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임진왜란은 물론 세계 해전사에 길이 새겨진 1592년 7월 8일(음력). 바로 한산도대첩의 날이다. 7월 10일엔 안골포에서 왜적을 쳐부순다. 왜는 이로써 수륙병진 작전을 공식적으로 폐기해야만 했다. 이를 '이순신의 3차 출전'이라 부른다.
1차인 5월에는 옥포·합포·적진포해전에서, 5월 말에서 6월 초의 2차 때는 사천·당포·당항포·율포해전에서 연승을 거둔다. 이순신은 이로써 왜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자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존재로 떠오른다. 출전을 망설이던 1차 때와는 전혀 딴판이다. 녹도만호 정운의 "경상도 바다는 조선의 바다가 아니란 말입니까?"라는 간언에 출전을 전격 결행했다. 한산도대첩 승리로 남해안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어도, 그의 공식 직함은 여전히 '전라 좌수사'일 뿐이었다.
그해 8월 말에서 9월 초, 4차 출전을 결행한다. 여수에서 부산까지, 먼바다를 건너와야 했다. 오로지 격군들의 어깨에 의지해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바람과 조류를 교묘히 타며 천천히 이진하였다. 긴 항해에 격군의 노고를 줄여 전투력을 보존해낸 방책이자, 군졸에게 쏟는 애정이었다. 그만큼 나아감과 머묾에 기율이 잡혀 있었다.
경상·전라·충청의 판옥선과 보급선까지 망라한 대함대다. 부산포에 정박한 왜선 470여 척에 천자총통과 지자총통을 번갈아 쏴 적선 100여 척을 침몰시킨다. '부산포 해전'이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자신의 수족처럼 여기던 녹도만호 정운을 잃는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다. 눈물로 그를 송별한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은 아군의 허실을 여실히 꿰뚫는다. 원균 같은 이와는 전쟁을 치르기 어렵다는 현실을, 그러함에도 단 하나의 왜적도 살려 보낼 수 없다는 절박함. 그런 간절함이 이순신의 발길을 경상도 바다로 끌어들인다. 어머니를 여수 전라 좌수영으로 모셔 온 상황에서도, 그는 선수를 한산도로 돌린다.
삼도수군통제영
이듬해 6월 28일, 전라 좌수영을 통째로 한산도로 옮겨온다. 무너진 경상 좌수영의 빈자리와 원균의 무능을 어떻게든 메우기 위함이다. 또한 여수와 부산은 너무 멀었다.
한산도는 거제 외해를 돌아야 닿는 섬으로, 견내량을 지키면 연안으로 향하는 뱃길을 제어할 수 있는 요처다. 왜의 본거지인 부산에서 전라도로 향하는 바다의 길목이기도 하다. 천혜의 피항으로 풍랑을 피하기도 적당하고, 또한 왜적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는 최적의 거점이다. 여러모로 격군의 수고가 가벼워진다.
이런 간절함으로 전라 좌수영이 이진하자, 제해권을 통괄할 지휘부 필요성이 대두한다. 그해 8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임시관제로 설립된다. 이순신이 초대 통제사다. 당시 한산도는 무인도에 가까웠다. 통제영을 한산도 두억포에 세운다. 당시 업무 공간이던 운주당이 1700년대 이순신을 기리는 '제승당'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지난 10월 말, 통영을 찾았다.

