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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0 09:51최종 업데이트 25.12.10 09:51

어금니를 새로 해 넣는 날 생각난 사람

[덤으로 사는 인생 여적(餘滴)] 제6화 눈물 젖은 빵과 친구 한의섭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소보로 빵 고교 시절 '눈물 젖은 소보로 빵'
소보로 빵고교 시절 '눈물 젖은 소보로 빵' ⓒ 박도

오랫동안 앓던 어금니를 올 봄에 뽑은 뒤, 이 섣달에 임프란트 어금니를 해 넣던 날이다. 동네 단골 치과는 시술 6개월 후에야 임프란트 새 어금니를 끼워 넣어 주었다. 양치를 한 다음, 두어 번 씹어보자 입안이 꽉 차는 게 기분이 매우 좋았다. 시술을 마친 치과 의사는 나에게 앞으로 40년은 끄떡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그 말에 나는 답례 겸 한 마디 했다.

"웬걸요, 40년이라니 끔찍 스럽습니다. 10년만 잘 버텨줘도 고맙겠습니다."
"선생님, 부디 장수하셔서 좋은 작품 많이 남겨주십시오."

그 인사말을 뒤로 한 채 치과를 나온 뒤,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버스 도착 알림 전광판에는 집으로 가는 8번 버스는 19분 후에 도착한다고 표지 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손을 들고 택시를 잡으려 해도 날씨 탓인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그 순간 버스 정류장 뒤 파리바게트 간판과 함께 '아메리카노 1900원'이라는 쇼윈도에 붙은 광고지가 보였다. 이날 따라 외투도 입지 않는 차림이라 몹시 쌀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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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빵집에 들어가 커피 한 잔 마시면 버스 시간을 얼추 맞을 거야.'

퍼뜩, 그런 생각에 주저 없이 빵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막 커피를 주문하고 돌아서는데, 눈에 익은 여러 빵들이 나를 유혹했다. 그 가운데 고교 시절 속칭 '곰보빵'이라 하여 엄청 즐겨 먹었던 소보로 빵이 눈에 번쩍 띄는 게 옛 추억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그 빵을 하나 집은 뒤 주인에게 드리자 곧 그는 3900원을 결재 한 뒤 카드와 영수증을 건넸다. 잠시 후 갓 뽑은 커피와 소보로 빵을 담은 소반을 나에게 건넸다. 나는 그 소반을 받아 들고는 주인이 묻지도 않은 말을 뱉었다.

"고교 시절 무척 즐겨 먹던 빵입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나는 고향 구미에서 초, 중학교를 다닌 뒤 고교부터는 서울로 진학했다. 그런데 고교는 3년이 아니라 남달리 4년을 다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면 고 1학년 과정을 1961년, 1962년 두 해 동안 배웠다. 사연인 즉, 1961학년도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해 뜻밖에 5.16 쿠데타 발생으로 갑자기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는 탓으로 하는 수 없이 휴학을 했다.

그러자 그게 내 인생의 끝인 줄 알고 나는 날마다 등교치 못하고 죽을 생각만 했다. 그러다가 어느 하루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한 장애인을 만났다. 그날 이후 그런 생각을 가졌던 내가 몹시 부끄러웠던 나머지, 어쨌든 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서 새로 시작한 게 신문 배달원이었다.

이듬해인 1962학년도 3월 신학기에 복학을 했다. 그 무렵 부모님은 부산으로 가시고, 나 혼자 서울에 남았다. 서울 북촌 계동 중앙학교 옆 꼬부랑 합죽 할머니 함석 집 건넌방에 사글세로 살았다. 그 시절은 무척 바빴다.

신문배달원 졸업기념 사진 1963년학년말 동아일보 세종로보급소 신문배달원 졸업기념 사진(기자는 제3열 좌에서 네 번째)
신문배달원 졸업기념 사진1963년학년말 동아일보 세종로보급소 신문배달원 졸업기념 사진(기자는 제3열 좌에서 네 번째) ⓒ 박도

신문 배달원

새벽 4시 통금 해제 사이렌 소리나 교회 새벽 종소리에 잠이 덜 깬 상태로 옷을 주섬 후딱 입고 대문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 길로 청진동 동아일보보급소까지 달음박질이었다. 세종로 신문보급소에 이르면 오전 4시 30분 전후다.

