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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5 13:55최종 업데이트 25.11.16 12:36

"일하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꿰뚫어 본 시"

권보연 시인의 첫 시집 <달리지, 달팽이> 펴내 ... 21일 출판기념회

 노동자 몸짓패 ‘세모단' 춤꾼으로 활동하는 권보연 시인(가운데).
노동자 몸짓패 ‘세모단' 춤꾼으로 활동하는 권보연 시인(가운데). ⓒ 세모단

그니는 발이 없지//꼭대기부터 로비까지/입이 바싹 마르도록/바닥을 훔치는/그니는 말이 없지//쓰윽 이어진 걸레질 자국/점액을 남기는 달팽이처럼/빌딩 구석구석 촉촉한 그니의 흔적//가끔은 유리창에 붙어/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지/유니폼 밖으로 드러난 단단한 팔/맑아진 세상을 보고 씨익 웃고는/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들지//쉴 곳도 없고/쉴 수도 없어/쉼터를 등에 지고 애쓰는 하루//어둠 없는 빛은 없고/노동 없는 부는 없어/없는 것들의 힘으로/세상을 훔치는 달콤한 꿈도 꾸지//하루의 꿈, 빌딩도 지쳐 눕는 저물녘/일터를 벗어난 달팽이들의 퇴근길/한 땀 한 땀 노동으로 일군 세상/지상에 널린 풀잎을 씹으며//오늘도 달리지, 달팽이

권보연 시인의 첫 시집 <달리지, 달팽이>(도서출판 두레북 간)에 실린 대표시 "달팽이" 전문이다. '달팽이'는 곧 '청소 노동자'를 말한다. '바닥을 훔치'고 '걸레질 자국'에서 짐작할 수 있다.

청소노동자가 하루 종일 빌딩 안팎을 쓸고 닦는 일은 고됨의 연속임을 느끼게 한다. 깨끗해진 빌딩이 더 빛나 보여야 하는데 '빌딩도 지쳐 눕는 저물녘'이라고 하니 말이다.

권보연 시인은 청소노동자의 삶을 더듬은 이 시처럼 일터의 땀과 보람, 그리고 가슴 뛰는 장면들을 담은 시들을 한데 묶어 펴냈다. 권 시인은 민주노총 경남본부가 매년 주최하는 '들불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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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문학상은 민주노총 경남본부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이끌었던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매년 가을에 여는 '들불대동제'의 한 행사로, 노동자와 가족들이 운문‧산문을 응모해 심사를 거쳐 시상해오고 있다.

권 시인은 2018년에 들불문학상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이듬해 김유철 시인이 강사를 맡았던 '인문학으로 만나는 시창작교실'에 수강하며 창작 활동을 해왔고, 지금은 경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동발달센터 인지치료사인 권 시인은 노동자 몸짓패 '세모단'(세상의 모든 노동자여 단결하라)의 춤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달리지, 달팽이>에는 노동자의 생활과 감정이 담긴 6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종이 위에 또박또박 새긴 마음을/살포시 접어 가방 가득 챙깁니다/낙엽 지는 공장 앞/잊혀진 계절 같은 나의 이름을/그리운 당신에게/떨리는 마음 담아 내밀어 봅니다//기름때 낀 손/성마른 겨울나무 위 싸락눈처럼/허연 버짐이 자리 잡은 손/노동자, 그 거친 손에 담긴 세상은/결코 초라하지 않다고/누가 알아주지 않아도/밤새 곁은 지켜주는 가로등처럼/세상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고/공장 안의 당신과/공장 밖의 우리가/두 손 맞잡을 날을 기억합니다" (시 "손" 전문).

"...//상처투성이 손을 가진 말 없는 사내의/낡은 옷가지들도 쉬어가는 저녁/빛나고픈 것들이 모여 꽃으로 피는/언덕에 사는 사내는/땀냄새 풍기는 꽃으로 잠들 것이다" (시 "소금꽃 피는 언덕" 일부).

'기름때 낀 손'이라도, '땀냄새 풍기는 (소금)꽃'이라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그러면서 묵묵히, 열심히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일상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이다. 그러면서 공장 안의 노동자와 밖의 시민들이 '두 손을 맞잡을 날을 기억'한다고 했는데, 이는 흔히 하는 말로 혼자가 아니라 함께 '연대'를 해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다짐으로 여겨진다.

이응인 시인은 "아주 보통의 하루를 건너는 법"이란 제목의 해설에서 "권보연의 시는 일하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꿰뚫어 본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가 오늘의 갑갑함에 갇히지 않고 유연하게 피어오르는 것은 그의 야무진 손끝과 따뜻한 심장 때문이다"라고 풀이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권보연은 일상에서 변혁을 꿈꾸는 시인이다.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거기서 힘을 얻고, 다시 삶을 변화시켜 나간다. 시와 삶이 치열하게 서로를 벼리고 있다. 참으로 든든한 출발에 큰 박수를 보낸다"라며 격려했다.

권보연 시인의 시집 출판기념회는 오는 21일 오후 7시 창원시 중앙평생학습센터에서 열린다.

벚꽃이 피기 전에

벚꽃이 피기 전에
여행을 가고 싶다던 엄마
얇은 귀를 가진 꽃잎들이 깰까 봐
여린 발소리를 가진 사람
당신의 굽은 마디에서
피는 꽃을 보았네

바람에 쓸리고 눈발에 시달려도
단단한 몸뚱아리로
겨우내 품어 지켜 낸 꽃봉오리들
올망졸망 매달려 한껏 피었네

꽃으로 꿀을 지어 벌을 먹이고
꽃으로 별을 새겨 밤하늘을 먹이던 엄마
하루쯤은
꽃에 기대어 잠들어도 좋으련만

떠나지 못한 날들이 겹겹이 피어
화사한 봄을 부르네
흔들리는 꽃잎들의 뿌리

어느새 벚꽃이 지네
엄마가 흩날리네

 권보연 시인의 첫 시집 <달리지, 달팽이>.
권보연 시인의 첫 시집 <달리지, 달팽이>. ⓒ 도서출판 두레북

#들불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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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효 (cjnews) 내방

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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