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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회관 유리창 너머로 늦가을 햇빛이 길게 드리워지던 날이었다. 계단을 오르며 문득 두 개의 이름이 떠올랐다. 모든 땅을 팔아 군대를 창설한 사람, 최운산 장군. 그리고 지도에는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우리가 쉽게 발로 밟을 수 없는 땅, 봉오동. 광복 80주년을 앞둔 올해, 다시 북간도 봉오동을 향해 마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곳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한 번의 승전'을 위한 전투 현장이 아니다. 봉오동은 전쟁을 준비하던 장소, 독립을 꿈꾸던 사람들이 수년간 땀과 자원을 모아 세운 거대한 군사기지였다.

11월 7일 오후 2시. 광복 80주년을 맞아 열린 제9차 최운산 장군 학술 세미나 〈북간도 항일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오래된 문을 열고 백 년 전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밀려왔다. 사람들의 숨결 사이로, 사라진 이름들을 다시 부르려는 의지가 잔잔한 떨림처럼 감돌고 있었다. 김영호 국회의원과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공동 주최해 역사학자와 군사학자, 시민과 연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사라진 봉오동의 실체를 되살리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제9회 학술세미나 봉오동 기지 구축의 중심에는 최진동·최운산 형제가 있었다. 농장·광산·무역을 기반으로 마련한 경제력으로 토지를 사고, 사관학교와 병영을 세웠다.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제9회 학술세미나봉오동 기지 구축의 중심에는 최진동·최운산 형제가 있었다. 농장·광산·무역을 기반으로 마련한 경제력으로 토지를 사고, 사관학교와 병영을 세웠다. ⓒ 이향림

독립전쟁이 '전환'되던 해,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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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먼저 1920년이라는 해의 의미를 짚었다. 1910년대 내내 이어진 무장투쟁이 '산발적 저항'의 성격을 띠었다면 1920년 전후는 이를 넘어 조직적 전면전으로 방향을 틀던 시기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군무원 포고 제1호」를 통해 이 해를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면서, 간도와 연해주 일대 독립군 단체들은 통합을 서두르고 체계적인 군사력 양성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 흐름의 한가운데에, 오늘 우리가 다시 부르는 이름 봉오동이 있었다.

세미나는 봉오동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한 문장으로 문을 열었다. "봉오동은 '전투의 장소'가 아니라, 대한군무도독부의 본부이자 북간도 무장투쟁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육군사관학교 이상훈 연구자의 말이었다. 오랫동안 봉오동은 단지 1920년 6월~7월, 며칠 동안 벌어진 전투의 현장으로만 기억되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가 밝혀낸 봉오동의 실체는 전혀 달랐다.

봉오동에는 사관양성소(사관학교), 병영과 연병장, 독립군을 교육하는 교양·교육시설, 군수물자를 생산하고 보급하는 시설, 식량과 무기를 비축하는 병참 기지까지 갖춰진, 종합 독립군 군사기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투를 앞두고 급히 꾸려진 임시 진지가 아니었다. 1910년대 초부터 1920년대 초까지, 무려 10여 년에 걸쳐 축적된 무장 독립군의 요새였다. 이 기지 형성의 중심에는 최진동·최운산 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간도 일대에서 농장·광산·무역을 경영하며 경제력을 축적했고, 그 자본으로 토지를 매입해 사관학교와 병영, 식량 창고와 무기 제작소를 세웠다.