▲한산도 제승당임시 관제일 때의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던 한산도 두억포. 운주당 자리에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인 '제승당'이 앉아 있다. 이순신의 '한산도가'가 탄생한 곳이다. ⓒ 국가유산청
이로써 한산도가 역사 전면에 등장한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하는 이순신의 '한산도가'가 탄생한 배경이다. 1595년 8월 15일(음력) 한산도 통제영에서 이 시조를 지었다는 게 통설이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어디 그리 순탄하기만 하던가. 악마는 언제나 미세한 내부에 깃든다. 무능한 왕이 첫째요, 출세욕에 눈이 먼 무능한 간신들이 둘째였다. 1597년 2월,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되자 통제사 자리에 원균이 앉는다. 하지만 그해 7월,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적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이순신이 백의종군 길에서 통제사로 복귀한다. 이로써 통제영도 그의 행로를 따른다. 명량해전 직후 목포 앞바다 고하도에 그야말로 임시로 통제영을 두었다. 천신만고 끝에 판옥선과 격군 등 전력을 보강, 조명연합군이 사로병진한 1598년 7월 완도 고금도 통제영에서 명나라 제독 진린을 맞이한다.
고금도를 본영 삼아 절이도해전은 물론 순천 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공격한다. 노량해전은 생쥐처럼 도망치려는 고니시 퇴로를 끊으려고 나선 싸움이다. 적의 흉탄에 이순신이 쓰러지고, 7년 전쟁은 막을 내린다.
무기를 씻어 평화로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 결과, 나라는 격랑에 빠져든다. 왕은 무능했고, 권력 지키기에 급급했다. 워낙 심하게 당한 전쟁이라, 그나마 나라가 간신히 버텨낸 게 다행이라 여길 정도였다.

▲통영(1872년_지방지도)지도 상단 가운데에 목을 막은 성곽과 원문(轅門)이 보인다. 통제영은 여황산과 남망산 사이의 지형을 따라 성곽을 쌓으니, 토실한 밤톨 모양이 되었다. 4대 문루와 북표루, 서표루, 동표루(標樓)가 보인다. 빼곡한 통제영 내부 묘사가 세밀하고, 네모난 '강구안'에 전선과 작은 배 정박이 정연하다. 남망산 좁은 해협에 동파수, 서파수를 두었고, 바다는 갑문으로 막았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1604년, 삼도수군통제영이 공식화한다. 위치가 관건이다. 이순신의 혜안을 따른다. 다만 한산도는 아니다. 무엇보다 방어에 유리한 반도 지형을 선택한다. 반도의 좁은 목에 800여 미터 남짓 성벽을 쌓고, 원문(轅門)을 두었다. 지금의 원문마을이 통제영 탄생의 증언자다.

▲강구안동파수와 서파수, 그리고 갑문이 있던 자리에 보행 교량이 좁은 바다를 건너고 있다. 다리 위에서 '세병관' 방향으로 바라 보자면, 당시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저절로 그려진다. ⓒ 이영천
여황산과 남망산 사이 완만한 경사지다. 너른 공간을 감싸듯 빙 둘러, 낮으나 급경사의 가파른 산 셋이 장승처럼 봉긋 솟았다. 동·서쪽 산 사이로 바다가 네모지게 파고들어 전투선 정박에 안성맞춤이다. 강구안이다. 남망산과 사이 좁은 바다엔 갑문을 두어 입·출항을 통제했다. 미륵도 북쪽 해협까지 제어한다면 내해 연안의 관리도 수월해진다. 한산도 바다를 장악해 학익진 같은 해전을 언제든 펼칠 수 있는 입지다.

▲세병관삼도수군통제영의 총괄 지휘소 격인 洗兵館(세병관). 군사적 위상에 걸맞게 매우 웅장한 건축물이다. 앞의 가파른 계단 아래에 있는 누각 세병루에 오르면, 통제영과 강구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 이영천
여황산 남쪽 자락의 완만한 경사지 한가운데 터를 닦아 '세병관(洗兵館)'을 앉혔다. 처참한 전쟁을 겪은 뒤이니 평화가 최우선이다. '세병'은 무기를 씻어 평화를 지향한다는 뜻이다. 무기를 녹여 보습을 만드는, 창조적인 생산의 뜻까지 담아냈다.
<껍데기 가라>는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위협과 파괴, 허위를 걷어내고 향기로운 흙 가슴만 남기를 바랐다. 염원이자, 평화 지향이다. 그런 바람이었을까, 세병관이 웅장하다. 모든 이의 염원을 담아내고도 남음이 있다. 이 웅장한 집에서 바다와 영토, 백성을 어찌 지켜낼 것인가를 끊임없이 궁구했을 것이다.

