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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자 써윤씨의 모습
대담자 써윤씨의 모습 ⓒ 국경없는민주주의학교

이 대담은 미얀마 군부에 맞서 시민방위군(PDF)으로 전투를 하다 부상당한 써윤(37세)씨와 태국-미얀마 국경지역내 한 의료센터에서 진행되었다. 성공회대 정치외교학 전공학생 모임 '국경없는 민주주의학교'가 기획하고 필자(박은홍 성공회대 교수)가 진행했다.

대담 일시: 2025년 10월 12일.

"억누르면 들고 일어나고 건드리면 받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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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서 반갑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이름과 나이, 그리고 봄의 혁명에 언제부터 참여했는지, 그 이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말씀해 주세요.

제 이름은 써윤이고, 나이는 37살입니다. 2021년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날인 2월 1일에 바로 혁명에 참여했습니다. 초창기부터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봄의 혁명 이전에는 아내와 함께 중고등학교 과정의 사립학교를 운영하면서 다른 사업들도 했어요. 그리고 민족민주동맹(NLD)의 지역구 청년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 어느 지역 책임자였나요?

바고 지역 서부였습니다.

- 임시정부 민족통합정부(NUG)에서 방어 전쟁을 시작했을 때, 당신은 어느 지역에서 어느 조직 소속으로 참여했나요?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샨 주 북부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군사 훈련을 받았어요. 디데이(D-Day)가 선포되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나섰습니다. 원래 제가 있던 바고 지역 서부는 군부가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군부 휘하의 사단 본부도 많고 부대도 아주 많았지요. 그곳을 뚫고 나오기가 쉽지 않았지만, 조금씩 이동하면서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원래는 카친 주로 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군부가 카친으로 가는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기 위해 길을 완전히 막아버리는 바람에 갈 수가 없었죠. 그래서 목적지인 카친 주가 아닌 샨 주 북부의 UWSA(와주연합군) 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곳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바고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훈련을 받으면서 바고로 돌아가기보다 여러 지역에서 계속 싸우는 노선을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카레니 주에서도 활동하게 되었죠. 아직까지는 바고 지역에 있는 부대원들 그리고 기존 대대들과 연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지휘나 조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병력 보충, 식량 보급, 무기 지원 등 다방면으로 계속 관여하고 있습니다.

- 신체 어느 부위에 부상을 입었는지 말씀해 주시죠.

왼쪽 다리를 다쳤습니다. 발목부터 절단했습니다.

- 수술과 치료는 어디서 받았나요?

여기 카레니 주에는 군부 쿠데타를 반대하는 CDM(시민 불복종 운동) 소속 의사, 전문가, 교수들이 운영하는 병원들이 있습니다. 양곤(미얀마 남부 항구도시)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시민사회에서 오신 분들이지요. 외부로 나가 치료받는 것은 불가능해서 이곳에서 비밀리에 받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치료를 받고 있어요.

평화적 투쟁에서 무장 투쟁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싸우자"는 의미의 슬로건.
"값을 매길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싸우자"는 의미의 슬로건. ⓒ 국경없는민주주의학교

- 개인 자격으로 CDM에 참여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우리는 CDM 소속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NLD 당원이면 무조건 체포당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지역 청년 대표였기 때문에 더더욱 체포 대상이었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난 새벽 2시,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쳐 저를 체포했어요. '쿠데타가 일어났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특히 대중 선동이나 조직 활동은 일절 하지 마라. 어기는 즉시, 너뿐만 아니라 네 가족들도 체포할 거다'라는 경고를 들었고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풀려났습니다. 제 아들이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 어떤 계기로 무장 투쟁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나요?

우리 집안은 정치적인 가풍이, 할아버지 세대부터 버마공산당(BCP)에 참여해 군부에 맞서 무장 투쟁을 한 역사가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버마공산당에서 유명한 분이셨지요. 저는 2007년에 동물학으로 대학원 석사 과정을 밟고 있을 때, 샤프란 혁명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적이 있습니다. 석사 2년 차에 샤프란 혁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군부의 압박이 가해져 더는 학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 그럼 무장 투쟁의 길은 언제부터 걷게 되었는지요?

집을 떠날 때부터 그 길을 선택해서 걷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미얀마 젊은이들은 억압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합니다. '억누르면 들고일어나고 건드리면 공격한다'는 마음을 이미 갖고 있었어요. '좋아, 우리를 건드렸겠다. 우리가 바로 되갚아주겠다'라는 마음으로 사제 총, 폭탄 등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죠. 처음에는 평화 시위를 했지만 시위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평화 시위만으로는 한계가 있겠다 판단했어요. 그래서 집을 떠나 무장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데, 그저 구호만 외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 무장 투쟁을 시작하기로 선택한 시점의 상황을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해 주십시오.

무장 투쟁을 선택한 시점은 2021년 10월쯤입니다. 당시 우리는 게릴라전 형태로 싸웠습니다. 디데이(D-Day)가 선포되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는 사제 지뢰, 원격 조종 지뢰, 공격용 지뢰 등을 만들어 총격전을 벌이거나 관료들을 위협하는 데 활용했습니다.

