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궐산암벽 위를 가로지르는 붉은 길인 하늘길 ⓒ 문운주
용궐산(옛 용골산)은 능선이 남쪽으로 뻗어 나가며 마치 용이 하늘로 치솟는 듯한 형세를 띤다. 산 앞으로는 섬진강(만수탄)이 흐르고, 장군목 한가운데에는 마을의 수호신처럼 여겨지는 요강바위가 놓여 있다. 풍화로 깎이고 패인 형세가 용이 몸을 비틀며 솟구치는 모습과 닮아 기묘한 인상을 준다.
한국전쟁 당시에 마을 주민이 바위 속 구멍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이를 원하는 여인이 기도하면 소원을 이룬다는 전설도 남아 있다. 1993년 도석꾼에 의해 도난당하는 사건까지 겪었으나, 1년 6개월 만에 주민들에 의 제자리로 돌아오며 더욱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요강바위만수탄이 흐르는 장군목 한가운데 놓여 있는 요강바위는, 아이를 갖지 못한 여인이 바위 속에 들어가 지성을 들이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전설로도 유명하다. ⓒ 문운주
지난 6일, 순창의 용궐산을 찾았다. 본격적인 산행에 앞서 먼저 이곳에 얽힌 전설을 품고 있는 만수탄의 요강바위를 들여다보았다. 섬진강 물길이 굽어 흐르는 한가운데 세월을 견디며 서 있는 바위는 오래된 마을 이야기들을 조용히 들려주는 듯했다. 이어 때마침 열리고 있던 '순창 동계 밤 올림픽' 축제장에도 들렀다.
군밤 굽는 고소한 냄새가 축제장에 가득했다. 그 옆에서는 전통놀이 체험이 한창이다. 고무줄놀이에 아이들 웃음이 연달아 터졌다. 가족 단위의 군밤 굽기 체험도 정겹다. 이 작은 축제가 만들어내는 온기가 마음까지 덥혀주는 듯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겨울 햇살처럼 환한 기쁨이 번지고 있다.

▲'순창 동계 밤 올림픽'순창 용궐산 장군목에서 열리는 밤 축제의 한 장면 ⓒ 문운주
축제의 온기를 뒤로하고 산길로 들어서자 분위기는 전혀 다른 결로 바뀐다. '용궐산 하늘길'은 이름 그대로 낭떠러지를 따라 난 구간이 여럿이다. 특히 잔도(절벽에 붙여 만든 길)에서는 겨울 솔바람에 실린 은근한 송진 향이 스치며 아슬아슬한 스릴을 더한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긴장과 설렘이 동시에 밀려온다.
용궐산 하늘길은 돌계단 700m, 데크계단 1,096m가 이어지는 꽤 만만치 않은 코스다. "해발646.7m, 금방 오르겠지" 했다면 큰 오산이다. 산행이 깊어질 무렵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세 명이 함께 걷기 시작했는데, 중도 포기자가 발생했다. 돌계단이 끝나갈 무렵, 결국 한 친구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오르지 않겠다는 표정이다. 세월의 무게인지, 아니면 눈앞에 펼쳐진 급경사 계단의 위압감 때문인지. 아마 둘 다였을 것 같다. 숨을 몰아쉬며 건넨 그 '무언의 항복 선언'에 웃음이 터졌다. 덕분에 이날의 산행은 한층 더 오래 기억될 만한 추억이 되었다.
겨울의 용궐산은 높지 않은 산이 오히려 더 거칠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초록으로 우거져 있던 활엽수 숲은 이미 잎을 모두 떨궈 나무의 뼈대만 남아 있다. 그 적막은 눈이 아니라 바람이 풍경을 만드는 계절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한다.

▲용궐산암벽에 새겨진 추사 김정희의 글씨 ‘谿山無盡(계산무진)’. 계곡과 산이 끝이 없다는 뜻이다. ⓒ 문운주

▲섬진강용궐산에서 내려다본 섬진강의 겨울 물길. ⓒ 문운주

▲순창 용궐산 하늘길1311개의 계단, 돌계단 700m, 데크계단 1096m가 이어지는 낭떠러지 길. ⓒ 문운주
계단 구간부터는 숨이 차오른다. 계단 숫자가 무려 1311개. 곳곳에 추사 김정희의 글귀 '谿山無盡(계산무진)' 같은 사자성어가 새겨져 있어, 잠시 멈추는 순간마다 의미를 곱씹게 된다. '헤아릴 수 없는 산의 끝'이라는 말처럼 계단도 끝이 없는 듯 이어진다.

▲용궐산굽이굽이 섬진강과 아스라하게 보이는 지리산 풍광 ⓒ 문운주
전망데크에 올라서니 발아래로 섬진강이 S자를 그리며 흘러가고, 잎을 털어낸 활엽수 숲 너머로 겹겹의 능선이 겨울 특유의 투명한 빛을 띠고 있었다. 계절이 최소한의 색만 남긴 풍경은 오히려 산의 속살을 더 정확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정상부로 갈수록 길은 다시 고요해진다. 아래에서 올라오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어느새 사라지고, 계단을 밟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진다. 산등성이에 닿는 순간, 바람이 방향을 틀며 "여기까지 왔다"는 신호를 보냈다. 정상 비룡정에서 내려다본 순창의 겨울은 소박했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깊은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