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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8 10:52최종 업데이트 26.01.08 10:52

가로 바람 부는 제주, 집 안에선 이런 일 벌어지고 있다

비우다 보니 결국 근육만 남은 2026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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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대개 무언가를 더 채우려 든다.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적고, 결심을 단단히 묶는다. 그런데 나는 정반대로, 채우는 대신 '비우기' 쪽으로 시작했다.

마음을 먼저 비웠다. 생각을 조금 줄이고, 감정을 덜어냈다. 말 대신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조용히 나를 비우는 연습을 했다. 그러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옮겨갔다. 서랍을 열고, 오래 쓰지 않은 물건들을 하나씩 꺼냈다. 버릴까 말까 망설이던 것들, 언젠가 쓰겠지 하고 쌓아두었던 것들 말이다. 결국 안 쓰고 유통기한만 지나게 되는 게 현실이다.

이름을 붙이자면 '미니멀 라이프' 지만, 실제로는 대단한 철학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숨이 조금 더 쉬어지는 기분이 좋았다. 집이 가벼워지자 내 시선에 여유가 생기고, 마음도 가뿐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비우다 보니, 문득 마지막으로 남은 게 눈에 들어왔다. 비워지지 않은 것, 바로 내 몸이었다.

작심삼일을 이겨내고 다시 시작한 4일째 기념 사진. 새해 첫 날, 근력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일단 3일 만 해보자는 노력 중인 아침 시간.
작심삼일을 이겨내고 다시 시작한 4일째 기념 사진.새해 첫 날, 근력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일단 3일 만 해보자는 노력 중인 아침 시간. ⓒ 이현숙

나이는 숫자라지만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 계단 몇 개에 차오르는 숨, 바지 허리에서 느껴지는 묘한 압박감. 다이어트라는 말은 너무 흔해졌고, 운동이라는 단어는 늘 내일부터로 미뤄졌다. 그렇게 '언젠가 하겠지'를 수십 번 말하다가, 2026년 1월 1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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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나는 근력 운동을 시작했다. 대단한 결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소박했다.

"일단 3일 만 해보자."

작심삼일이면 어떠냐. 또 3일 하면 된다. 그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5일째 아침이다. 아직 한 달은 멀었지만, 적어도 이번엔 시작만 한 사람은 아니다.

바람 부는 제주에서, 밖 대신 집 안을 선택하다

제주에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거긴 겨울에도 따뜻하잖아."

실제로 서울에서 놀러 온 친구들도 며칠간은 제주의 날씨를 찬양했다. 햇살은 부드럽고, 바깥에서 커피를 마셔도 손이 시리지 않았다. 이런 데서 살면 매일 산책하겠다는 말도 쉽게 나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며칠짜리 제주이다.

지금의 제주는 전혀 다른 얼굴이다. 바람은 세로가 아니라 가로로 분다. 우산은 무용지물이고, 모자는 자꾸 날아간다. 눈은 하루 종일 내리지만 햇살 덕에 쌓이지 않는다. 녹았다가 날리고, 다시 흩어진다. 밖을 걷는 일이 낭만이 아니라 용기처럼 느껴지는 날씨가 된다.

이런 계절의 제주에서 밖에서 운동하기는 쉽게 포기하게 된다. 제주에 산다고 해서 늘 자연 속에서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집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되는 시간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일까. 이 겨울, 이 바람을 대항하듯 내가 선택한 운동은 <함께하는 홈트>였다. 정해진 시간에 온라인 미팅 앱인 줌으로 접속해 얼굴을 마주한다. 각자의 집에서 같은 동작을 하고, 같은 시간만큼 땀을 흘린다. 하루 16분. 길지 않지만, 매일 하기에 딱 적당한 시간이다.

제주 겨울바람을 피해 집 안에서 시작한 줌 홈트. 같은 시간, 같은 동작으로 연결된 얼굴들이 나를 매일 거실 매트 위로 불러낸다.
제주 겨울바람을 피해 집 안에서 시작한 줌 홈트.같은 시간, 같은 동작으로 연결된 얼굴들이 나를 매일 거실 매트 위로 불러낸다. ⓒ @tom_schools

이 운동에는 묘한 규칙이 있다. 자발적으로 모였지만, 한 달 동안 모든 날을 채워야 한다. 출석은 숫자로 남고, 빈칸은 누구보다 먼저 내 눈에 들어온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그 압박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긴장감이 아침마다 나를 거실 매트 위로 불러냈다.

첫날은 다리 운동이었고, 둘째 날은 등 운동, 셋째 날은 가슴과 어깨. 그리고 오늘 아침, 다섯 번째 운동을 마쳤다. 첫날의 여파는 사흘을 넘겨 오늘까지 이어졌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몸 여기저기서 말을 거는 느낌이었다.

"나 아직 여기 있어요."

근육이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아프면서도 묘하게 웃음이 난다. 이 통증은 불편함이 아니라, 오랜만에 내 몸이 깨어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운동하는 엄마를 보고 자라는 아이들

새벽 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날에는, 운동 영상을 찍어 숙제로 제출해야 한다. 거실 매트에서 덤벨을 들어 올렸다. 그때 아이들이 하나둘 몰려왔다.

아이들과 놀이처럼 하는 운동. 운동하라는 말 대신, 움직이는 엄마의 등을 보고 배우는 시간.
아이들과 놀이처럼 하는 운동.운동하라는 말 대신, 움직이는 엄마의 등을 보고 배우는 시간. ⓒ 이현숙

"엄마 뭐 해? 무슨 놀이야?"

아이들 눈에는 내가 땀 흘리며 운동하는 모습이 꽤 재미있어 보였나 보다. 웃고, 따라 하고, 덤벨 흉내를 낸다. 집중이 흐트러져 몇 번이나 큰소리를 냈다. 조용히 하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 하나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순간 말이 사라졌다.

운동하라는 설명도, 건강에 대한 잔소리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들은 이미 보고 있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가진 힘을, 나는 집 거실 한가운데서 다시 확인했다.

오늘의 나는 여러 이름으로 살아간다. 운동 다시 시작한 아내, 땀 뻘뻘 흘리며 노는 엄마, 살 빼려는 딸래미, 그리고 예전의 건강했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 친구.

이번 새해의 목표는 거창하지 않다.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빠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하루를 비우지 않고 채우는 사람 말이다. 오늘 아침으로 5일째다. 작심삼일은 이미 지났다. 이제 남은 건, 다시 3일을 이어가는 일이다.

제주 바람은 여전히 가로로 분다. 눈은 쌓이지 않고 흩어진다. 하지만 매일 아침 16분, 나는 내 몸 만큼은 조금씩 쌓아가고 있다.

비우는 연습을 하다 보니, 결국 근육이 남았다. 나의 2026년은 그렇게, 조금 단단하게 시작됐다.

#제주살이#새해일기#미니멀라이프#함께하는홈트#작심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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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이주해 두 아이를 키우며 삶을 기록하는 엄마입니다. 도시 부모들의 로망과 현실, 육아와 배움의 이야기를 글로 전합니다. 생활 속에서 찾은 진짜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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