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석주 이상룡 선생 ⓒ 이항증
'노블레스 오블리주' 또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불어는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그 사회가 오래전부터 용인한 사회적 신분을 가진 자는 국가나 그 사회가 국난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는 가장 먼저 그 어려움 극복에 앞장선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과연 국난시절, 그러한 사회적 대우를 받아온 자들이 앞장서서 그런 국난 극복에 솔선했는지 그 예를 찾기 어렵다.
그와 같은 사회적 혜택을 받은 자들이 먼저 외세에 영합하여 국권을 강대국에 고스란히 갖다 바치는 데 앞장서서 백성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자행됐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우리 사회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집안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서울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안동의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구미의 왕산(旺山) 허위(許蔿) 집안 등 그리 많지 않는 듯하다.
우리의 근대사를 보면, 일제로부터 한일 합방에 공로가 많았다 하여 그들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은사금을 받는 등 특혜를 받아 해방된 지 8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지난 과오를 청산하지 못하여 뜻 있는 백성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이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정초, 만주로 망명하던 중 압록강을 건널 때 읊은 시다.
이미 내 논밭과 집 빼앗아 가고
다시 내 아내와 자식 해치려 하네.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무릎 꿇어 종이 되게 할 수 없도다.
旣奪我田宅 復謀我妻子 此頭寧可斫 此膝不可奴

▲당시 압록강 철교 ⓒ 눈빛출판사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이상룡은 1858년 경북 안동군 법흥동 임청각에서 유림 명문 이승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어릴 때 이름은 상희(象羲) 호는 석주(石洲)이며,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상룡(相龍)으로 개명하였다.
내가 중국 항일 유적지 답사에 앞서 안동의 임청각을 둘러본 바, 90여 간이나 되는 고색창연한 전통 한옥이었다. 임청각은 보물 182호로 조선 중종 때 형조좌랑 이명이 낙향하여 지은 고택으로, 앞은 낙동강이 흐르고 뒤는 영남산이 임청각을 껴안고 있었다. 이런 명문에서 태어난 이상룡은 평생 부귀를 누릴 수 있지만 삭풍이 휘몰아치는 정월에 고국산천을 뒤로 한 채 만주 땅으로 떠났다.
일찍이 이상룡은 퇴계학 정통을 이은 서산 김흥락(金興洛) 문하에 들어가서 학문을 익혔다. 1876년에 강화도조약에 따른 개항에 충격을 받아서 척사위정(斥邪衛正) 활동을 하다가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책을 덮고 구국 의병활동에 나섰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우리나라가 마침내 일본의 보호국이 되자, 이상룡은 군자금을 마련하여 가야산으로 들어가 의병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구식 무기로 일제의 신식 무기를 도저히 당할 수 없었다. 신돌석, 김상태 의병장 등이 일본군에 참패하자 이상룡은 "이는 시세에 어둡기 때문이다"하고서 분연히 떨치고 나와서 동서양의 새로 나온 책을 구하여 열심히 읽었다.
신학문으로 서양의 민주 제도에 눈을 뜨게 되자, 먼저 당신의 노비 문서부터 모두 불살라 버리고 그동안 거느리던 종들도 모두 해방했다. 또한 고향 안동에다 유인식, 김동삼과 함께 협동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여 민족 자강운동에 앞장섰다.

▲안동 임청각 ⓒ 박도
국치 이듬해 망명 길에 오르다
1910년 8월, 마침내 합방 국치를 당했다. 이상룡은 이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중추원에 송병준, 이용구 등 역적 무리들의 목을 치라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빈 하늘에 쏜 화살이었다. 망국의 통한으로 아픈 세월을 보내던 중, 그해 11월 비밀 광복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이동녕(李東寧), 양기탁(梁起鐸) 등이 밀사를 보내왔다.이들 밀사는 신민회가 우리 조상들의 옛 터인 서간도에 조국 광복운동 국외 기지를 추진한 바, 이상룡의 참여를 타진해 왔다.
이에 이상룡은 선뜻 찬동하여 뜻을 굳히고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였다. 은밀히 가까운 일족과 동지에게 동행을 권유하자 50여 가구가 따라 나섰다.
1911년 정초 그를 따르는 가족 일단은 압록강을 건넜다. 먼저 도착한 이동녕, 이시영 형제들이 이상룡을 찾아와 앞일을 의논하였다. 그분들뿐 아니라 매일같이 이상룡을 찾아드는 동포들이 줄을 잇자, 그곳 토착민들이 이전의 조선족들은 쪽박을 차고 만주에 왔는데, 이번에는 풍채 좋은 조선인이 마차 두 대에 수많은 가족을 이끌고 온 것을 보고, "조선에서 왕자가 왔다"라는 허무맹랑한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자 청국 관리들이 각지의 군사를 시켜 수비케 하고, 조선인에게는 집을 빌려주지 못하게 하여, 한동안 노숙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에 이상룡은 봉천성에 진정하여 조선인의 거주를 허용해 줄 것과 중국 민적(民籍)에 들어갈 수 있도록 청원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임정묘역에 안장된 석주 이상룡 초대 국무령 ⓒ 박도
큰일을 경영함에 어찌 소절(小節)에 구애될 수 있겠는가
아울러 통화, 회인, 단동 지방에 여관을 설치하여 동지들의 활동과 뒤따라오는 망명객들을 도왔다.이상룡은 남의 땅에 온 이상, 토착민과 이질감을 없애고자 당신이 먼저 상투를 자르고 청국 옷차림으로 고쳐 입고 이름마저도 상룡으로 바꿨다. 동포들 중에 이런 처사에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가 있었으나 "큰일을 경영함에 어찌 소절(小節)에 구애될 수 있겠는가?"라고 그들을 설득하였다.
중국 땅에 살기 위해서는 우선 언어 장벽을 무너뜨리는 게 급한 일인지라 중국어강습소를 차려서, 먼저 배운 사람들을 우리 동포들이 사는 여러 곳으로 보내어 그들을 가르치면서 토착민과 친선을 꾀하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순국> 12월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