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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7 10:56최종 업데이트 26.01.07 10:56

인생의 나침반이 될 정갈한 단어의 품격

[서평] <단어가 품은 세계>를 읽고

우리는 매일 언어의 홍수 속에 산다. 손가락 끝으로 순식간에 휘갈겨 쓰는 메시지, 감정이 정제되지 않은 채 쏟아지는 댓글들 속에서 말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졌다. 속도는 빨라졌으나 깊이는 얕아졌고, 소통의 도구여야 할 말은 종종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둔기가 된다.

이러한 시대에 황선엽 국어학자의 <단어가 품은 세계>(2024년 11월 출간)는 우리에게 '잠시 멈춤'이라는 귀한 시간을 선물한다. 이 책은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단어들이 실은 얼마나 거대한 시간과 감정의 층위를 품고 있는지 조용히 일깨워준다.

단어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책표지 <단어가 품은 세계>
책표지 <단어가 품은 세계> ⓒ 빛의세계

저자는 권위를 앞세워 단어의 정의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단어도 사람처럼 태어나 성장하고 죽는다"는 따뜻한 시선을 견지한다. 어떤 단어는 수천 년을 견디며 민족의 숨결을 전하고, 어떤 단어는 한 시대를 뜨겁게 달구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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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도 사람처럼 태어나서 성장하고 노쇠하며 끝내는 죽기도 합니다. 다만 단어의 수명은 천차만별이어서 어떤 단어는 선사 시대부터 현재까지 쓰이는 것도 있고 불과 몇 년 쓰이다 사라지는 것도 있지요. 오래 쓰인 단어라 하더라도 소리나 모습, 의미 등이 변화하기도 합니다. -서문 중에서

저자가 말하듯 국어학자의 역할이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뒤쫓으며 확인하는 것"이라면, 이 책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단어'라는 이정표를 통해 되짚어보는 과정이다. 단어의 어원을 살피는 일은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 소중히 여겨온 가치가 무엇인지 발견하는 인문학적 탐색과도 같다.

앞장서서 사람들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뒤쫓으며 확인하는 것이 국어학자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100쪽

단어에도 생명력이 있어서 세월의 변함에 따라 서서히 사람들의 생활에서 쓰임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생기기도 하지만 특정한 의도로 새로운 단어로 대체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일제 강점기 잔재로 남은 일본어를 우리말로 대체하려는 노력이 그러하다. 하지만 언중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계속 쓰이는 일본어도 있다. 바로 스끼야끼, 쓰기다시 등이 있다.

얼마 전 지인들과 설렁탕 집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식당 아주머니께서 "입맛에 따라 '다대기' 양을 조절해서 드세요"라며 양념통을 건네주셨다. 나는 식사를 마친 후 공손한 어조로 "다대기라는 말보다 우리말로 다듬은 '다진 양념'이라는 표현을 써보시면 어떨까요?"라고 조심스레 권유드렸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그러겠노라 답하셨다.

국립국어연구원 '다듬은 말'에 따르면, '다대기는 '다진 양념'으로 쓰도록 권장하고 있다. 누군가는 "맛만 있으면 됐지, 단어 하나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우리 생활 속에 남아 있는 일본어를 대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단순한 소리의 조합이 아니라 그 사람의 철학과 타인을 향한 존중의 크기를 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관계를 살리는 언어, 다음 세대를 위한 유산

이 책은 특히 부모와 교사, 그리고 인생의 후반부를 준비하는 어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아이들은 어른의 말을 먹고 자란다. 부모가 고른 단어 하나가 아이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교사가 건넨 문장 하나가 한 아이의 인생에 나침반이 된다.

단어를 공부하다 보면 세상을 공부하는 것 같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얼굴 표정과 움직임과 세 끼 먹는 식사와 걷는 모습 등 일상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듯 느껴질 거예요.(240쪽)

삶의 연륜이 쌓일수록 우리의 말은 더욱 정갈해져야 한다. 인생 2막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말의 품격은 곧 삶의 성적표와 같다. 남을 가르치려 드는 '가벼운 말'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위로가 되는 '깊은 말'을 건넬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어른이 된다.

이 책은 우리가 어떤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관계의 온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 말할 것인가'를 묻는다. 단어 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작은 실천이 우리의 대화를 바꾸고, 관계를 회복하며, 끝내 우리 삶의 품격을 높여줄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단어가 품은 세계 -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 수업

황선엽 (지은이), 빛의서가(2024)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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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간 공직에 몸담고 퇴직했습니다. 지금은 은퇴 이후의 삶을 다시 배우는 60대 인턴으로 살고 있습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인생 2막의 의미를 발견하는 글을 씁니다. 오마이뉴스 '사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중장년과 노년의 삶을 기록하며, 나이 들어서도 배울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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