▲12 공방세병관 좌측에 생활과 전쟁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던 12 공방. 통영 공예의 태자리다. 뒤가 여황산이다. ⓒ 이영천
세병관 왼쪽엔 전쟁이든 삶이든 필요한 공구를 만드는 열두 공방을 두었다. 오늘날 통영 공예의 태자리다. 오른쪽으로는 관아와 내아 등 관리의 일상적 업무와 생활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표루가 포루로, 통영의 기억 피랑까지
2.5 킬로미터 둘레의 성을 쌓았다. 지형에 순응하다 보니 토실한 밤톨 모양이다. 여황산에서 양쪽으로 내리 뻗듯 팔을 벌려 동·서쪽 산으로 성곽을 이어나갔다. 여황산 정상에 북표루, 동산엔 동표루, 서산에 서표루를 두어 각각 망루와 지휘소를 겸하였다.

▲남망산과 강구안서피랑 꼭대기에서 바라 본 통제영의 바다. 가운데가 남망산이고, 그 앞이 강구안이다. ⓒ 이영천
표식의 상징이던 표루(標樓)가 방어와 실생활 중심으로 바뀌며 '펼치다, 베푼다'라는 포루(鋪樓)로 변신한다. 단순한 명칭 변화가 아니다. 치세의 무게 중심을 백성에 두겠다는 상징이다. 북포루·동포루·서포루의 등장 배경이다. 모름지기, 백성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이순신의 말처럼.

▲동포루동피랑의 꼭대기에서 지휘소를 겸하였던 동포루. ⓒ 이영천
이를 언제부턴가 '피랑'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벼랑을 뜻하는 피랑에서 이곳의 숙명을 읽어 낼 수 있다. 이 언덕은 통제영 시절부터 백성들 삶의 터전이었다. 성곽이 해체되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어민·노동자·피난민이 모여든다. 항만과 도심이 근대화를 따라 정신없이 커나갈 때도, 피랑은 늘 그 바깥을 서성였다. 가난하나, 낡은 지붕 아래 서로 의지하는 공동체의 온기로 살아냈다.
20세기 말, 재개발 압력이 이들 피랑마저 삼키려 들었다. '낙후지역재정비'라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동피랑이 철거 예정지로 지정된다. 가난한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내놓인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시민과 예술가들이 힘을 합쳐 '마을 벽화 그리기'를 벌인 것이다. 2007년이다.

▲동피랑재개발 압력에도 스스로 재생의 힘을 보여준 동피랑의 모습. ⓒ 이영천
색칠한 낡은 담벼락에 그림이 새겨지자, 세상의 마음도 따라 움직인다. 바다의 푸른 물결과 골목의 아이들, 주름 팬 주민들 얼굴이 되살아났다. 철거보다 '재생'의 지속성을 동피랑이 보여준 순간이다.

▲서포루서피랑 정상에서 지휘소를 겸하였던 서포루. 멀리 한산대첩 바다가 또렷하게 보인다. ⓒ 이영천
이 흐름이 서피랑으로 이어진다. 서피랑 역시 오랜 기억의 공간이다. 단장된 99계단과 시비(詩碑) 골목이, 쌓아온 세월을 문화로 품어냈다. 시민들도 옛 공간을 관광에만 내맡기지 않았다. 스스로 삶과 이야기가 담긴 '살아 있는 마을'로 가꿔 냈다.
피랑은 단순한 언덕이 아니었다. 통영의 얼굴이며, 개발 압력에도 스스로 되살아날 수 있는 '어떻게'를 생생하게 보여준 표본이다. 상처를 기억으로 품어낸, 쇠락이 승화한 예술 공간이다. 통영의 태생적 정체성을, 이들 피랑이 다시 살려냈다. 이처럼 통영의 기억은 세태가 바뀐다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도시의 아름다움은 화려함이 아니라, 세월을 견디며 지켜온 서로의 삶 속에 깃들어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