 원전을 필요로 한다'는 제목은 강력해 보이지만, 그것이 어떤 질문과 전제 속에서 만들어졌는지를 묻지 않는다면 그 숫자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봉인지가 될 뿐이다.
에너지 정책은 수십 년간 되돌릴 수 없는 국가의 에너지 경로를 고정시키는 결정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찬성표가 아니라, 더 깊은 질문과 그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는 책임 있는 정치다.
12차 전기본은 숫자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는 계획이 아니라, 갈등과 불확실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진정한 사회적 합의를 모색하는 계획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말하는 공론화는 민주주의의 이름을 빌린 또 하나의 요식 행위이자 절차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정부는 이제 여론조사라는 숫자의 늪에서 나와 시민들과 함께 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한 진정성 있는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