보급소 구역 조장으로부터 신문 200여 부를 받아 옆구리에 끼고서 배달 구역인 서촌 누하동으로 또 달음박질이었다. 1시간 30분 정도 구역 독자 집에 배달을 마치면, 오전 6시 30분 전후로, 거기서 중앙청을 경유하여 계동 집까지 재빨리 달려가면 7시가 조금 넘었다.

그제야 급히 밥을 해 먹거나 주인 할머니가 대신 해주신 밥을 먹고 수송동 조계사 옆에 있는 학교(중동고교)로 갔다. 학교에서 그날 수업이 끝나면 가방을 들고 곧장 청진동에 있는 동아일보세종로보급소로 갔다. 곧 보급소 조장으로부터 본사에서 막 배달된 석간을 받아 옆구리에 끼고 배달 구역으로 달려갔다(그때는 하루에 두 번 발간되는 조석간제였다). 석간 배달 후 다시 보급소로 가서 가방을 찾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시계 초침처럼 바쁘게 돌아가던 생활이다 보니 때로는 점심 도시락을 싸갈 수 없는 날이 많았다. 그 시절에는 교내에 매점도 없었다. 그런 날 점심시간에는 슬그머니 운동장 수도 가로 가서 물로 배를 채운 뒤 교실로 돌아오곤 했다.

한의섭 친구 고1 때 뒷자리에 앉았던 한의섭 친구
한의섭 친구고1 때 뒷자리에 앉았던 한의섭 친구 ⓒ 1964년 중동고교 졸업 앨범에서
그런 내 행동을 유심히 바라본 내 뒷자리의 '두꺼비'라는 별명의 한의섭(당시 경향신문 연재 인기 만화 '두꺼비' 안의섭 화백과 이름이 같기에) 친구는 그 며칠 후부터 아침에 등교를 하면 슬그머니 빵이 담긴 봉지를 내 책상 서랍에 아무도 몰래 넣어주었다.

"얘, 아무 소리 말고 점심 때 먹어."

소보로 빵

그런 날, 나는 점심시간에 그 빵 봉지를 들고 수도 가로 가서 주린 배를 채웠다. 그 빵 봉지에는 곰보 빵이라는 소보로 빵이 두어 개 들어 있었다. 그때 그 빵은 꿀맛으로 입안에서 저절로 녹았다.

그 얼마 뒤, 내가 가회동에 입주 가정교사로 거처를 옮긴 뒤부터는 주인 아주머니가 매일 도시락을 싸주셔서 그 친구의 빵 봉지는 사라졌다. 내 인생 막장에 든 요즘, 그때의 일이 새록새록 다시 돋아나 나는 빵집에 가면, 그 소보로 빵을 집는다. 그때 그 소보로 빵은 나에게 '눈물 젖은 빵'이었다.

나는 교사가 된 뒤, 다소 삶의 여유를 찾았다. 그때부터 고교 동기 동창 두꺼비 한의섭 그 친구를 여러 번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여태까지 그의 소식을 모르고 있다. 그는 서울에서 대학(한양 공대)을 졸업한 뒤, 일찌감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갔다. 동창회 주소록에 나와 있는 그의 집으로 몇 차례 편지와 전화로 연결해도 제대로 닿지 않았다.

2004년 내가 독자들의 성금으로 백범 암살 진상 규명 차 미국 워싱턴 D. C. 인근 메릴랜드 주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으로 오가는 길에 로스앤젤레스에 들렀다. 그때 그곳 동포에게 주소와 전화 번호를 건네며 여러 차례 수소문해도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그의 시 '하프를 연주하는 사람'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노래하였다. 나는 그때 그 친구가 몰래 책상 서랍에 넣어준 그 '눈물 젖은 소보로 빵'을 자주 먹은 탓인지, 인생 막장인 이 나이에도 여태 이런저런 사람들의 인생을 긁적이는 작가로 사나 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박도 페북에도 실립니다.


#소보로#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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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 (parkdo45) 내방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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