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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대들 전투지가 보이는 곳
석대들 전투지가 보이는 곳 ⓒ 천도교 사회문화관

11일부터 12일까지 동학순례길 기초 조사를 위한 4치 동학 기행이 있었다. 천도교 사회문화관(최인경 사회문화관장) 주관으로 시작한 올해 마지막 순례길이다. 순례 첫날은 장흥의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석대들 전투터, 장흥 무명농민군 묘역, 해남 양한묵 기념관을 돌아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전국에서 가장 치열한 동학농민혁명 전투지 중 한 곳이 장흥의 석대들 전투지다, 석대들은 장흥읍 남외리 국도변에 위치한 석대 앞 들판이다. 농민군과 일본군 및 관군 사이에 1894년 12월 1일부터 15일까지 보름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죽창과 쇠스랑을 들고 일본군의 신무기에 맞서 싸운 수많은 농민군이 희생된 곳이다.

석대들 전투는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지도부가 모두 피체 된 이후 일어난 항전이다. 3만여 농민군이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맞서 싸우다 일방적으로 학살당한다. 12월 14일과 15일 이틀간에 거쳐 수많은 농민혁명군이 희생되며 패배하자 관군과 일본군의 동학농민혁명군 무차별 학살이 이어졌고 근처 공터에 매장됐다. 공식 처형된 300여 명만 신원이 알려졌고 1699명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유해가 발굴되어 무명농민군 묘역에 안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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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대들 전적지는 1호, 정읍 황토현 전적지(사적 제295호), 2호,공주 우꿈치 전적지(사적 제 387호), 3호 장성 황룡전적지(사적 제 406호)에 이어 2009년 4번째 국가 사적((사적 제 498호) 으로 지정되었다.

장흥 무명농민군 묘역은 전남 장흥군 장흥읍 금산신기길 131에 자리하고 있다. 금상이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한 무명농민군 묘역에서 그날의 치열했던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지장 양한묵 생가 알림판
지장 양한묵 생가 알림판 ⓒ 이명옥

양한묵 생가는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산길 4-25에 자리한다. 양한묵은 1919년 3. 1운동에 참여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유일하게 옥중에서 순국했다. 양한묵은 1862년 4월 29일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일본에서 손병희를 만난 양한묵은 천도교를 대중화하는데 기여한 이론가다,

1905년 말 손병희의 지시로 쓴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은 천도교의 근대화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고 동학사상을 현대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1906년 양한묵은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가 창립되자 1906년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 1907년 현기사장(玄機司長) 등의 직책을 맡았다. 1907년 7월에 이기·고정주·강화·백인기·나인영·윤주찬 등이 호남의 교육 발달을 목표로 호남학회를 설립하자 이에 동참하기도 하였다(참조 : 한국학중앙연구원).

전남 일대 동학농민 항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장흥 석대들 전투는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주력군과 별개로 지도부 피체 이후에도 농민들이 항전을 이어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석대들 전투에 참여한 농민이 3만여 명에 사망자 수는 수천 명에 이르는 치열한 전투였다 한다. 그들의 희생이 3.1 만세 혁명으로 5.18 민주화항쟁 2024년 빛의 혁명으로 이어져 왔음을 떠올리며 숙연해지는 순례길이었다.

#장흥무명농민군묘#해남양한묵#장흥석대들전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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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옥 (mmsarah) 내방

‘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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