- 당신은 NLD 당원이었고 NLD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 전 국가고문은 비폭력 노선을 견지한 분입니다. 수치 고문이 지금의 무장투쟁 노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이라고 보시나요?

노벨 평화상 수상자 수치 여사는 평화를 우선시하는 우리의 지도자이자 정치적 보호자입니다. 그분의 발자취를 온전히 따라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우리 NLD에는 고유의 노선과 정책이 있습니다. 핵심이자 첫 번째 원칙은 국민을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135개 소수민족들과의 원만한 관계 형성을 목적으로 했던 NCA(전국휴전협정) 같은 큰 프로젝트도 이런 원칙과 노선에 따른 것입니다.

수치 여사가 우리의 무장 투쟁 방식을 어떻게 보든 간에, 그분 역시 우리 국민의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수치 여사의 결정 없이 행동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점은 수치 여사 역시 국민이 피해를 입는다면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투쟁 노선이 잘못되었다면 우리가 책임질 것입니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온 나라의 해방을 위해 싸운 결과이므로 모두가 승리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반군부 전쟁 영웅 건모와 뚠미레나잉, 그들만의 민족주의를 넘다

 박은홍 교수(왼쪽)와 대담자 써윤(오른쪽)의 인터뷰 모습. 뒤쪽 벽면에는 "억압과 고문에 굴복하지 않는 영혼들이여 만세!"라는 의미의 슬로건이 걸려있다.
박은홍 교수(왼쪽)와 대담자 써윤(오른쪽)의 인터뷰 모습. 뒤쪽 벽면에는 "억압과 고문에 굴복하지 않는 영혼들이여 만세!"라는 의미의 슬로건이 걸려있다. ⓒ 국경없는민주주의학교

- 수치 고문의 의견과 무관하게 무장 투쟁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공감합니다. 그럼,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아라칸군(AA)의 뚠미레나잉 장군과 끼친독립군(KIA)의 건모 장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2021년 봄의 혁명이 시작되기 전에는 건모 장군이나 뚠미레나잉 장군을 각각 그들 소수민족의 지도자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봄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그분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가 혁명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AA와 KIA에서 군사 훈련, 전략, 전술 그리고 무장 투쟁 노선을 배웠기 때문이지요. 우리 버마족 대다수에게는 무장 조직이 없었습니다. 있다고 해도 충분한 투쟁 역량을 갖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AA와 KIA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나라에서 같은 물을 마시는 소수민족 형제들에게 군사 훈련을 받은 셈입니다. 그분들은 소수민족 지도자라는 위상에서 더 나아가, 최전선에서 봄의 혁명을 이끄는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 당신은 NLD 당원이면서 동시에 PDF 일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수민족 무장단체(EAOs)와 PDF가 힘을 합쳐 하나의 연방군을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우리나라의 정치, 교육 시스템, 생활 방식, 전통문화 등을 바탕으로 우리 스스로 개혁 방향을 연구해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가운데 하나는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는 교육, 지역별 문화, 도덕적 양심 이 세 가지를 기반으로 해야 연방제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연방제를 이루느냐 마느냐보다 지금 당장은 군부 독재를 무너뜨리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럼에도 연방제와 관련해서 첨언하고 싶은 점들이 있습니다.

먼저 민족 간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가령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교육을 두고 말한다면, 어떤 지역 사람들은 교육 수준이 높지만 아닌 곳도 있지요. 상황이 다 다릅니다. 모두가 동등해지려면, 이처럼 먼저 조율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각기 다른 욕심과 욕구가 있을 것입니다. 중앙 정부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고 해 줄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함께 살아갈 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아도 우리끼리 지켜야 할 규범이 있고 서로 맞춰가야 하는 것과 기다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옆집에서 장례를 치르는데 잔치를 벌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연방제는 군부 독재를 물리치고 난 다음에 우리가 그런 문화적이고 윤리적 바탕 위에서 이루어야 할 부분입니다.

- 소수민족들은 그들만의 민족주의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연대해서 같이 가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건모 장군이나 뚠미레나잉 장군이 그런 민족주의를 넘어서 전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연방제라는 사안을 두고 생각해 볼 점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습니다. 저쪽에서 양보해야 할 것도 있고 이쪽에서 양보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분명 건모 장군은 카친 민족의 지도자이고, 뚠미레나잉 장군은 아라칸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공동의 적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고, 지금도 우리 앞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공동의 적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연방제는 물론,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토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진정한 국민의 대변자들은 모두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방제나 연합제에 대한 논의는 실질적으로 필요한 의견과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한 명에게 물으면 하나의 답이 나올 것이고 천 명에게 물으면 천 개의 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우리 앞에 놓은 길에 대한 자유로운 논의를 원한다면, 우선 이 전쟁에서 끝까지 싸워 이겨야 합니다. 나는 다리를 잃었지만, 저항의 마음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직접 싸울 수 없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부대를 재건하는 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군인이 전쟁터의 최전선에서 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군인으로서 소명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를 둘러싼 감옥을 부수고 이 내전을 끝내야 합니다. 현재 가장 시급한 일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내전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 당신의 꺾이지 않는 의지에 경의를 표합니다.

#미얀마#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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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홍 내방

성공회대 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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