1918~1920년 사이, 봉오동을 중심으로 대한군무도독부와 지역 독립군 단체, 청년단체가 결합하며 봉오동은 북간도 최대 무장 세력의 본거지가 됐다. 광주대학교 조필군 교수는 토론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봉오동과 청산리 승전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기적이 아닙니다. 그 뒤에는 10년에 걸친 준비, 조직, 군사교육, 물자 조달이 있었고 그 중심에 최운산 장군이 있었습니다." 자료를 통해 추산되는 당시 봉오동 일대 독립군 병력은 정규 병력만 600~700명 이상, 예비병력 400명, 사관생도 120여 명, 기병대까지 포함하면 주변 독립군 단체와 연합해 1200명에 이르렀다. 동북아 독립군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무장 독립전쟁을 이끌 통합 사령부의 필요성이 커졌다.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을 중심으로 국내 진공계획이 구상되었고, 그 실천을 위해 북간도 독립군 세력이 하나로 묶이기 시작했다. 1920년 3월 30일, 임시정부는 '대한군무도독부'의 설립을 공식 승인했다. 총사령관 최진동, 부사령관 최운산이 임명되며 봉오동은 사실상 독립전쟁 총사령부가 되었다.

1919년 말부터 1920년 초까지, 대한군무도독부는 국경을 넘어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한다. 독립군은 온성·회령·경원·종성 등지로 진입해 일본 관청·경찰서·헌병대 등 조선총독부 기관을 34차례 공격했다. 3월 1일부터 6월 초까지, 국내 진입만 32회에 이른다.

육군군사연구소 김영환 연구자의 발표에 따르면 이 작전은 단순한 보복전이나 유격전이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이 국제적 전선에 참여하는 주체가 되어 독립을 쟁취한다"는 전략사상에 기반한, 국가적 전략작전이었다. 일본군은 이에 대응해 대규모 토벌작전을 개시했고, 그 과정에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가 일어났으며 곧이어 청산리 전투로 불길이 번져갔다. 육군사관학교 김연옥 연구위원은 말했다. "국내진공작전은 봉오동·청산리 승전을 촉발한 직접적 전략 기반이었습니다."

기록되지 못했을 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국민대 이계형 연구자는 최운산 장군의 부인이자 실질적으로 대한군무도독부의 병참대장이었던 김성녀 여사의 삶을 발표했다. 김성녀 여사는 봉오동 기지에서 독립군의 의식주, 식량과 탄약의 조달과 배분, 무기와 군수품 관리, 부상병 돌봄 등 전쟁의 앞과 뒤를 잇는 모든 생활·병참 전선을 책임진 사람이었다. 여성항일운동기념사업회 정원식 연구자는 말했다. "여성 독립군은 기록되지 않아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구조를 떠받친 동역자였습니다." 그 말은 봉오동이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의 이름 없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적 역사 공간임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발언 중인 최성주 이사 “지금 봉오동에 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최성주 이사의 담담한 한 문장은, 저수지 아래로 가라앉아버린 봉오동의 현실을 조용히 환기했다.
발언 중인 최성주 이사“지금 봉오동에 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최성주 이사의 담담한 한 문장은, 저수지 아래로 가라앉아버린 봉오동의 현실을 조용히 환기했다. ⓒ 이향림

세미나가 끝나갈 무렵, 나는 물었다. "지금 우리가 봉오동을 찾아가면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독립군을 기리는 표식이라도 남아 있을까요?"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최운산 장군의 손녀이자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최성주 이사의 답이 돌아왔다. "과거에는 가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봉오동은(하촌) 저수지 아래 잠겨 있고, 전투 지역인 상촌은 보존돼 있지만 상수원보호구역 이라 들어갈 수 없고, 현장 접근도 어렵습니다."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서늘하게 꺼졌다.

총성이 울리던 계곡, 수백 명의 독립군이 꿈을 꾸던 터전. 지금은 우리가 바라볼 수조차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바로 그 상실감 때문에, 더욱 분명하게 느꼈다. 그래서 더 많이 말해야 한다. 그래서 더 깊이 기억해야 한다. 후대가 직접 답사할 수 없기에, 우리가 기록으로, 교육으로, 이름 부르기로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

#최운산장군#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봉오동전투#독립운동가#김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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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세계사가 나의 삶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임을 깨닫고 몸으로 시대를 느끼고, 기억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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