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일 서울 성북구 사랑제일교회에서 전광훈 목사가 국민 저항권 관련 특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5.11.24 ⓒ 연합뉴스
12월이다. 대로변 한복판엔 크리스마스 트리가 걸리고, 카페나 각종 판매점엔 캐럴이 흐른다. 자선냄비, 군고구마를 굽는 리어카, '찹쌀떡'을 외치는 한밤중 떡 장수까지. 추억 속 기억을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켠이 풀어졌을 계절이다. 그러나 요즘의 12월은 유난히 쓸쓸하다. 설렘보다 복잡한 감정이 먼저 앞선다.
이 쓸쓸함의 배경에는 지난 12.3 불법 비상계엄 이후의 사회적 풍경이 있다. 물론 계엄 이후에 문제가 새로 생긴 것은 아니다. 알게 모르게 숨어 있던 문제들이 그 이후 더 또렷하게 드러나는 측면이 강하다. 종교와 정치의 이상한 결합,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된 이해관계가 수면 위로 거칠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일부 개신교 관계자들의 언행이 매스컴을 채웠고, 최근에는 통일교와 정치인의 연루설로 시끄러운 상황이다. 종교가 권력과 어떤 방식으로 가까워져 왔는지, 신앙의 외피 뒤에서 무엇이 오갔는지를 묻는 기사들이 이어진다. 이런 보도를 접할수록 마음은 가볍지 않다.
여기서 문제는 "교회 이미지가 나빠졌다" 같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신뢰의 기반이 흔들리는 문제다. 종교는 시민사회에서 약자의 편이거나, 최소한 약자를 보호하는 윤리의 울타리로 기능해 왔다. 그런데 일부 교회나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의 확성기가 되고, 특정 진영의 언어를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순간, 종교는 공동체의 안전판이 아니라 갈등의 연료가 된다. 그 부담은 교회 밖으로 번진다. 이웃의 일상, 지역의 분위기, 다음 세대의 가치관까지 함께 흔들린다.
분명히 해둘 점이 있다.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조용히 봉사하고, 이름 없이 희생하며, 신앙의 본래 자리를 지키는 교회와 성도들도 여전히 많다. 다만 일부의 모습이 강하게 부각되면서 교회 전체가 오해와 불신의 시선 속에 놓이는 현실이 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 '일부의 일탈'이 아니라 '전체의 신뢰를 깎아먹는 구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교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는 분명하다. 믿음, 소망, 사랑, 영성, 봉사, 희생이 그것이다. 그런데 어느 장면에서는 이익과 거래의 언어, 강압과 선동의 방식, 불통과 오만 같은 이기적 태도가 더 크게 와 닿는다. 그럴 때 의식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게 아닌데.' 종교가 세상 속에서 더 나은 방향을 제안하기보다, 갈등의 한 축으로 읽히는 순간을 걱정한다.
특히 안타까운 지점은 상식적 판단력이 흔들리는 일부 성도의 모습이다. 신앙은 원래 질문과 성찰을 통해 단단해진다. 하지만 어떤 분위기에서는 질문이 꺼려지고 다른 의견이 쉽게 배척된다. 사실을 확인하기보다 '우리'의 감정이 먼저 앞서고, 교회 안에서 나오는 내적 비판과 자기성찰조차 적대시되는 장면도 목격된다. 자정 능력이 약해질수록 공동체는 더 쉽게 고립된다. 결국 교회는 사회와의 대화에서 멀어진다.
이쯤 되면 개선책은 "좋은 말로 화해하자" 수준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처방이어야 한다.
첫째, 교회는 정치적 주장과 신앙의 권위를 분리해야 한다. 개인이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는 있으나, 그것을 강단의 권위로 덧씌우는 순간 신앙은 선동이 된다.
둘째, 교회 내부에 내적 비판이 살아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장로·집사·평신도의 질문이 막히지 않고, 재정과 의사결정이 투명하게 공개되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셋째, 교회가 사회에서 회복해야 할 첫 자리는 거리의 구호가 아니라, 지역의 돌봄이다. 독거노인, 취약계층의 의료와 생계, 가족 해체로 고립된 사람들 같은 사회적 약자 곁에 서는 일이 '말'보다 먼저여야 한다.
넷째, 성도 개인도 신앙을 '정답을 맞히는 일'이 아니라 '나를 점검하는 일'로 되돌려야 한다. 설교나 유튜브, 단체 채팅방에서 자극적인 말을 들었을 때 곧바로 공감하거나 분노하기 전에, 그 말이 사실인지부터 한 번 확인해야 한다. 누군가의 발언이 실제 뜻과 다르게 잘려 전해진 것은 아닌지, 특정 집단을 겨냥한 과장된 프레임은 아닌지 살펴보는 일이다.
그리고 화가 났다면 그 분노가 신앙의 양심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진영이나 집단의 이해관계를 '내 편'처럼 지키려는 감정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신앙이 '편 가르기'의 도구가 되는 순간, 가장 먼저 흐려지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교회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죄인 된 나를 고백하는 일이 무뎌진다. 캐럴이 성탄을 예고하지만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트리는 반짝여도 따뜻해지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이는 신을 잃어서가 아니다. 신을 말하는 방식이 신앙의 본래 언어와 멀어져 보이는 순간들이 쌓였기 때문이다.
12월의 쓸쓸함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적당히 외면해 왔던 숙변 같은 문제들이 드러난 결과일 수 있다. 교회가 다시 신뢰를 얻으려면 더 큰 목소리보다 더 낮은 태도, 더 강한 확신보다 더 깊은 자기성찰이 먼저여야 한다. 그리고 그 성찰은 선언이 아니라 제도와 실천의 변화로 확인되어야 한다. 정치의 언어가 신앙을 대신하는 순간, 교회는 세상을 설득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니 이 12월만큼은 교회가 바깥을 향해 외치기보다, 안을 향해 조용히 돌아보며 '다시 신뢰를 얻는 방법'을 실제로 선택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